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 그 전략과 진정성 사이- 아이돌 IP를 활용한 세계관 구축 전략

이제 K팝 아이돌을 이야기하면서 세계관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됐다. 엑소로부터 개념이 정착되어 방탄소년단에 의해 열매를 맺은 세계관. 그 K팝 아이돌 세계관에 담긴 전략은 무엇이고 그것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어떤 전제가 필요할까.

신비함을 입히다

‘어떤 지식이나 관점을 가지고 세계를 근본적으로 인식하는 방식이나 틀.’ 이것이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세계관의 사전적 의미이지만, 대중문화 콘텐츠의 영역에서 말하는 세계관은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즉 콘텐츠에서 세계관이란 ‘가상으로 설정된 세계’를 뜻한다.

예를 들어 마블이 탄생시킨 아이언맨이나 스파이더맨의 세계관은 저마다 슈퍼히어로의 탄생과정이 담긴 설정된 가상의 이야기들로 채워진다. 무기를 팔아 백만장자가 된 하워드 스타크의 아들이자 천재 엔지니어였던 토니 스타크가 아머를 개발해 입고 적들과 싸우는 것이 아이언맨의 세계관이라면, 어느 날 방사능 거미에 물려 초능력(거미의 특성을 닮은)을 갖게 된 평범한 학생 피터 파커가 악당들과 대적하는 것이 스파이더맨의 세계관이다. 마블은 이런 각각의 슈퍼히어로들을 저마다의 세계관으로 탄생시킨 후, 이들을 다시 묶어 〈어벤져스〉라는 팀의 이야기로 그 세계관을 확장시킨다. 그래서 지금은 마치 수많은 행성들을 포함한 은하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각각의 세계관들은 ‘마블 유니버스’라는 통칭으로 대중들에게 각인되어 있다.

그런데 이 세계관은 이제 마블뿐만 아니라 K팝 아이돌에 열광하는 팬들에게도 익숙한 개념이 됐다. 2011년 데뷔한 아이돌 그룹 엑소는 K팝이 세계관을 차용한 첫 번째 사례로 꼽힌다. 태양계 외행성을 뜻하는 엑소플래닛에서 이름을 따온 엑소는 그 행성에서 날아온 멤버들이 염동력, 시간, 공간, 불, 물 같은 다양한 초능력을 갖고 있다는 세계관을 제시하며 등장했다. 사실 이러한 세계관이 처음부터 익숙하게 받아들여진 건 아니다. 그래서 이들 저마다의 초능력을 가졌다는 설정의 멤버들은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그 세계관을 웃음의 코드로 활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엑소의 세계관은 우주를 배경으로 할 정도로 웅장했고 그 디테일한 설계로 인해 K팝 팬들을 점점 열광하게 만들었다. 이들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은 음악과 영상, 이미지 같은 콘텐츠 속에 녹아들어갔고, 팬들은 해석의 즐거움에 빠져들었다. 일종의 심리적 장벽이 무너지면서 ‘아는 이들만 아는’ 그들만의 세계관은 오히려 팬덤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다. 엑소의 세계관은 콘텐츠가 등장할 때마다 팬들이 모여 좀 더 깊게 빠져들고 더불어 놀 수 있는 밑바탕이 되어주었다.

물론 엑소 이전에도 K팝 아이돌의 세계관은 존재했다. SM엔터테인먼트는 H.O.T같은 1세대 아이돌 그룹에도 멤버들에게 저마다의 고유 번호와 색깔, 이름 등을 부여함으로서 독특한 캐릭터를 구축하는 시도를 해왔다. 동방신기 역시 그룹명에 담긴 것처럼 ‘동방에서 신이 일어난다’는 다소 신화적인 의미를 부여했고, 멤버들도 최강창민, 유노윤호 같은 캐릭터의 색깔이 더해진 이름을 붙였다. 즉 엑소로부터 본격적으로 세계관의 개념이 정착됐지만, K팝 아이돌들은 초창기부터 세계관의 씨앗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세계관은 보통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어떤 신비한 존재로서의 아이돌의 이미지를 그려내기 위해 이들에게 가상의 스토리를 더한 캐릭터를 부여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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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 놀이터

엑소 이후 많은 K팝 아이돌들이 독특하고 다양한 세계관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룹 B.A.P는 ‘마토 행성 출신의 소년들이 위기에 처한 행성을 구하기 위해 우주를 헤매다 지구에 도착했다’는 세계관으로 데뷔했고, 마토 행성의 군인인 마토끼 캐릭터와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걸 그룹 드림캐쳐는 판타지 세계 속의 7개의 악몽을 상징하는 소녀들과 이들을 좇는 악몽헌터와의 추격전이라는 다소 어두운 세계관을 속도감이 느껴지는 강렬한 헤비메탈 사운드와 춤, 이미지로 표현해냈다. 미스터리한 이 세계관에 들어온 팬들은 새로운 앨범이 나올 때마다 거기 담긴 소녀들의 7가지 악몽의 비밀을 찾는 재미에 빠져들었다.

방탄소년단은 헤르만 헤세의 성장소설 〈데미안〉을 모티브로, 껍질을 깨고 나와 조금씩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들의 세계관으로 삼았다. 학교를 배경으로 한 ‘학교 3부작’, 청춘을 주제로 한 ‘화양연화’ 2부작,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자는 메시지를 담은 ‘러브 유어셀프’ 3부작과 칼 구스타프 융의 이론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맵 오브 더 소울’ 2부작이 그것이다. 방탄소년단의 글로벌한 인기는 물론 노래와 칼군무 그리고 SNS를 통한 팬들과의 소통 같은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한 결과이지만, 이들의 실제 성장과정을 녹여낸 ‘리얼 세계관’의 힘을 빼놓을 수 없다. ‘21세기 비틀즈’라 불릴 정도로 실제 놀라운 성장을 보여준 방탄소년단의 리얼 스토리는 그래서 그들의 세계관이 가상이 아닌 현실이 되는 기적 같은 상황을 보여줬다. 방탄소년단의 팬덤 아미(ARMY)는 이 일관된 세계관의 메시지를 공유함으로써 더욱 공고한 연대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밖에도 세계관의 성공사례로 일컬어지는 그룹 여자친구는 ‘유리구슬’을 시작으로 ‘오늘부터 우리는’, ‘시간을 달려서’가 ‘학교 3부작’으로 불리며 좋은 반응을 얻었고, 그룹 세븐틴은 ‘아낀다’, ‘만세’, ‘예쁘다’를 통해 ‘소년 3부작’으로 인기를 얻었다. 또 컨셉돌로 유명한 빅스는 질투의 신 젤로스, 죽음과 암흑의 신 하데스, 권력의 신 크라토스를 소재로 한 ‘그리스 로마 신화 3부작’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제 K팝 아이돌들의 세계관은 마치 게임 속 캐릭터를 찾아 즐기듯 팬들이 들어와 그들만의 세계에서 소통할 수 있는 놀이터가 되었다. 이런 세계관이 더욱 강력해지게 된 건 바로 이런 배타적인 요소 때문이다. 그 세계 속에 몸을 담아야 비로소 이해되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그들만의 팬덤을 더욱 끈끈하게 만들어낸다. 그래서 가상의 설정이지만 그 세계관은 이들에게 강력한 소속감을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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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모델로의 확장

세계적인 인기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LoL)〉와 협업해 만들어진 가상 걸그룹 K/DA에는 ‘(여자)아이들’의 미연과 소연이 포함됐다. 실제로 2018년 롤드컵 결승전 무대에 증강현실 기술을 통해 가상의 캐릭터와 실제 가수들이 함께 선보인 공연은 단 하루만에 616만 조회 수를 돌파하며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한편 FNC엔테테인먼트는 신인 아이돌 그룹 피원하모니(P1Harmony)를 선보이면서 그 세계관을 담은 영화 〈피원에이치: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제작 극장에서 상영하기도 했다. 분노와 폭력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로 폐허가 된 세상을 구하기 위해 다른 차원에 흩어진 소년들이 모여 희망의 별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SF휴먼드라마인 이 영화는 이제 K팝 아이돌의 세계관은 게임은 물론이고 영화와도 손을 잡고 다양한 방식의 사업모델로 확장되어가고 있다.

이처럼 세계관은 그 그룹만의 독특한 차별점을 그려내고 일관된 스토리를 통해 지속적인 재미요소들을 만들어내면서, 동시에 다양한 ‘원소스멀티유즈(OSMU)’로서의 사업모델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K팝의 소비는 이제 음원, 콘서트, 방송의 차원을 넘어서 이들의 세계관을 담은 영화, 게임, 책 같은 다양한 콘텐츠 소비로 확장된다.

사실 전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삼게 된 요즘, 너무나 많이 쏟아져 나오는 가수와 그룹들은 하늘의 별만큼이나 그 존재감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시작부터 이들은 각각의 별들을 이어서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세계관이라는 이름의 별자리를 그리게 됐다. 확실히 이 별자리는 스토리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눈에 쏙쏙 들어오고, 다양한 타 분야와도 연결되어 사업다각화를 가능하게 해줬다.

하지만 세계관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태초에 그 K팝 아이돌이 음악과 삶에 대해 갖는 생각들이 진정성 있고 일관되게 담겨져야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단순한 전략에 머물 것이고, 그것은 생각을 공유하는 세계관이 아니라 그저 다양한 소비를 강요하는 상술로 전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관은 이제 K팝 아이돌에게는 필수적인 요소가 됐다. 하지만 그 세계관의 성공은 멤버들의 진심이 담겨진 진짜 캐릭터들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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