새로운 판 : 달라지는 제작 환경 - 글 이상우 협성대학교 강사

코로나19는 우리 사회 전체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는 중이다. 콘텐츠산업도 예외는 아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극장이나 공연장을 찾는 사람이 크게 줄었고, 그 대안으로 온라인을 통한 콘텐츠 소비가 급증했다. 콘텐츠 ‘소비’ 못지않게 ‘생산’ 측면의 변화도 크다. 오프라인 제작 환경의 감염 위험을 최소화하는 것은 물론 비대면으로 콘텐츠를 제작하기 위한 노력들이 이어지고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콘텐츠 제작 환경 변화를 살펴본다.

거리 두며 제작하기

콘텐츠 제작 현장에서도 원격 업무는 이제 낯설 것 없는 풍경이다. 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 등 실사 촬영을 대체할 수 있는 콘텐츠에 보다 집중하는 분위기다. 이와 관련해 캐나다의 썬더버드 엔터테인먼트(Thunderbird Entertainment)가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떠올랐다. 애니메이션 시리즈 <지구 최후의 아이들>, <101 달마시안 스트리트> 등을 제작한 스튜디오이며, 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국내에도 잘 알려진 시트콤 <김씨네 편의점> 역시 썬더버드의 대표작이다.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2020년 4월 28일 기사에서 썬더버드를 예로 들며 코로나19에 따른 TV스튜디오 진영의 제작 환경 변화를 다룬 바 있다. 썬더버드는 올해 전 세계적인 콘텐츠 제작 중단 사태가 벌어지기 한 달 전부터 이미 제작 프로세스를 전환하고 1,000여 명의 인력이 원격으로 업무를 진행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실사 콘텐츠 촬영이 어려워질 것에 대비해 애니메이션 제작 중심으로 제작 방향을 선회하는 한편, 변화하는 상황에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 고객 및 경쟁사와도 지속적으로 소통했다. 특히 원격 업무를 지원하기 위해 새로운 방화벽 구축과 VPN(Virtual Private Network, 가상사설망) 라이선스 등에 적극 투자했다. 현재 썬더버드는 사회적 거리두기 등의 안전 수칙을 준수하면서 가상 제작(virtual production) 시스템 등 기존과는 상이한 방식으로 촬영하는 방법도 고려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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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찍고 바로 북극으로

가상 제작 시스템은 비대면으로 영상을 제작할 수 있는 방법으로, 게임엔진을 통해 제작된 배경과 스튜디오에서 모션캡처1)로 촬영한 배우의 연기를 결합해 콘텐츠를 제작하는 방식이다. 촬영 과정은 가상현실(VR) 등으로 실시간 중계가 가능하며, 후보정 과정을 제작 단계에서 미리 적용해 전체 제작 기간도 단축시킬 수 있다. 또한 게임과 영상의 작업물이 누적될수록 배경 등의 요소를 수정 및 재활용할 수 있어 매우 효율적이다. 사실 가상 제작 시스템은 코로나19 확산 이전부터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 왔다. 2001년 개봉한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 2009년 개봉한 <아바타> 등은 가상 제작 시스템을 적용한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이러한 가상 제작 시스템은 그동안 SF나 판타지 장르 등 실제 촬영이 어려운 환경에서 선택적으로 활용되어 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코로나19의 확산과 사업장 봉쇄 조치가 맞물리면서 가상 제작 시스템이 장르에 관계없이 바이러스의 위험을 최소화하면서도 역동적인 영상을 담을 수 있는 방법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기술적으로도 크게 진화했다. 최근 가상 제작 시스템을 통해 배우들은 LED 스크린에 실사 이미지가 투영된 가상의 3D 환경에서 실시간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다. 기법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게임산업에서 파생된 새로운 기술을 기반으로 가상 제작 환경이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상 제작 시스템은 미래 영화제작 방식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세계 전역에서 제작진을 불러 모아 먼 거리를 이동해 가며 로케이션 촬영을 할 필요가 없다. 그 대신 특수 효과 아티스트가 대부분의 배경을 재창조할 것이다. 예를 들어 배우들이 의상만 갈아입으면 가상 제작 기법을 통해 사막 장면을 촬영한 다음날 곧바로 북극 장면을 촬영할 수도 있다. 이런 제작 방식은 전염병으로부터 안전한 것은 물론 시간과 비용 측면에서도 유리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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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 게임

가상 제작 시스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게임엔진’ 기술이다. 미국 할리우드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해 야외 현지 촬영이 어려워지자 게임 제작 소프트웨어를 활용해 가상 세트를 만들어 촬영을 재개하는 사례도 등장했다. 미국의 TV드라마 시리즈 <굿 트러블(Good Trouble)>은 최근 전개된 대표적인 가상 제작 사례 중 하나다. 이 드라마의 주요 무대는 미국 LA다. 하지만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봉쇄 조치의 여파로 촬영에 난항을 겪게 되면서 LA의 주요 장소를 디지털로 재창조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인기 FPS 게임 <포트나이트>에 활용되는 소프트웨어 등 게임 산업의 신기술을 도입해 디지털로 재창조된 배경을 토대로 야외 촬영의 상당 부분을 실내 촬영으로 대체할 것이라고 한다. 한편 스타게이트 스튜디오(Stargate Studio)는 가상 제작 붐에 힘입어 글로벌 시장에서 연간 2,6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이 스튜디오는 에픽게임즈가 개발한 ‘언리얼 엔진’을 제작 시스템에 활용하면서 게임 산업에서 차용한 기술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활용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엔터테인먼트 프로덕션 레벨리온(Relellion)이 가상 제작 시스템을 구축해 주목을 받고 있다. 이곳에서는 현재 서유럽 지역을 중심으로 실제 세상을 데이터화하는 작업도 진행 중이라고 한다. 레벨리온은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을 제작한 VFX(visual effects, 시각효과) 및 모션캡처 시설 ‘오디오모션(Audiomontion)’, 영상촬영 스튜디오 ‘레벨리온 스튜디오(Rebellion Studio)’ 등의 시설을 확보하고 있으며, 기존 영화 제작에 활용했던 다양한 기술을 결합해 비대면 가상 제작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TV시리즈 + 애니메이션

코로나19로 인해 TV시리즈 제작에 차질이 빚어지자 미국 방송 업계에서는 새로운 에피소드나 미처 촬영하지 못한 장면을 애니메이션으로 보완해 완성하는 사례도 발견됐다. 코로나19가 실사 TV시리즈와 애니메이션의 경계를 희석시키면서 TV시리즈 포맷의 진화를 앞당기고 있는 셈이다. 미국에서 방영된 TV시트콤 <원 데이 앳 어 타임(One Day at a Time)>의 경우, 코로나19로 인해 촬영이 중단되자 기존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에피소드 중 하나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다. 이 스페셜 에피소드는 2020년 6월 16일 방송되었으며, 애니메이션 특유의 기법을 매개로 캐릭터 고유의 특성을 극대화해 화제를 모았다. 드라마 제작진과 애니메이션 제작사는 원격으로 긴밀히 협력해 이 스페셜 에피소드를 제작했으며, 출연진 역시 각자의 집에서 대사를 녹음했다고 한다. 또한 범죄 스릴러 드라마 <블랙리스트(The Blacklist)&g<>;의 경우에는 당초 계획했던 22개 에피소드를 완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2020년 5월15일 19개 에피소드로 일곱 번째 시즌을 조기 종영해야만 했다. 이에 제작진은 보다 참신한 방식으로 시즌을 종료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고, 마지막 에피소드에 미처 촬영하지 못한 장면을 넣기 위해 애니메이션 기법을 활용했다. 작업 과정 역시 온라인 화상 회의 플랫폼을 통해 모든 것이 원격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제작 사례는 코로나19로 인한 콘텐츠 공급 위축 상황에서 제작을 활성화하고 완성도를 높이는 새로운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에 맞는 제작 환경 마련해야

국내에서도 코로나19 이후 콘텐츠 제작 환경에 대한 고민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은 빛마루방송지원센터를 통해 비대면 영상 제작 서비스를 강화한다고 발표했다. 빛마루방송지원센터는 기존 중소제작사 방송 콘텐츠 제작 지원 외에 컨퍼런스 및 K팝 온라인 콘서트 등 비대면 영상 콘텐츠 제작 컨설팅을 활발히 운영 중이다. 자동차 제작사와 함께 신차 온라인 공개, 주요 개발자 포럼 온라인 서비스 제공, 아이돌 그룹 신곡 온라인 발표 콘텐츠 등 지금까지 오프라인으로만 제공되던 것들을 온라인 콘텐츠화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또한 중장기적으로 스튜디오 고도화를 통해 언택트 시대 국내 방송 콘텐츠 제작 역량을 강화할 계획이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될 경우 콘텐츠 제작 환경은 더욱 위축될 것이다. 온라인 콘텐츠 소비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공급을 늘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콘텐츠 제작 전략이 필요하다. 기술을 통한 비대면 콘텐츠 제작은 감염병 확산 예방은 물론 제작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을 낮추고, 나아가 다양한 장르가 결합된 새로운 콘텐츠 양식을 탄생시키고 있다. 우리나라가 정보 통신, 게임 등 관련 산업에 강점이 있는 만큼 이를 활용한 비대면 콘텐츠 제작이 국내에도 빠르게 정착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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