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트렌드 3

K-POP, 동경을 싹틔우다

글 황선업(대중음악 칼럼니스트)

오랜 시간 일본음악을 들어온 입장에서, 최근 J-POP신엔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몇 년 동안 스트리밍 시장이 빠르게 정착한 것도 그렇지만, 차트 상위권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K-POP 그룹들 역시 시대가 바뀌었음을 알려주는 증거일 것이다.

BTS, 트와이스 등이 랭크인 되어있는 일본 애플뮤직 차트(2021.5.25. 기준) Ⓒ애플뮤직

일본문화 개방을 앞두고 우려를 내비치던 예전과는 상황이 180도 바뀌어, 한국 대중음악이 열도를 포함한 전 세계 음악신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이 아직까지도 놀라울 따름이다. 혹자는 바다 건너 K-POP 열풍이 일부 그룹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냐 묻곤 한다. 하지만 일본 스트리밍 차트를 잠시라도 살펴본다면 그런 이야기는 쏙 들어갈 것이다. 이 글을 쓰는 5월 10일 기준 애플뮤직 앨범차트에는 NCT DREAM과 ITZY, NiziU, JO1, 엔하이픈과 BTS까지, 10위 안에만 K-POP 연관 아티스트 여섯 팀이 랭크인하고 있는 상황이다. 전체적인 분위기를 보더라도 과거 마니아 중심의 서브컬쳐였던 시절과 달리, 현재의 K-POP은 젊은 세대가 향유하는 일상적 문화로 완전히 뿌리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에서의 첫 시작

과거 일본 가요계 진출은 지금과 궤가 달랐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일본은 뚫기 어려운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곳. 그 치열한 마켓에서 첫 성공을 거둔 아티스트라면 역시 보아일 것이다. ‘Listen to my heart’, ‘Valenti’ 등 연달아 터뜨린 축포는 그에게 ‘아시아의 별’이라는 호칭을 붙여주었다. 다만 그 성공이 곧 ‘한국 콘텐츠의 승전보’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SM은 아쉬운 결과를 남겼던 SES의 사례를 복기해, 보다 철저한 현지화 과정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데뷔 전부터 일본어 과외를 붙였고, 에이벡스라는 대형 기획사의 지원을 받았으며, 당시 흔치 않았던 ‘노래와 춤에 능한 여성 아티스트’ 신을 철저히 공략했다. 그 결과 새로운 스타상을 정립하며 일본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성공했지만, 한국가수가 일본에 진출했다기보다는 일본에서 신인가수가 데뷔한 느낌에 가까웠다.

동방신기의 사례도 이와 비슷했다. 진출 초반에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으나, 에이벡스는 장기적 관점으로 꾸준히 투자를 이어갔다. 그렇게 서서히 상승세를 타 16번째 싱글 ‘Purple line’이 오리콘 차트 1위를 달성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2년 반. 당시 유영진이 작업을 주도했던 ‘Purple line’ 이전 대부분의 싱글은 모두 일본인 스태프에 의한 결과물이었다. 이렇듯 당시 두 아티스트는 한국의 하드웨어에 일본의 콘텐츠를 이식한, 한마디로 말해 ‘J-POP으로서의 K-POP’이었다. 해당 국가의 로컬라이징과 지원을 통해 현지가수로 데뷔하는 방식이다. 그 안에 ‘한국’이라는 국가적 정체성은 굉장히 옅게 투영되어 있었다.

전에 알던 내가 아냐

이후 터닝 포인트를 마련한 이들이 2010년대 초반 J-POP신을 섭렵했던 소녀시대와 카라였다. 여전히 현지 레이블과 소속사의 힘은 필요했지만, 한국에서 활동하던 노래와 퍼포먼스를 그대로 활용하는 등 자체 콘텐츠의 비중이 늘어나던 시기였다. 특히 한국 아이돌 그룹의 포지셔닝이 구체화되던 때였는데, 이 과정에서 소녀시대의 존재감은 꽤나 거대하다. 세련된 스타일링과 뛰어난 안무, 트렌디한 음악 등 현재 일본 대중들이 인식하는 K-POP 그룹의 이미지는 소녀시대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기 때문. 더불어 일본의 10대들 사이에서는 기존의 ‘미숙한 존재를 향한 응원’이 아닌, ‘실력 있고 멋진 스타들에 대한 동경’이라는 개념이 싹트기 시작한 시기였다. 한국 K-POP 문화가 일본에 이식됨과 동시에, 아이돌 프로덕션이 조금씩 세계적인 경쟁력을 검증받던 때였다.

강한 임팩트를 보여주었던 시기도 잠시, 이후 찾아온 것은 후속 인기그룹의 부재와 한일관계 악화가 맞물리며 겪게 된 얼마간의 정체기였다. 그 사이에 급격히 부상한 것은 바로 AKB48과 SKE48 등을 비롯한 DH(구 AKS)계열의 아이돌 그룹이었다. 이들은 ‘만나러 갈 수 있는 아이돌’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성장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다는 점을 셀링 포인트로 내세웠다. 그 만남과 성장의 매개체는, 바로 ‘돈’이었다.

마케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악수권과 투표권은 모두 CD 구매수와 비례했고, 이 지점에서 일본 아이돌 문화의 헤게모니는 경제권을 가진 중장년층으로 상당부분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10대 팬덤이 중심인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청소년들이 아이돌 신에서 배제되어 간 셈. 지금에 와 돌아보면, 일본의 10대들이 더욱 K-POP에 열광하게 되는 배경이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한 대목이다.

SNS와 스트리밍을 타고

잠시 움츠려 있던 수년간의 정체를 깨고, K-POP의 일상화를 본격화한 것은 누가 뭐래도 트와이스다. 그룹의 춤과 노래는 10대 여중고생들을 중심으로 열풍처럼 번져 나갔다. 이처럼 그 인기가 특정 소수 가 아닌 청소년 전반을 관통했다는 사실은 큰 상징성을 가진다. 발랄하고 건강한 이미지 및 수준 높은 퍼포먼스와 대중성 있는 노래들, 이런 점들이 잠시 잊고 있었던 ‘동경’의 마인드를 다시 일깨웠다. 가뜩 이나 자국 아이돌 신에 흥미 대신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 또래로서의 친숙함과 무대에서 의 프로페셔널함을 동시에 가진 K-POP 그룹에게 열띤 환호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더불어 그룹 내 일본인 멤버의 활약은 일본 청소년들에게 ‘나도 K-POP신의 일원이 될 수 있다’라는 꿈을 심어준 계기가 되기도 했다.

트와이스의 인기 배경에는 두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이 있다. 이는 과거 K-POP 열풍과의 구분점을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첫 번째로, 트와이스가 히트했던 2017년은 10대들이 SNS에 급속도로 친숙해져 가던 시기였다는 사실이다. 일본에서 그들의 이름을 크게 알렸던 ‘TT댄스’는 인스타그램과 틱톡이 전파에 있어 큰 역할을 담당했고, 이를 통해 콘텐츠가 무한 생산 및 확장되며 하나의 즐길거리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토끼 귀 달린 모자 등과 같은 한국의 트렌드가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으로 퍼져갔는데, 이는 양국의 MZ세대들이 트렌드를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공동체가 되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SNS를 통해 한일 청소년들의 즐길거리가 교집합화 되어가는 과정에서, K-POP은 국경과 상관없이 같은 취향을 가진 이들이 공유하는 일종의 문화 카테고리로 자리 잡게 되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한국문화의 일본 유입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활발하다는 것인데, 이는 일찌감치 정착된 한국의 SNS 마케팅이 빠르게 일본의 젊은 층을 사로잡았다는 사실로도 해석 가능하다.

두 번째로 스트리밍의 정착을 언급하고 싶다. 지금과 같은 구독형 스트리밍 플랫폼이 활성화되며 일본의 스마트폰 세대들은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원하는 음악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레코드협회(RIAJ)의 통계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피지컬 레코드의 수입이 약 1,777억 엔에서 약 1,298억 엔으로, 다운로드가 약 274억 엔에서 약 179억 엔으로 감소한 반면, 스트리밍은 약 200억 엔에서 약 589억 엔으로 두 배가 훌쩍 넘는 신장세를 보였다. 일본 역시 CD는 팬덤을 위한 굿즈 상품에 가까워졌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지금의 일본 청소년들은 모바일을 통한 실시간 전송으로 음악을 즐기는 거의 첫 번째 세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지에서는 이와 같은 10대 중심의 K-POP 열풍을 일종의 카운터 컬쳐로 분석하기도 한다.기성 세대 와는 다른 자신들만의 존재감을 나타내는 데에 있어 K-POP을 비롯한 한국 문화가 큰 역할을 하고 있 다는 것. 이러한 흐름에서 지금의 중장년층이 K-POP 열풍을 오히려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 은, 과거 한류의 주 소비층이 해당 세대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자못 흥미롭다. 어쨌든 K-POP 붐은 이전과 다르게 ‘젊은 층’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 여기에는 SNS와 스트리밍의 활성화가 크게 작용하고 있으며, 이러한 한국의 콘텐츠들이 자신들의 개성을 드러내는 ‘일상적인 문화의 선택지’로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한 번의 변혁을 앞두고

앞으로 일본에서의 K-POP은 당분간 지금과 같은 기세를 이어나갈 것으로 생각된다. 이미 한국 내부적으로 더욱 치밀한 A&R(Artists and repertoire)과 수준 높은 육성 프로그램이 가동되고 있는 만큼, 콘텐츠로서의 경쟁력이 밀릴 것이라는 걱정은 없다. 이와 함께 K-POP의 영향력과 일본의 시장성을 기반으로, 한일 합작을 통한 현지화 그룹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는 시점이다. 이미 JYP와 소니재팬이 손을 잡고 야심차게 기획한 NiziU가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Produce101 JAPAN>을 통해 데뷔한 JO1 역시 탄탄한 팬덤을 구축 중이다.

이처럼 이른바 ‘한류 3.0’이 가장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곳이 바로 일본이다. 앞으로도 ‘일본인’만으로 이루어지거나, 처음부터 일본을 활동무대로 삼는 그룹들이 차차 등장할 것이다. 물론 ‘외국인으로만 구성된 팀을 K-POP 그룹이라 할 수 있느냐’, 혹은 ‘한국 엔터테인먼트의 노하우를 굳이 타국에 전달할 필요가 있느냐’와 같은 부정적인 시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K-POP이 글로벌 현상으로 확대되어 가는 시점에서 거쳐야 하는 필수 단계로 받아들이고, 단순히 국경의 문제가 아닌 콘텐츠와 시스템의 확장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장기적인 K-POP의 인기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불공정 문제 및 도덕적 해이에 대한 경계다. 계약 이슈나 현역 그룹들의 억압적인 활동 환경, 비인간적인 연습생 시스템 등 화려한 면 뒤에 감춰진 어두운 부분들이 적지 않은 탓이다. 세계적인 문화상품임과 동시에 청소년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K-POP이다. 지금이야말로 여러 제도적 장치와 함께 내부적인 자정작용을 갖추어야 할 시점이 아닐까. 이를 통해 구축된 공정하고 올바른 무대에서, 건강하게 땀 흘리는 스타들의 모습이야말로 더 많은 팬덤을 생성할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K-POP의 르네상스는 지금부터가 시작인 셈이니까.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