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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Issue 1

웃어라,
내일 지구가 망하더라도

웃어라, 내일
지구가 망하더라도

<내일 지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권익준 PD 인터뷰

글. 김세환(한국콘텐츠진흥원
산업정책팀 주임연구원)
사진. 김성재(싸우나스튜디오)

<남자 셋, 여자 셋>(MBC), <논스톱>(MBC) 시리즈를 연출하며 국내 시트콤을 이끌었던 권익준 PD가 <내일 지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어>라는 새로운 시트콤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청춘 시트콤으로 10년 만에 복귀한 거장과 한국 시트콤의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살펴보며, 미래를 내다보는 대화를 시작한다.

우리에게 여전히 시트콤이 필요한 이유

Q 시트콤을 다시 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넷플릭스가 먼저 제안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시트콤을 다시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일주일에 5편씩 30분, 이렇게 편성하는 방식은 이제 가능하지 않거든요. 게다가 광고가 붙지 않으니 국내 방송사는 시트콤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시트콤 자체가 사라질 것으로 보지는 않았어요. 디지털 플랫폼 시대에 20분 내외의 시트콤이 일종의 미드폼 콘텐츠로써 경쟁력을 갖췄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할 무렵 넷플릭스에서 제작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넷플릭스는 한국에 시트콤이 없다는 사실에 의아해했어요. 특히, 한국 청춘들의 이야기를 해외에서는 원하는데 드라마 말고는 볼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거죠.

Q 10년 만에 현장으로 돌아오셨는데, 시트콤 제작 환경은 어떻게 바뀌었나요? A 무엇보다도 생태계가 파괴되었습니다. 시트콤 작가들은 드라마로 옮겨갔습니다. 카메라, 미술 등 제작 스태프 역시 마찬가지고요.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시트콤도 제작 스태프는 모두 드라마에서 영입했어요.

Q 시트콤이 국내 방송영상콘텐츠 제작산업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A 지난 10년간 한국의 방송영상콘텐츠는 엄청난 성장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쏠림 현상과 불균형이라는 한계를 지닙니다. 수출은 드라마에 집중되고, 예능은 전부 리얼리티만 제작하고, 음악은 아이돌에 편중됐죠. 시장이 균형을 잃으면 오래 갈 수 없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국내 방송영상콘텐츠의 미래는 드라마에 달려 있어요. 하지만 드라마를 폭넓게 제작하려면 시장이 그만큼 따라와야 하잖아요. 그러려면 여러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데, 그중의 하나가 시트콤입니다. 보통 시트콤 하나에 5명의 메인 작가와 5명의 서브 작가가 투입됩니다. 이들이 매일 회의를 하면서 1년에 300편 이상의 에피소드를 집필하죠. 이러한 집단창작은 대학을 갓 졸업한 신진 작가들을 육성하는 채널로 기능합니다. 이렇게 훈련받은 작가가 드라마 시장에 진입하면 기존 작가보다 훨씬 수월하게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작가뿐만 아니라 연출가, 배우 등도 마찬가지예요. 시트콤은 신인을 많이 쓸 수 있는 구조입니다. 하지만 시트콤이 사라지면서 신진 인력이 제작 시장에 진입하기가 힘들어졌어요.

Q 시트콤이 장르로서도 중요하지만, 방송영상콘텐츠 제작산업에서 일종의 사관학교 기능도 담당하네요. A 맞습니다. 그리고 장르로서도 중요해요. 사실 코미디는 방송영상콘텐츠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 중 하나입니다. 영상콘텐츠의 절반 이상은 코미디 기반이에요. 영화 <기생충>도 블랙코미디잖아요. 드라마 형식의 코미디가 시트콤입니다. 따라서 한국에서도 시트콤이 왜 필요한지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 진지한 논의가 이뤄졌으면 합니다.

Q 지상파 방송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얻었던 시트콤이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A 일단 만드는 사람들이 나태했어요. 더 나은 방식으로 진화해야 했는데, 예전 방식을 고수했습니다. 띠 편성(주 5일 이상 한 프로그램을 동일한 시간에 편성하는 방식)이 가능해지려면 지상파 방송이 건재해야 하거든요. 미국처럼 시즌제로 가던가, 양을 줄여서 주간물로 가는 등의 변화를 추구해야 했는데 그 시기를 놓쳤습니다.

게다가 시트콤이 지닌 ‘캐릭터 쇼’의 기능을 예능이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하고, 드라마 역시 많은 부분에서 시트콤 요소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응답하라 1997>(tvN) 시리즈와 <슬기로운 의사생활>(tvN) 시리즈가 대표적이죠. 기존 시트콤은 진부해지고, 시트콤의 웃음 포인트는 다른 장르에서 활용되면서 채널에서 사라졌다고 봅니다.

청춘 시트콤의 회귀, <내일 지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Q 그렇다면 최근 연출한 <내일 지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어>는 예전 시트콤과 비교해 어떻게 다른가요? A 다르지 않은 게 다른 부분입니다. 시트콤이 있다는 것을 시장에 보여주고, 젊은 시청자들이 재미있다고 느끼게 하는 게 최우선입니다. 현재 10대들이 유튜브로 <논스톱>, <순풍산부인과>(SBS)를 즐겨 봐요.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의 시트콤인데 말이죠. 그동안 시트콤을 못 봤기 때문에, 시트콤이라는 장르 자체가 오히려 새롭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인물의 캐릭터성에 집중한다는 것도 기존의 공식인데, 저는 시트콤을 아이돌 산업과 비슷하다고 봅니다. 아이돌 그룹의 멤버를 보면 완벽한 사람은 없어요. 누구는 얼굴이 잘생겼고, 다른 누구는 춤을 잘 추고, 또 다른 누구는 잘 웃기죠. 시트콤의 역할 분담이랑 비슷합니다. 팬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멤버 한 명만 있어도 전체 그룹을 좋아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번 시트콤에서도 개별 인물들의 캐릭터 특징이 부각되도록 노력했습니다. 팬덤을 만들기 위해서요. 또 특징이라면, 시트콤의 본질에 집중했다는 건데요. 시트콤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바로 ‘훔쳐보기’예요. <뉴 논스톱> 주제곡을 듣다 보면 ‘오늘은 누가 누가 어떤 사고로 뒤통수 칠는지 너무나 궁금해져’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그 가사가 말해주듯 시청자들은 시트콤 출연자가 오늘 뭐 하는지 궁금해합니다. 내 옆집에 사는 친구들을 훔쳐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죠.

Q <내일 지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기자간담회에서, ‘동경’과 ‘공감’을 기반으로 연출 한다고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훔쳐보기’로 두 개의 개념을 연결하시는 것 같은데요. 실질적으로 이것을 어떻게 구현하셨나요? A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대중이 왜 시트콤을 보느냐’로 풀어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시청자는 틈날 때 한 편씩 시트콤을 봅니다. 밥을 먹거나, 잠깐 시간을 들여 스트레스를 풀고 싶을 때요. 근데 시트콤이 현실을 반영하면 ‘공감’할 수는 있지만 아름답지는 않죠. 시청자들은 그 20분 동안 잠시 고단한 인생을 잊고 싶어 해요. 판타지 속 세상으로 시선을 돌리면서요.

<내일 지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어>는 여기에 착안했습니다. 한국에 와보지 않은 외국인에게는 한국 생활이 판타지가 될 수 있어요. 여기서 ‘동경’이 작용합니다. 그래서 대학교 국제기숙사의 청춘을 떠올렸습니다. 비슷한 나이대의 청춘끼리 공감하는 부분이 많을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동경’에 힘을 줬지만, ‘공감’이 뒷받침하는 구성이죠.

한국 콘텐츠 시장에 시트콤이 부활할 수 있을까?

Q 시트콤은 방송사나 제작사 입장에서 이른바 ‘가성비’ 높은 장르죠. 게다가 미드폼이라는 점에서 최근의 이용행태에 부합하는 방송영상콘텐츠입니다. 이러한 장점을 바탕으로 시트콤에 다시 산업적 기회가 올 것으로 보시나요? A 왔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 필요한 게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시트콤의 수가 많아져야 합니다. 3개월이면 한 시즌이 마무리되는데 그다음 시즌, 또 다음 시즌으로 계속 끌고 갈 여력이 없죠. 이렇다 보니 OTT를 제외하고 창작자나 제작사가 시도할 플랫폼이 없어요. 시트콤이 발달한 미국을 보면, 드라마 한 편의 자본으로 10편의 시트콤을 만들어요. 그중 한두 개만이 성공하죠. 그 한두 개는 시즌 2로 이어집니다. 한국과 미국의 시장 규모 차이를 고려해야 하지만, 어찌됐건 지속해서 시트콤을 제작할 수 있는 기반이 필요합니다.

Q 시트콤이 새로운 K-영상콘텐츠로 자리하려면, 어떠한 전략이 필요할까요? A 포맷화해야 합니다. 요즘 스크립티드 포맷(scripted format)의 거래가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스크립티드 포맷은 10~20개의 개별 에피소드를 만들어 놓고, 수출국의 사정에 맞게 조금씩 바꾸어서 만드는 형태인데요. 저는 시트콤을 그대로 판매하는 것은 의미 없다고 봅니다. 시장마다 코미디를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니까요. <거침없이 하이킥>(MBC) 시리즈처럼 국내에서 성공한 작품도, 중국에서는 큰 호응이 없었어요.

그리고 드라마적 요소를 강화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서사가 필요해요. 우리가 <프렌즈>(NBC), <빅뱅이론>(CBS)의 유머코드를 100%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시트콤 전체를 이끌어가는 서사의 맥락에 기반해 즐기잖아요. 작가들과 회의하면 가장 고민하는 게 서사예요. 시트콤은 인물이 먼저고, 그에게 맞는 스토리를 짜는 구조입니다. 서사와 캐릭터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전략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게 바로 ‘시스템 창작’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시트콤은 여러 명이 동시에 창작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누구는 스토리를 잘 풀고, 다른 누구는 코미디에 소질 있으며, 나머지 누구는 플롯을 잘 구성하는 식이어서 이들을 섞어가며 하나의 에피소드를 만듭니다. 이러한 시스템이 정착되면 제작이 수월해지고, 시트콤에 서사를 도입할 수 있는 여지도 늘어나죠.

Q 넷플릭스와 협업하시면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콘텐츠 제작에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었나요? A 국내 방송사와 같이할 때는 중요했던 부분이 “방송사가 원하는 게 뭐죠?”였습니다. 상대방의 요구를 파악해서 맞춰보는 거죠. 넷플릭스에게도 “넷플릭스다운 것이 뭐죠?”라고 자주 물어봤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우리한테 맞추지 마시고, 그냥 당신이 제일 잘하는 거 하세요”였습니다. 이용자에게 ‘내가 원하는 게 넷플릭스에 있을거야’라는 믿음을 주려면 다양한 이용자를 만족시킬 수 있게 다양한 개성의 콘텐츠가 있으면 된다는 거예요.

넷플릭스와의 협업으로 새롭게 생각하게 된 부분도 존재합니다. 바로 다양성 이슈입니다. 국내 콘텐츠가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하려면 이 부분을 극복해야 합니다. 가령, 국내에서 통용되는 코미디가 글로벌 기준에서는 차별일 수 있어요. 다양성에 대한 민감도가 떨어지면 글로벌 시장에서 도태되고, 내수용 콘텐츠로 전락하게 됩니다.

결국 OTT 시대는 어느 때보다 콘텐츠 자체에 집중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들을 유의해서 국내 제작자들이 전문성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성장한다면, 우리 방송영상콘텐츠가 글로벌 시장에서 충분히 경쟁력을 갖출 수 있지 않을까요.

필자 소개

  • 김세환
  • 현재 한국콘텐츠진흥원 정책본부 산업정책팀에서 주임연구원으로 재직하며, 국내 방송영상콘텐츠 산업분석과 정책을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