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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예능을 통해 본 골목길의 시간과 사람

글. 김희경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기자)

한 번쯤 가봤던 동네, 익숙한 일상. ‘골목 예능’ 카메라에 담긴 모습들이다. 해외의 이색적인 풍경을 비추는 여행 예능, 연예인의 화려한 삶을 담은 관찰 예능만으로도 볼거리가 넘쳐나는 세상. 이 가운데 평범하고 소박하기만 한 골목 예능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2016년 JTBC <한끼줍쇼> 이후 골목 예능은 많은 호평을 받으며 빠르게 확장하고 있다. 우리는 왜 늘 보았던 골목길을 예능을 통해 다시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여행자의 눈’으로 비춘 길 위의 시간

“평범한 동네도 여행자의 눈으로 보면 새롭게 보이죠.” 그 답은 KBS1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를 맡고 있는 배우 김영철의 내레이션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굳이 먼 곳으로 떠나 낯선 풍경을 찾지 않아도, 우리는 얼마든지 여행자가 될 수 있다. 익숙한 길도 더 가깝게 유심히 살펴보면 모든 것이 새로워 보일 수 있다. 그동안 미처 몰랐던 것은 바쁜 일상을 핑계 삼아 눈여겨보지 않았을 뿐이다. 골목 예능은 이를 일깨우며, 골목길에 숨겨진 매력을 찾아나선다. 골목 예능을 보다 보면 “저기에 저런 곳이 있었나”하는 말이 자주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새롭게 발견해낸 숨은 매력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골목길 사이를 유유히 흐르며, 공간을 가득 채워온 ‘시간’이다. 김영철이 찾아간 서울 금천구엔 높은 빌딩들이 들어선 ‘가산디지털단지’가 있다. 이 단지 뒤편으로 걸어가면 평소 그냥 스쳐지나갈 법한 작은 공간이 하나 있다. ‘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이다. 빠르게 산업화가 이뤄진 1970~1980년대,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일을 하던 여공들이 지낸 쪽방촌을 체험해 보는 곳이다. 이 공간엔 공장에 앉아 재봉틀 작업을 하던 당시 여공들의 사진과 함께 여공들이 몸을 겨우 눕혔던 좁은 방들이 재현되어 있다. 금천구 골목길을 빼곡하게 채우고 오랜 시간 지켜왔던 여공들. 그 모습은 이젠 잊혀졌지만 이 공간엔 금천구는 물론 한국 산업화의 깊은 애환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시간을 거슬러 들춰낸 기억은 지금 흐르고 있는 시간과 맞닿을 때 더 빛을 발하는 법이다. 골목 예능은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번갈아 비추며 이를 담아낸다. 김영철이 체험관을 나와 이른 곳은 근처 ‘청춘삘딩’이란 건물이다. 이곳엔 고향을 떠나 서울에 올라온 직장인들과 취업 준비생들이 각자 식재료만 가져오면 편히 요리를 해 먹을 수 있는 공유주방이 마련돼 있다. 과거 여공들이 동료들을 다독이며 힘든 순간을 참고 꿈을 꾸었듯, 지금의 청춘들도 하루를 치열하게 보낸 후 공유주방에서 따뜻한 밥 한끼를 먹으며 서로를 위로한다. 그러면서도 유쾌하게 웃어보이는 청춘들의 모습에서 골목길 곳곳에 싹트고 있는 희망과 열정도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이야기, 우리의 얼굴

골목 예능이 이 시간들을 경유하며 비추는 얼굴은 다른 프로그램에서 보던 얼굴보다 왠지 더 익숙하게 느껴진다. 이들의 이야기가 곧 우리 아버지, 우리 딸 등 ‘우리’의 이야기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2>에 나온 서울 문래동 용접업체 사장님은 아무리 힘들어도 어디선가 열심히 일하고 있을 아버지를 연상하게 한다. 20년째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장님은 “요새 경기가 안 좋아 대출 받은 것 이자만 갚고 있다”며 어려운 사정을 담담하게 이야기 한다. 현재뿐만 아니라 외환위기 이후 이어진 경기 침체의 여파도 오랫동안 견뎌냈다고 한다. 그래도 여유가 생기면 해외에서 일하는 아들에게 다녀오고 싶다는 바람을 수줍게 전하기도 한다. 이 모습에선 어떤 상황에서도 자식들을 떠올리는 우리들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진다.

부모님의 수고로움을 덜어드리고자 노력하는 청년들의 마음도 골목 예능을 통해 전달된다.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한 학생은 같은 프로그램에서 “시간을 많이 투자했지만 아직 결과물이 없어, 부모님께 제일 사과드리고 싶다”고 했다. 또 “주변 친구들은 취업 잘해서 회사 잘 다니고 있는데 힘들게 해서 죄송하다”는 그의 말은 이 시대 20~30대의 절박하면서도 애타는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골목 예능에서 만난 이런 얼굴들은 관찰 예능에선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TV에는 여전히 관찰 예능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큰 재미를 주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호화로운 집과 차를 가진 연예인들이 지인들과 마음껏 놀러 다니는 것을 반복해 보다보면 괴리감과 박탈감이 밀려 온다. 결코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없는, 그들만의 세상 그들만의 즐거움이 아닌가. 게다가 연일 터지는 연예인들의 사건, 사고 소식을 접하며 더 이상 이들의 ‘리얼리티’는 있는 그대로의 ‘리얼리티’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골목 예능은 이런 피로도와 허탈한 마음을 달래주며 대중들에게 성큼 다가가고 있다.

공감과 재미로 더 강력해진 골목 예능

여기서 나아가 최근 골목 예능은 더 쉽고 재밌는 방법으로 다가간다. 이를 위해 일반 예능에서 흔히 보던 게임의 방식을 차용하기도 한다. <유 퀴즈 온 더 블럭>도 게임의 일종인 ‘퀴즈’를 통해 생기를 불어넣는다. 퀴즈 하나를 맞추면 100만 원의 상금을 준다. 진짜 게임처럼 지는 순간 끝나는 것은 아니다. 퀴즈를 틀려도 추첨을 통해 상품을 준다. 퀴즈가 일반인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는 동시에 평범한 하루에 주어지는 ‘행운’의 기능을 하는 셈이다. 퀴즈 전후로 행운보다 더 가치있는 ‘행복 ’의 이야기가 쏟아지니, 방송사 입장에선 시민들에게 행운들을 많이 나눠줘도 전혀 아깝지 않아 보인다.

JTBC <한끼줍쇼>가 취하고 있는 형식도 게임에 가깝다. 이경규, 강호동이 초대 연예인들과 팀을 나눠 서로 대결을 하듯 집을 방문한다. 일일이 초인종을 누르며 찾아 다녀보지만, 결코 쉽지 않다. 사적인 공간을 노출해야 하는 부담 탓에 문을 잘 열어주지 않는다.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하고, 인지도 굴욕을 겪기도 한다. 높아 보였던 연예인들의 권위에 작게나마 균열이 가는 모습이 새롭게 다가온다. 그러다 문을 열리면 분위기는 반전된다. 문을 연 사람은 소박하지만 정성스런 밥상을 차리고, 이내 이야기를 시작한다. 집 안으로 카메라를 비추게 되는 과정은 꽤 험난하지만, 한번 들어가고 나면 다채로운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데 이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는 것 같다. 이런 게임의 방식은 ‘우연성’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더 재밌게 느껴진다. 관찰 예능처럼 잘 짜여진 틀 안에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어디서, 어떻게, 누굴 만날지 전혀 모른다. 그렇게 만난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어떤 이야기를 할지도 알 수 없다. <한끼줍쇼>에선 밥을 못 얻어먹고 끝나는 상황도 종종 발생하기도 하지 않은가. 아쉽긴 하지만 여기서 사람들은 ‘진짜’ 리얼리티의 재미를 발견한다.

앞으로 골목 예능은 더 진화하고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이 프로그램들을 통해 잊고 있었던 가치를 골목길에서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 퀴즈 온 더 블럭 2>에 나온 한 서울대생의 이야기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많은 화제가 됐던 것도 이와 연결된다. 유재석이 “서울대에 입학하려면 어느 정도 공부를 해야하냐”고 묻자, 학생은 “그런데 요즘 좀 느낀 게 있다. 문제 한두 개 더 맞혔다고 인생이 더 행복해지진 않더라”고 답했다. 잘 알고 있지만 잊고 있었던 행복의 가치. 우리는 골목 예능을 통해 그 가치를 되새기는 기쁨을 맛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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