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을 정의할 수 있을까

최근 한 걸그룹의 데뷔 싱글이 일본 오리콘 차트 1위에 올랐다. 발매 당일인 지난 12월 2일 일간 차트 정상에 오른 데 이어, 주간 차트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일본에서 데뷔와 동시에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이 그룹은 일본인 멤버들로 구성돼 있다. 노래도 일본어로 부른다. 이들의 그룹명은 ‘니쥬(NiziU)’. 그런데 이들을 제작한 곳은 한국 기획사 JYP엔터테인먼트다. 니쥬 멤버들은 JYP엔터테인먼트의 K팝 트레이닝을 받아 탄생했다.

그렇다면 니쥬는 K팝 아이돌일까, J팝 아이돌일까. 이를 두고 국내 네티즌들 사이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이 질문은 단순히 한 그룹의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1997년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가 중국 CCTV 채널에 방영되며 시작된 한류는 20여 년간 눈부신 성장을 거듭해 왔다. 그 중심엔 K팝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K팝은 유례없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방탄소년단이 미국 빌보드 1위를 차지했으며, 트와이스 등 다른 아이돌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런데 이때, 국내 기획사들은 해외에서 현지인으로만 구성된 아이돌을 꾸려 선보이는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류의 개념과 범위가 이전과 다른 차원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중요한 전환점 앞에서 많은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한류가 진정한 의미의 글로벌화 되는 계기가 될 것이란 견해와 어렵게 축적한 한류의 노하우가 다른 나라로 유출되어 버릴 수 있다는 의견이 맞서고 있다.

일본인 멤버로 구성된 걸그룹 ‘니쥬’ 일본인 멤버로 구성된 걸그룹 ‘니쥬’. ⓒ JYP엔터테인먼트
중국인 멤버로 구성된 보이그룹 ‘웨이션브이’ 중국인 멤버로 구성된 보이그룹 ‘웨이션브이’. ⓒ SM엔터테인먼트

‘made by’를 내세운 한류 3단계

니쥬는 JYP엔터테인먼트가 일본 소니뮤직과 함께 기획한 글로벌 오디션 프로젝트 ‘니지 프로젝트’를 통해 만들어졌다. 멤버는 9명으로 마코, 리쿠, 리마, 리오, 마야, 미이히, 마유카, 아야카, 니나 등 전부 일본인이다. 외국인으로만 멤버를 구성한 사례로는 앞서 2019년 결성된 SM엔터테인먼트의 웨이션브이(WayV)가 있다. 웨이션브이는 아이돌 NCT의 중국 유닛이다. 쿤, 윈윈, 텐, 루카스, 샤오쥔, 양양, 헨드리로 구성된 7인조 보이그룹이다. 데뷔 미니앨범으로 아이튠즈 종합 앨범 차트에서 전 세계 30개 지역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중국 남자 아이돌 그룹 중 역대 최고 기록이다.

그렇다면 니쥬와 웨이션브이의 인기는 한류라 할 수 있을까. 한류의 사전적 의미는 ‘우리나라의 대중문화 요소가 외국에서 유행하는 현상’이다. 인적·물적 자원, 결과물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한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음악을 예로 든다면 노래를 만드는 사람, 부르는 사람, 노래에 사용된 리듬과 가사, 나아가 이들을 발굴하고 기획하는 시스템 등이 전부 포함된다.

국내 기획사들은 오랜 시간 한류 개별 요소들의 범위를 각각 넓히는 작업을 해왔다. 이를 SM엔터테인먼트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는 ‘한류 3단계론’이라 불렀다. 1단계는 한국에서 아티스트와 음반을 기획해 해외 시장에 진출시키는 것이다. 보아, 동방신기 등이 1단계에 해당한다. 2단계는 해외 현지 회사와 합작하거나 해외 멤버를 영입해 한국 아티스트와 함께 혼합시킨다. 엑소, 트와이스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나아가 3단계는 현지 회사와 합작회사를 만들고 현지 아티스트를 발굴하고 육성한다. 니쥬, 웨이션브이가 3단계에서 만들어졌다.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는 ‘한류 3단계론’을 이야기하며 “이젠 ‘made in(원산지)’이 아닌 ‘made by(제조자)’가 중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한류라고 해서 굳이 국내 안으로만 영역을 제한하지 않고 어디서든 아티스트를 발굴하고 문화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는 의미다.

K팝 성과와 노하우 빼앗길 우려도

그러나 이 같은 확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특히 가까스로 이뤄낸 K팝의 성과를 다른 나라들이 자신들의 것이라 주장할 수 있다는 불안이 크다. 우리는 과거 일본 등 외세의 침략을 여러 차례 받아 왔다. 이로 인해 많은 문화적 유산들을 빼앗겼다. 오랜 역사적 경험과 이로 인한 트라우마를 단순히 과거의 것으로만 치부하기 어렵다. 그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고 있다. 중국 모바일 게임엔 우리의 전통 의상인 한복을 입은 캐릭터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일부 중국인 네티즌들이 “한복은 명나라의 의상”이라는 등의 주장을 펼치고 있어 국내에선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어렵게 축적한 노하우가 그대로 유출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K팝은 H.O.T, 동방신기, 원더걸스, 빅뱅, 소녀시대 등 꾸준히 아이돌 그룹을 만들고 육성하며 발전해 왔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정교한 시스템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만들어졌다. 국내 기획사들은 K팝 발전을 위해 미국, 유럽 등 현지 제작사나 아티스트와 협업하며 해외 시스템을 다양하게 익혔다. 이들의 기획·제작 기법을 벤치마킹하면서도 국내의 문화와 해외 문화가 자연스럽게 융합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 것이다. 현재 미국, 유럽 등을 휩쓸고 있는 K팝의 성공은 이런 시도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 고민과 노력으로 응축된 노하우가 다른 나라로 유출된다면 한류는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K팝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가중시킨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일본인, 중국인 등 현지인으로만 멤버를 구성하고 현지 언어로 된 노래를 부르면 타지역의 문화적 색채가 쉽게 섞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한국 기획사들이 만들었다 해도 해외 팬들은 이를 K팝으로 인식하기 어렵다. 시간이 흘러 타지역의 문화가 보다 복합적으로 혼합되어 버리면 K팝 고유의 색채는 찾아보기 힘들어질 수도 있다.

‘유출’ 아닌 새로운 차원의 ‘수출’을 위해

이 같은 논란에 대해 국내 기획사 측은 이 또한 명백히 K팝이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JYP엔터테인먼트의 총괄 프로듀서인 박진영은 “니쥬는 K팝 걸그룹”이라고 정의했다. 2007년 박진영 프로듀서가 한 매체에 기고한 칼럼은 니쥬가 탄생하게 된 배경과 이 안에 깃든 철학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는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이 문화 다양성이란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말인 걸 잘 안다”며 “하지만 꼭 한국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하면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또 “인도 요리사가 꼭 카레로 성공해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프랑스 요리가 좋아서 평생 열심히 하다 보면 세계적인 프랑스 요리사가 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그의 얘기처럼 한류가 꼭 ‘한국적인 것’과 동일하게 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른 장르에서도 이를 위한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CJ엔터테인먼트는 영화 〈기생충〉의 성공을 발판으로 미국 현지 합작사와 할리우드 영화 〈엔딩스 비기닝스〉를 만들어 지난 6월에 선보였다. 외국 배우가 출연하고 작품 배경도 해외이기에, 한국적인 색채는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이 또한 우리의 작품인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한류의 성과와 노하우가 ‘유출’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이를 해소하고 온전히 ‘수출’할 수 있는 방안을 지속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무엇보다 저작권과 수익 배분 문제 등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시스템화해야 한다. 아티스트가 이런 점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교육도 해야 한다. 이런 문제들이 해결된다면 다른 나라에선 찾아보기 힘든 새로운 차원의 문화 수출 시스템이 탄생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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