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P로 완성하는 종합 콘텐츠 기업 -엔터테인먼트에 주목하는 게임업계

대부분 게임에는 ‘보스’라는 강력한 존재가 있다. 게이머의 앞길을 막는 보스는 phase(단계)마다 공격·방어패턴이 까다로워지면서 게이머의 세밀한 공략과 수준 높은 플레이를 요구한다. 이런 게임을 만드는 게임사도 현실에서 ‘미래’라는 이름의 강력한 보스를 넘어서기 위해 수많은 전략과 투자를 감행해왔다. 특히 우리나라 게임업계는 PC 온라인 게임 대중화와 모바일 게임으로의 전환 등 두 번의 phase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렇다면 이제 새로운 Phase로 접어든 미래는 어떻게 공략해야 할까. 우리나라 주요 게임사는 ‘엔터테인먼트’라는 무기를 선택했다.

게임의 변신

전 세계가 K-콘텐츠를 주목하는 지금, 우리나라 게임은 산업적으로도, 문화적인 관점으로도 가장 화려한 꽃을 피우는 시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그 이후’를 준비하는 국내 게임업계의 고민은 더욱 커졌다. 물론 글로벌 PC 온라인 게임과 모바일 게임 시장은 아직 건재하다. 그러나 최근 많은 개발비를 투자한 국내 대작 게임들이 부진하며 위기를 겪는 것 또한 사실이다. 특히 가까운 미래에는 클라우드 기반의 게임 플랫폼이 기존 게임 유통의 판도를 뒤엎으며 게임사 간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얼마 전 출시된 Playstation5와 Xbox Series X는 콘솔게임 시장의 도약을 견인하며 상대적으로 열세인 국내 게임업계를 긴장시키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처럼 게임의 개발과 유통, 시장구조가 점차 복잡하고 다변화하자 국내 게임사들은 보다 안전하면서도 확실한 가치에 집중하는 전략을 세웠다. 바로 IP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엔터테인먼트’로의 진출이다. 인기 게임 IP를 게임에만 국한하지 않고 캐릭터나 애니메이션, 드라마 등 여러 장르의 콘텐츠로 진출해 만들어 다양화한 것이다.

이와 반대로 기존 엔터테인먼트 IP를 게임화하여 선보이기도 한다. 이미 소비자에게 인정을 받은 IP인 만큼 게임으로서의 흥행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예기획사나 콘텐츠 제작사 등의 엔터테인먼트 업계도 이를 사업 다각화의 기회로 받아들이면서 게임업계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가고 있다.

공격적인 투자를 준비하는 3N

국내 게임업계를 대표하는 엔씨소프트와 넷마블, 넥슨은 대체로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투자하거나 자회사를 설립하여 엔터테인먼트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엔씨소프트는 시각특수효과(VFX) 기업 포스크리에이티브파티와 영화투자배급회사인 메리크리스마스에 총 330억 원을 투자하는 한편, 지난 7월에는 엔터테인먼트 자회사 ‘클랩’을 설립했다. 클랩은 영상·웹툰·온라인 음악서비스·인터넷 방송 등 다양한 온라인 콘텐츠를 제공하기 위해 설립된 회사로, 엔씨소프트가 보유한 IT 기술력을 바탕으로 사업을 확장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클랩은 모바일에서 온·오프라인 팬덤 활동을 공유하는 멀티콘텐츠 〈유니버스〉를 내년 초에 정식으로 론칭할 계획이다. 유니버스에는 팬과 아티스트 간의 소통공간을 비롯해 음반 구매, 스트리밍, 팬미팅, 콘서트 등 팬 활동을 인증하고 보상을 받는 ‘콜렉션’ 기능과 아티스트 캐릭터를 직접 꾸미고 뮤직비디오를 만들어보는 ‘스튜디오’ 기능 등이 탑재된다. 특히 전체 아티스트를 아우르는 플랫폼 내 독특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예능, 오리지널 음원 및 화보가 포함된 ‘미디어’ 기능을 통해 팬들에게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할 예정이다. 134개국에 3개 언어로 지원하며, 아이즈원과 몬스타엑스, 강다니엘 등 국내 아이돌 및 아티스트의 제휴가 연일 보도되고 있다.

넷마블은 빅히트엔터테인먼트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한편, 아이돌의 IP를 활용한 게임을 출시하며 사업 영역을 넓혔다. 넷마블은 지난 2018년 BTS 소속사 빅히트엔터테인먼트에 약 2,000억 원을 투자해 2대 주주에 올라섰다. 이를 바탕으로 지난해 6월에는 BTS의 가상 매니저가 되어보는 모바일 게임 〈BTS 월드〉를 출시했다. 이 게임은 BTS가 직접 부른 OST뿐만 아니라 멤버들의 사진을 감상하면서 플레이할 수 있어 팬들에게 큰 주목을 받았다. 연이어 지난 9월에는 스토리와 캐릭터 구현을 강화한 〈BTS 유니버스 스토리〉를 출시했다. 이 게임은 방탄소년단 각 멤버를 형상화한 캐릭터들을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직접 만들어보는 ‘스토리 제작 모드’와 다른 이들이 만든 스토리를 감상할 수 있는 ‘스토리 감상 모드’로 구성됐다. 샌드박스형 게임이지만 팬픽을 공유하는 플랫폼의 성격이 강해 BTS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돌을 주인공으로 한 차기작도 개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확장 가능한 콘텐츠 모델을 제시했다는 의미를 가진다.

넥슨의 경우 아직까지 큰 이슈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공격적인 투자를 예고하고 있다. 넥슨 일본법인은 지난 6월 자회사 네오플로부터 1조5,000억 원 규모 현금성 자산을 차입하고, 15억 달러를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공시했다. 이후 7월 미국 뉴욕에 본사를 둔 어센던트 디지털 액퀴지션(ADA·Ascendant Digital Acquisition)에 2억 5,000만 달러를 투자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11월에는 신임 사외이사로 케빈 메이어 전 틱톡 CEO를 내정했다. 메이어는 월트디즈니 재직 당시 마블 엔터테인먼트, 루카스필름, 폭스 등의 굵직한 인수합병을 진두지휘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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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성공

게임업계가 IP를 활용해 엔터테인먼트 전방위로 진출하는 일은 이미 진행되고 있고, 앞으로는 더욱 활발하게 확장될 예정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강력한 게임 IP라도 반드시 엔터테인먼트 영역에서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반대로 엔터테인먼트 IP가 게임에서도 성공하지 못할 요소도 많다.

대표적인 문제는 오래전부터 가장 많이 시도된 ‘게임의 영상화’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게임과 영화는 모두 시각 표현에 상당한 공을 들이는 만큼 컬래버레이션이 가장 활발했다. 이미 각자의 팬층에서 인정받은 세계관과 스토리라인, 주인공과 주변 인물의 설정은 시나리오 창작의 투자를 아낄 수 있다. 특히 막대한 홍보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화제성을 끌어모을 수 있는 점도 장점이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게임 IP를 활용한 영화는 대부분 흥행에 실패했다. 1993년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를 시작으로 수십 편 이상의 게임 IP 기반 영화가 줄곧 개봉했지만 〈모탈컴뱃〉, 〈툼 레이더〉,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 정도를 제외하면 상업적으로도, 작품성으로도 ‘폭망’했다. 애니메이션 강국인 일본에서도 게임 기반의 애니메이션은 대부분 소리소문없이 묻히는 경우가 많다. 게임 원작 영화 중 가장 많은 수익을 거둔 작품은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으로, 4억 달러 넘는 수익을 올렸다. 하지만 이는 액티비전 블리자드의 대표 게임 워크래프트 시리즈가 유달리 인기가 많은 중국에서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많은 수치다. 영화를 본 골수 게이머들도 원작 훼손이 너무 심각하다는 평이 대다수다. 20년 넘게 서비스해오며 역사상 가장 강력한 게임 IP로 인정받는 원작의 명성에 비하면, 결과적으로 흥행과 작품성에 모두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흥행 영화나 드라마의 게임화도 비슷한 문제로 ‘단순 홍보성 게임’으로 전락한 경우가 많다.

강력한 엔터테인먼트 IP가 게임의 흥행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넷마블의 〈BTS 월드〉와 〈BTS 유니버스 스토리〉는 출시 직후 매우 큰 화제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게임 완성도에 대한 지적이 많아 3주 만에 애플 앱스토어의 인기 순위에서 밀렸다. 이런 여파로 넷마블 주가도 하락했다. 분석해보면 이 두 앱은 방탄소년단의 팬이 아니면 접근하기 어렵다는 한계점이 명확했고, 게임 요소들은 패턴이 단순해서 쉽게 피로감을 느끼는 시스템이라는 지적이 많다. 부분 유료 게임의 고질적인 문제로 등장하는 과금 유도, 광고 노출 등의 문제도 상당하다.

왜 실패하는가?

왜 이런 실패사례가 많은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팬심’은 ‘사업성’과 직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게임의 영상화는 상대적으로 쉬워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가장 어려운 축에 속한다. 영상매체는 게임과 달리 제한된 시간 안에 모든 이야기를 담아야 한다. 그러므로 스토리는 필연적으로 압축해 전달할 수밖에 없다. 원작을 잘 아는 팬은 스토리가 훼손됐다고 혹평하고, 내러티브를 억지로 줄이다 보니 일반 관객도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하는 경우도 있다.

또 다른 문제는 게임사가 직접 영상을 제작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인한다. 영상제작진은 해당 게임의 마니아가 아닌 이상 게임에 대한 이해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흥행 공식에 따라 스토리를 바꾸고 게임 내 과장된 의상이나 배경만 원작 그대로 구현해 괴리감과 어색함만 극대화시킨 ‘괴작’이 탄생하기도 한다.

엔터테인먼트 IP를 게임화하는 등의 활용도 단순히 기술적인 구현만으로는 팬층의 마음을 살 수 없다. 아이돌의 미공개 화보나 오리지널 음원을 게임 점수로 획득하거나 서로의 팬픽 등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는 팬의 마음을 사기 어렵다. 굳이 그런 수고를 들이지 않더라도 ‘덕질’할 다른 곳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게임 IP와 엔터테인먼트 IP의 수요층이 각각 다른데, 이를 모두 만족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게임이 아무리 대중화되었다고는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게임을 하지는 않는다. 반면 게이머는 특정 게임에 대한 충성도가 높고 게임 내 설정과 스토리를 세부적으로 아는 사람이 많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특정 영화나 아티스트가 왜 좋은지, 어떤 의미로 팬이 됐는지보다 지금 인기가 있다는 이유로 시류에 편승만 하려 한다면 팬에게도, 대중에게도 결국 외면받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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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의 기준

IP의 힘은 강력하지만 이는 각자의 영역에서만 유효하다. 아무리 리니지의 인기가 높더라도 게임을 하는 사람만 체감할 것이고, 방탄소년단이 세계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보이그룹이 됐지만 모두가 열광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의 영역에 자연스럽게 발을 들일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게임 IP로 엔터테인먼트 진출에 성공한 국내 사례가 있다. 스마일게이트는 중국에서 인기가 높은 자사 게임 크로스파이어를 소재로 드라마 〈천월화선〉을 제작해 지난 7월 중국의 동영상 플랫폼 서비스인 텐센트 비디오에 공개했다. 서로 다른 시대 속에서 크로스파이어의 프로게이머로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청년들을 그린 이 드라마는 단 두 달 만에 17억 뷰를 돌파하며 대성공을 거뒀다. 이번 드라마의 성공으로 지난 2015년 미국 영화 제작사 오리지널필름과 계약을 맺은 후 올해 초 영화배급사 소닉픽처스와 손을 잡았다. 만약 제작이 확정된다면 한국 게임 IP 최초의 할리우드 영화가 될 것이다.

드라마를 넘어 게임을 다른 방식으로 체험하는 공간도 조성했다. 또한 중국 쑤저우, 난통, 항저우 지역에 인게임 환경을 현실적으로 구현한 크로스파이어 실내 스포츠 테마파크를 건설해 게이머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컴투스도 자사의 핵심 모바일 게임인 〈서머너즈 워: 천공의 아레나〉로 거대한 콘텐츠 영역을 구축했다. 북미와 유럽에서 더욱 인기몰이 중인 서머너즈 워는 지난 2017년 글로벌 e스포츠 대회인 ‘SWC’를 기획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월드파이널을 개최한 이래 매회 큰 흥행을 이어왔다. 아울러 게임 내 스토리를 확장한 〈서머너즈 워 유니버스 바이블〉을 구축하기도 했다. 글로벌 멀티콘텐츠 기업 스카이바운드엔터테인먼트와 함께 진행한 이 프로젝트는 서머너즈 워 IP를 기반으로 세계관을 공고히 만들고 100년간의 스토리를 세세한 부분까지 풀어냈다. 주요 캐릭터와 도시, 마법 등의 설정을 구체화한 만큼 다양한 분야로의 콘텐츠 확장 가능성을 무한하게 열어놓은 셈이다. 〈서머너즈 워 유니버스 바이블〉 공개 당시 단편 애니메이션과 소설, 코믹스 등을 깜짝 선보여 많은 호응을 받기도 했다.

이 두 게임사의 엔터테인먼트 성공 비결은 기존 팬이 원하는 방향으로 IP를 확장하고 진화시키면서도, 간접적으로 일반 대중들에게도 홍보했다는 점이다. 스마일게이트는 게임을 드라마로 만들면서 게임 자체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비중 있는 조연급으로 소재화하면서 동시에 체험공간을 조성해 자연스럽게 게임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컴투스는 이벤트성 대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며 팬의 충성도를 높이는 한편, 게임 완성도를 높여 더 많은 사람들이 게임에 관심을 가지도록 유도했다. 이를 위해 엔터테인먼트 콘텐츠 기업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소통한 것도 한몫했다. 서로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게임과 엔터테인먼트가 서로를 도구화하지 않고 발전적인 방향을 논의해야 함께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비슷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장르를 단순히 묶어버리는 ‘콜라보’의 한계를 넘어, 서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괴리감을 줄인 ‘접근 방향’의 중요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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