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IP를 찾아라- IP의 끝없는 확장

2018년 여성 4인조 그룹으로 데뷔한 K팝 아이돌이 있다. 데뷔곡 뮤직비디오는 공개 일주일 만에 유튜브 1억 뷰를 돌파했고, 2만 6천여 명이 운집한 e-sports 세계대회에 오프닝 가수로 초청되기도 했다. 2020년에는 첫 번째 미니앨범 〈ALL OUT〉을 발표하며 큰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얼핏 BTS, 블랙핑크와 같은 대형 아이돌 가수의 활동 내용 같지만, 사실은 라이엇게임즈가 자사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LoL)〉의 캐릭터로 선보인 가상 K팝 걸그룹 K/DA의 이야기다.

OSMU와 기술의 만남

K/DA의 기획과 데뷔 과정을 살펴보면 실제 K팝 아이돌 그룹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 K팝 멜로디와 뮤직비디오 콘셉트, 댄스는 기본이고 멤버별 성격과 취향까지 세세하게 설정했다. 노래도 실제 K팝 아이돌 그룹인 ‘(여자)아이들’ 멤버들과 미국 팝스타가 직접 불렀다. 가상의 잡지 인터뷰와 브이로그로 팬들과 소통하고, 웹툰 등의 다른 장르로도 확장된다. 이 모든 활동은 게임 속 세계관과 다른 별개의 평행세계(유니버스) 설정이므로 원작 게임 캐릭터의 존재감을 해치지 않는다. 마치 ‘실재하는 아이돌 그룹’을 만든 라이엇게임즈는 게이머는 물론 게임을 하지 않는 대중에게도 어필하는 ‘팬덤’을 얻음과 동시에 게임 내 캐릭터 스킨, 음원 등의 수익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노래를 부른 실제 가수도 전 세계적인 팬층을 확보하게 됐다. K/DA의 성공은 콘텐츠의 결합, 즉 OSMU(One Source-Multi Use)와 IT 기술력의 만남이 얼마나 큰 시너지를 일으키는지 알려주는 사례가 되었다.

그동안 제한적으로 이뤄졌던 IP의 OSMU는 이제 한계를 돌파하며 다양한 콘텐츠와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물론 꽤 오래전부터 OSMU가 꾸준히 시도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만화, 웹툰이 원작인 영화 〈타짜〉와 〈은밀하게 위대하게〉, 드라마 〈미생〉도 OSMU의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최근에는 강력한 IP를 활용하여 매우 다양하고 전방위적인 OSMU를 기획하는 추세다. 이미 대중에게 인정받은 IP인 만큼 이를 활용하여 시너지 효과를 기대함과 동시에 급성장한 IT 기술로 각 문화 장르의 특성에 적합한 변형과 구현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소비자의 한정된 시간을 두고 경쟁하는 콘텐츠산업 특성상 IP는 이제 웹툰, 애니메이션, 드라마, 영화, 소설 등 가능한 모든 장르로의 확장을 할 수 있게 하는 ‘플랫폼’의 위상도 가지게 됐다.

애니메이션의 다양화

언택트 시대가 도래하며 국내 다양한 온라인 콘텐츠 산업이 큰 성장세를 보인 가운데, 웹툰·웹소설 시장의 성장률이 매우 가파르다. 웹툰·웹소설은 10년 넘게 이용자와 콘텐츠 소비 시간이 동시에 성장해왔고, 최근에는 콘텐츠 소비 시간이 2020년 7월 전년 동월 대비 24% 대폭 증가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미국, 태국 등에서 인기를 끈 웹툰 〈여신강림〉과 만화산업 강국 일본에서도 인정받은 웹툰 〈나 혼자만 레벨업〉 등 해외 진출에도 성공적으로 안착하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국내 웹툰·웹소설 플랫폼 기업은 자사의 인기 작품 IP를 활용한 OSMU에 주력하는 추세다. 기존 국내 애니메이션이 아이들을 주 타깃으로 했다면, 최근에는 IP 를 활용해 청소년, 성인 대상의 다양한 애니메이션 제작이 활발해지고 있다.

현재 두 자릿수의 여러 국내 웹툰 기반 애니메이션이 기획/제작되는 가운데 가장 먼저 포문을 연 작품은 〈신의 탑〉이다. 만화가 시우의 〈신의 탑〉은 주인공 소년 ‘스물다섯째밤’이 소녀 ‘라헬’을 찾아 광대한 세계 ‘탑’에 오르는 내용을 담고 있다. 탑이라는 특수하고 방대한 세계관을 기반으로 펼쳐지는 치열한 두뇌 플레이와 흥미로운 스토리 전개로 글로벌 팬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2010년부터 현재까지 10년 넘게 연재되고 여전히 네이버웹툰 인기 순위 1위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국내 대표 인기 웹툰이자, 전 세계 웹툰 시장에서 누적 45억 뷰를 돌파한 작품이기도 하다.

원작의 인기에 힘입어 네이버웹툰은 미국의 스트리밍 사업자 크런치롤, 일본 텔레콤애니메이션필름과 합작하여 만든 TV판 애니메이션 〈신의 탑〉을 한·미·일에 동시 방영했다. 기대와 우려가 섞였던 첫 화 공개 이후, 시청자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1화 공개 직후 미국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 키워드 9위에 ‘신의 탑’이 올랐고, 커뮤니티 사이트 레딧(Reddit)의 주간 인기 애니메이션 랭킹에서 1위를 차지했다. 네이버웹툰은 이후 〈갓 오브 하이스쿨〉, 〈노블레스〉를 연달아 애니메이션으로 방영하여 시청자에게 좋은 평가를 받으며 인기를 이어가는 한편 〈연의 편지〉, 〈유미의 세포들〉, 〈나노리스트〉의 애니메이션화를 진행하고 있다. 특히 제작 중인 세 작품은 국내 애니메이션 제작사와 합작하고 있어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과 시장 규모를 성장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게임을 보다, 게임을 읽다

게임은 그 자체만으로도 영상과 음악, 스토리 등 다양한 장르가 묶인 ‘종합 콘텐츠’다. 때문에 다른 콘텐츠로의 변용이 비교적 많이 시도되었고, 반대로 영화나 만화가 게임으로 변신하는 사례도 많았다. 이전에도 〈툼 레이더〉나 〈바이오하자드〉, 〈배트맨〉 등 게임 원작의 영화, 만화 원작의 게임이 만들어졌지만 최근에는 그 양상이 더욱 다채로워졌다.

국내 드라마 업계는 게임 IP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데이세븐의 연애 시뮬레이션 스토리 게임 〈일진에게 찍혔을 때〉는 지난해 15부작 웹드라마로 재탄생했다. 국내 드라마 제작사 와이낫미디어가 제작한 이 드라마는 누적 조회 7,000만 뷰를 달성하며 지난해 하반기 웹드라마 시장의 최고 인기작으로 급부상했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올해 상반기에는 시즌2를 제작, 다시 한번 인기를 이어가기도 했다. 게임 내 매력적인 등장인물, 아름다운 일러스트, 가슴 설레는 청춘 로맨스 스토리로 여성 팬이 특히 많아, 게임 내용을 원작으로 한 소설책과 웹툰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스토리가 탄탄한 게임의 설정집과 소설을 출간한 게임기업도 있어 눈길을 끈다. 위메이드는 지난해 자사 게임 〈미르〉 시리즈의 세계관을 집대성한 〈미르 연대기: 용의 대기, 불과 마법의 역사〉를 출간했다. 실제 게임 세계에서 일어난 일들을 고전 역사서처럼 서사문학의 형태로 풀어냈다는 것이 특징이다. 아울러 웹소설 〈금갑도룡〉도 카카오페이지에 공개했다. 특히 지난 20년간 많은 관심을 받았던 원작 게임 속 설정과 세계관이 가득 담겨 오랜 게임 마니아층부터 무협 소설 팬까지 모두 사로잡았다.

주인공의 선택은?

영화와 드라마, 애니메이션 IP도 OSMU 열풍에 합류했다. 다른 콘텐츠 영역에 접근하여 더 많은 팬을 확보하기 위해 기꺼이 진화한 것이다. 가장 실험적이면서도 예상외의 흥행 가도를 달리는 분야는 게임이다. 그간 원작의 설정이나 캐릭터만 빌려오거나 홍보용으로서 개발된 게임은 많았지만 ‘스토리’를 전면에 내세워 흥행한 게임은 많지 않았다. 특히 컴투스에서 출시한 〈스토리픽〉은 아예 흥행 영화·드라마의 서사를 전부 끌어들여 게이머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른바 ‘인터랙티브 스토리 게임 플랫폼’이다. 사상 초유의 흥행을 기록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킹덤〉의 새로운 이야기를 플레이해볼 수 있다는 소식에 수많은 원작 팬이 게임을 즐기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스토리픽〉의 게임은 드라마·영화와 동일한 시놉시스를 따른다. 다만 중요한 순간마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내용 전개가 크게 달라진다. 원작의 스토리를 기본적으로 따라가면서도, 원작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서사도 즐길 수 있다. 특히 매주 새로운 에피소드를 업데이트하면서 마치 드라마나 웹툰을 기다리는 느낌도 받을 수 있다. 〈킹덤〉 스토리픽의 흥행으로 웹드라마 〈오피스워치〉, 예능프로그램 〈하트시그널〉 등의 인기 콘텐츠도 연달아 〈스토리픽〉을 통해 게임화됐다.

명작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게임화도 눈에 띈다. 일본의 인기 만화·애니메이션 〈일곱 개의 대죄〉 IP를 활용한 넷마블 모바일 게임 〈일곱 개의 대죄: GRAND CROSS〉는 국내와 일본에서 모두 흥행에 성공하여 170여 개국에 진출했다. 지난 6월에는 북미 앱스토어에서 최고 매출 순위 3위, 프랑스 등 주요 국가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슬램덩크〉, 〈동방불패〉, 〈왕좌의 게임〉 등도 국내 게임사의 손을 거쳐 게임으로 재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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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IP를 갈망하다

모든 콘텐츠가 새로운 돌파구로서 OSMU를 활용하고 그만큼 매력적인 작품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그러나 ‘재창작’ 콘텐츠가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기술적인 발전으로 변용이 자유로워졌다 해도, 원작 장르만이 가진 강점을 다른 콘텐츠에 고스란히 옮기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텍스트뿐인 소설은 독자 개개인의 상상력으로 콘텐츠를 완성한다. 그러므로 소설을 영상매체로 옮기면 많은 원작 팬은 가치가 훼손됐다는 혹평을 내릴 때가 많다. 인터랙티브 요소가 강한 게임은 게이머가 긴 서사를 직접 체험하면서 즐기는 콘텐츠인데, 이를 비교적 짧은 호흡으로 줄인 영화나 드라마로 옮기면서 원작의 감동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할 때도 있다. 따라서 콘텐츠업계는 ‘특정 콘텐츠에 뿌리를 두지 않으면서도 어떤 형태로든 자유롭게 변형되는 IP’를 갈망하게 된다. 이른바 ‘슈퍼IP’의 등장이다.

슈퍼IP란 OSMU의 원천이면서도 더욱 이상적인 개념이다. 일반적인 OSMU가 개별 콘텐츠를 개별적으로 활용하는 데 주력한다면, 슈퍼IP는 기획 단계부터 확장성을 염두에 둔 소스다. 개별 캐릭터 서사와 통합 서사가 조화를 이루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나 수많은 캐릭터들을 한 데 묶어 다양한 콘텐츠로 만드는 〈포켓몬스터〉시리즈가 슈퍼IP의 좋은 예다.

국내에서도 IT기업의 주도로 슈퍼IP 경쟁이 시작되었다. 네이버와 카카오는 독점 웹툰과 웹소설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작품간 컬래버레이션을 시도하고, 넥슨을 비롯한 게임기업은 자사 게임의 캐릭터, 스토리로 다른 장르의 게임과 영상·소설·웹툰으로의 확장을 노린다. 더 많은 오리지널 콘텐츠를 확보할수록 확장 가능성이 높아지므로 저작권의 가치도 덩달아 중요해지면서, 상대적으로 저평가를 받아왔던 창작자의 위상도 다소 높아지는 선순환 구조도 엿보인다.

오늘날 보이는 OSMU 트렌드도 알고 보면 치열한 IP확보 경쟁이다. 더 깊게 보면 매력적인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창작력 싸움이기도 하다.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소설, 게임 등 각각의 창작콘텐츠는 고유의 영역이 아직 확고하지만, 서서히 그 경계를 허무는 전천후 콘텐츠가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이제 영화제작사는 게임이나 웹툰까지 생각하며 영화를 만들고, 게임제작사는 자사의 게임으로 영화를 선보인다. 이미 소설가는 만화가와 협업하여 웹툰을 만든 역사가 깊다. 그리고 이러한 ‘믹스’의 결과물에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다. 어쩌면 머지않은 미래에는 각각의 콘텐츠 제작사가 오리지널 세계관으로 무장한 ‘종합 콘텐츠 기업’으로 변모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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