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 세대의  상상플레이 : 파괴와 조합을 즐기다

수용자가 기존 콘텐츠를 가공해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서 소비하는 것도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그러나 특히 최근 MZ 세대의 콘텐츠 소비자들이 수많은 동영상 데이터를 조합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

마징가 VS 태권브이

어린 시절 누구나 이런 상상을 해봤을 것이다. “마징가와 태권브이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마징가와 태권브이는 서로 다른 세계에 있지만 허구의 세계는 쉽게 다른 허구의 세계와 결합한다. 물론 그 시절, 마징가와 태권브이의 싸움은 아이들의 상상 속에서만 이뤄졌다. 현실에서 만나려면 해결해야 할 어른들의 문제가 산적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간절히 원하면 어떻게든 이루어지는 법. 아이들 중에 그림 솜씨가 좋은 녀석들은 직접 연습장에 마징가와 태권브이의 싸움을 만화로 그려서 친구들에게 보여줬다. 누가 이기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동경하는 두 로봇이 하나의 작품에서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이들은 기뻐했다. 이렇듯 콘텐츠 소비자가 두 세계관을 섞어서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작업(2차 창작)은 꽤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만화·애니메이션 강국 일본에서는 꽤 오래전부터 2차 창작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과거의 2차 창작은 주로 소설이나 만화 형태로 만들어지고 소비되었다. 자본과 기술이 부족한 일반인들이 그나마 저예산으로 시도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창작물을 공유하는 것도 소량으로 출판한 뒤에 비정기적인 행사나 모임을 통해 나눠 보는 것이 전부였다. 연예인들을 대상으로 창작되는 ‘팬픽’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작동한다. 대부분의 2차 창작은 열성 팬들을 중심으로 서로의 창작물을 공유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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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환경

서브컬처 수준이던 2차 창작은 유튜브와 같은 동영상 플랫폼이 활성화되면서 주류문화로 떠올랐다. 이제 사람들은 동영상을 편집해 자신만의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수많은 이들과 공유하고 있다. 동영상을 활용한 2차 창작이 활성화될 수 있었던 이유는 기술이 진화했기 때문이다. 컴퓨터 성능이 향상되고 가격이 저렴해지면서 누구나 손쉽게 고화질 동영상을 편집할 수 있게 되었고 제작한 영상을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영상을 편집하고 유통하는 데 있어 진입장벽이 낮아진 것이다. 사실 고품질의 영상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많은 자본이 투입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미 제작된 영상을 편집하고 유통하는 비용은 매우 낮아졌다. 게다가 웹에는 수많은 동영상 데이터들이 떠다니고 있다. 풍부한 재료와 저렴한 편집비용, 그리고 디지털 유통구조가 결합되면서 2차 창작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자신이 상상하는 모든 콘텐츠를 현실로 재구성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진 셈이다. 물론 그 중심에는 이런 ‘상상플레이’를 적극적으로 생산하고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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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Z 세대의 콘텐츠 소비

MZ 세대, 즉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들의 콘텐츠 이용방식이 과거의 세대들과 다르다는 점도 상상플레이가 활성화되는 요인이다. 이들은 디지털 환경에 익숙하고, 모바일을 매우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또한 콘텐츠를 ‘완성품’이 아니라 사용자의 의견을 더해서 함께 만드는 ‘미완성품’으로 생각한다. 실제로 MZ 세대들은 방송국의 시청자 게시판을 활용해서 영상 콘텐츠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한다. 게다가 IPTV로 대표되는 디지털 환경은 콘텐츠를 반복해서, 분석적으로 시청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는 일본의 오타쿠 문화가 VTR을 통해 애니메이션을 보다 정밀하게 분석하면서 시작되었다는 점과 맞닿아 있다. 결국 콘텐츠를 반복적·분석적으로 감상하는 시청자들이 해당 콘텐츠의 팬덤을 형성하면서 단순히 ‘보는’ 시청자가 아니라 분석하고 참여하는 시청자로 변화했다. 〈무한도전〉과 같은 예능 프로그램이 아마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아울러 MZ 세대들은 유튜브 콘텐츠의 이용률이 매우 높게 나타난다. 그들은 특정 개인이 영상을 생산하고 편집하는 것을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나아가 생산자와 매우 능동적으로 소통하며, 콘텐츠 제작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이러한 MZ 세대의 콘텐츠 소비 성향이 서로 다른 콘텐츠를 조합하는 행위를 보다 촉진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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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함브라 궁전의 불시착

서로 다른 콘텐츠를 조합하는 ‘상상플레이’는 유튜브 채널에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CJ ENM의 유튜브 채널 ‘디글(Diggle)’에서는 ‘편집자 망상 100% 페이크 뮤비 프로젝트’라는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고 있다. 이 채널에서는 서로 다른 드라마 두 편을 편집해서 원작이 의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여기에 적절한 음악을 입히면 꽤 그럴싸한 뮤직비디오 한 편이 완성된다. 그 옛날 ‘마징가와 태권브이’를 한 자리에서 싸우게 했던 것처럼 한 번쯤 상상했던 이야기를 현실로 구현하는 것이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남주인공 유진우(현빈)와 〈사랑의 불시착〉 여주인공 윤세리(손예진)를 결합하면 〈알함브라 궁전의 불시착〉이 완성된다. 이미 〈사랑의 불시착〉에 현빈이 등장했기 때문에 콜라보의 효과는 더욱 극대화된다. 〈비밀의 숲〉과 〈시그널〉을 결합한 〈시그널의 숲〉 역시 마찬가지다. 이미 조승우와 김혜수가 〈타짜〉라는 작품에서 호흡을 맞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상플레이’의 장점은 데이터가 누적될수록 더 많은 콘텐츠가 생산될 수 있다는 점이다. 사용할 수 있는 재료가 많아질수록 더 흥미로운 영상이 만들어질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A캐릭터와 B캐릭터가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런 상상만으로도 얼마든지 흥미로운 콘텐츠가 만들어진다. 이는 작가와 서사의 힘보다 편집과 데이터의 힘이 더 강해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런 경향은 미래의 1차 창작에도 많은 영향을 줄 것이다.

ⓒ 디글 ⓒ 디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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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베이스를 소비하는 시대

일본의 평론가 아즈마 히로키는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라는 저서에서 ‘데이터베이스 소비론’을 이야기한 바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사람들은 ‘거대한 이야기(세계관)’가 아닌 ‘비(非)이야기(데이터베이스)’를 소비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일본의 오타쿠 문화를 설명하면서 해당 이론을 제시했지만 ‘데이터베이스 소비론’은 오늘날 영상 데이터가 범람하는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무엇보다 영상에 접근해서 자유롭게 편집할 수 있는 기술이 보편화되었다는 점에서 이런 소비를 더욱 가속화시킬 것이다. 데이터베이스 소비는 이야기에 내재된 수많은 요소들을 분해해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전혀 다른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다. 영상에 접근해 가공할 수 있는 기술이 보편화될수록 원작의 파괴와 이종결합은 더 활발하게 벌어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원작에는 없던 전혀 새로운 캐릭터나 설정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MZ 세대들은 이런 파괴와 조합에 이미 익숙하며, 그것을 적극적으로 즐기는 세대다. 영상 데이터가 누적될수록 ‘상상플레이’의 영역도 보다 넓어질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소비자인 동시에 창작자가 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마징가와 태권브이가 공존하는 그런 시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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