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Special Issue 2

콘텐츠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팬덤 문화

콘텐츠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팬덤 문화

글. 최수정(미디어 뉴스레터 <어거스트> 에디터)

최근 연이어 성공한 일반인 출연 예능 프로그램들을 둘러싸고 다양한 패러디물과 2차 생산 콘텐츠들이 쏟아졌다. 소위 ‘악마의 편집’에도 불구하고, 콘텐츠를 즐기는 팬덤의 능동성은 디지털 리터러시와 만나 독특한 지점을 형성하고 있다.

일반인 콘텐츠의 성공 요인은 관계성

<스트릿 우먼 파이터>(Mnet), <환승연애>(TVING). 아마 아예 안 본 사람은 있어도 1회만 보고 만 사람은 없을 프로그램들이다. 언더그라운드 여성 댄서 크루들의 경쟁을 그린 <스트릿 우먼 파이터>는 방영 내내 10주 연속 비드라마 부문 화제성 1위라는 대기록을 세웠고, 출연진들 중 대다수가 유명 브랜드의 광고모델로 활약하는 등 그 인기를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다.1) ‘이미 헤어진 커플들을 다시 한 공간에 모아놓는다’는 콘셉트에서 출발한 <환승연애>는 티빙 유료 회원들에게만 공개된 콘텐츠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8월 MAU(한 달 동안 해당 서비스를 이용한 이용자 수)가 397만 명으로 전월 334만 명 대비 9% 이상 성장한 수치를 보여줄 만큼 큰 화제를 낳았다.2)

프로그램이 성공을 거두기까지 다양한 요소들이 기여했겠지만, 시청자들이 프로그램과 현실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출연자들의 탄탄한 관계성을 지켜보고, 그것을 2차 가공하고 확산하는 문화가 영향력이 있음을 간과하기는 어렵다. 기존에도 댄스 경연 프로그램이나 연애 리얼리티는 수없이 있어 왔고,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식상한 소재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스트릿 우먼 파이터> 그리고 <환승연애>가 최근 화제가 된 것은 출연자간의 ‘관계성’을 전면에 내세워 프로그램의 골자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관계성이란, 특정 세계관 안에서 인물들의 서사나 설정, 성격 등이 서로 흥미진진하게 엮여있을 때 이들의 서사를 설명하는 단어로 주로 사용된다. 관계성은 서로 연관 없는 인물들을 모아 프로그램 안에서 새로운 상호작용을 만드는 방식으로도 형성될 수 있지만, 이 두 프로그램의 경우 방송텍스트 외적인, 실제 현실에 기반을 둔 관계성을 프로그램 안으로 가져옴으로써 보다 탄탄한 스토리라인을 구성하는 데 집중했다. 대본으로 구성된 ‘가짜’도 아니고, 자본주의적 요인으로 묶인 어색한 관계도 아닌, 실제 다년간 쌓인 출연자간의 감정을 방송용으로 재포장하여 전달함으로써 시청자들에게 색다른 재미를 제공한 것이다. 실제로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경우 1화의 전반적인 내용이 출연자들이 과거 어떤 사이였고 어떤 사연을 갖고 있는지를 쌓아올리는 데 집중돼있다. 첫 방송 이후 이런 관계성이 시청자들의 관심에 적중해 온라인상에서 2차 콘텐츠 생성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떡밥(가십거리가 될 만한 주제)’을 제공했다.

  • 출연자들 사이의 관계성을 바탕으로 인기몰이를 한 <스트릿 우먼 파이터>

    출처 : 엠넷

‘악편’과 팬덤의 상호작용

물론 아무리 현실에 기반을 둔 관계성을 중심으로 다뤘다고 할지라도, 콘텐츠가 제작되는 과정에서 편집자 혹은 제작진들의 편집 과정을 거치게 되면 현실과의 괴리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제작진에 의해 재현된 현실은 객관적이지 않으며, 그것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제작진의 의도가 녹아들어가 있다.3) 편집은 창작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들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현실의 모습과는 다른 형식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4) 이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삭제되거나 요약되고 때로는 ‘악편(악마의 편집)’이라고 일컬어지는 과한 편집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실제로 <스트릿 우먼 파이터>는 출연자들 사이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갈등을 억지로 만들어내는 듯한 편집으로 많은 시청자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5)

그런데 최근 <스트릿 우먼 파이터> 등의 콘텐츠가 온라인에서 소비되는 현상을 지켜보면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시청자들이 단순히 프로그램에서 편집해 보여주는 단편적인 캐릭터들의 관계에만 집중하는 게 아니라, 편집 너머에 대해 의문을 갖고 실제 그들의 관계는 어떤지를 찾아내려고 하는 현상이 목격되고 있는 것이다. 일례로 <스트릿 우먼 파이터> 출연자 중 여진(YGX)은 노제(웨이비)와 평소에 두터운 친분을 가진 사이지만, 방송에서는 노제를 조롱하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방송 이후 SNS와 커뮤니티를 통해 여진에 대한 악플이 쏟아지면서, 실제 두 사람의 관계가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증거자료들을 속속 찾아내 영상으로 제작하는 사례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유사한 지점으로 ‘과몰입 방지 영상’의 유행도 <스트릿 우먼 파이터>를 즐기는 팬덤의 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자극적으로 편집된 모습 이외에 실제 현실에서 출연자들의 관계가 어떤지를 찾아내서 그걸 기반으로 콘텐츠를 만드는 게 유행처럼 번진 것. 편집되어 방영되지 않은 삭제 영상을 모아서 콘텐츠를 제작하거나, 예전부터 출연자들이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들을 팬들이 직접 찾아내 게시물을 작성하는 모습이 방영 내내 다양한 커뮤니티 및 유튜브 채널을 통해 목격되었다.

  • 출연자들의 편집된 모습이 아닌 그 이면의 모습을 모아 영상을 만드는 요즘 시청자들

이런 팬덤의 활동 양상은 디지털 리터러시(Digital Literacy)에 의한 작용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다. 디지털 리터러시란, 디지털 플랫폼의 다양한 미디어를 접하면서 명확한 정보를 찾고, 평가하고, 조합하는 개인의 능력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자면 온라인을 통해 정보를 찾고 재생산하여 확산하는 데 익숙한 팬들이 더 많아졌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방송 콘텐츠와의 관계성 속에서 지식과 정보를 취사선택하고 재조합하는 ‘구성력’, 타인들과 지식과 정보를 소통하고 결과를 사회적 수준으로 확산시키는 능력인 ‘파급력’, 정보 원천의 신뢰성을 파악하고 문제해결을 위해 자신과 공동체에 비판적 대안을 제시하는 능력인 ‘성찰력’의 측면에서6) 한국의 팬덤이 보다 성숙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기존 콘텐츠의 재생산과 확산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콘텐츠 정보 자체의 신뢰성이나 문제점을 파악하고 활발한 상호작용을 통해 결국 원 프로그램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이 사회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목격되고 있는 셈이다.

팬덤은 새로운 문화를 창출한다

경험하고 생산하는 콘텐츠의 주체로서 한국 팬덤의 힘을 확인할 수 있는 영역은 무궁무진하다. 팬덤은 온라인에서 밈을 형성하고, 원본 콘텐츠를 재구성하여 자신들이 바라는 형식의 새로운 스토리라인을 창출하면서 또 다른 신드롬을 만든다. 오히려 팬들이 만들어낸 패러디 콘텐츠들이 프로그램으로 역수용되어 다뤄지기도 하고, 새로운 프로그램 코너로 소화되면서 더욱 풍부한 논의의 장을 형성한다.

유튜버 조씨(Jossi)가 가장 대표적이다. 이 유튜버는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 등장하는 한 장면을 가져와 직접 손으로 그린 애니메이션에 리코더 더빙까지 해서 패러디 콘텐츠를 만들었다. 그가 만든 콘텐츠 중 가장 유명한 콘텐츠는 단연 ‘Hey Mama’에 맞춰 춤을 추는 노제를 패러디한 영상이다. 2개월 전 업로드 된 이 콘텐츠는 12월 7일 기준 조회 수 440만을 돌파했고, 해당 BGM에 맞춰 다른 출연진이 춤을 추는 영상이 연이어 재생산되기도 했다. 뒤이어 공중파 프로그램에서 <스트릿 우먼 파이터> 댄서들을 출연시킬 때 신드롬 현상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영상 중 하나로 자주 소개되기도 했다. 팬들의 활발한 참여가 어떻게 콘텐츠에 대한 신드롬을 형성하고, 그 상호작용이 어떻게 더 풍부한 콘텐츠로 귀결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인 셈이다.

기존 한국의 팬덤 문화에 대한 논의가 스타 혹은 아이돌 등 셀러브리티의 영역에 국한되어 왔었다면,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리얼 예능 프로그램들의 연이은 성공은 이제 새로운 논의의 장을 열었다. 방송이 끝나도 팬덤은 계속된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과도한 사생활 침해 논란 등 다양한 이슈가 산재해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나, 디지털 리터러시를 기반으로 한 한국 팬덤의 자정작용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싶다. 우리는 또, 긍정적인 방향을 찾아낼 것이라고 믿는다.

필자 소개

  • 최수정
  • 11번가 라이브커머스 마케터로 근무하고 있으며, 커머스와 콘텐츠를 넘나드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 중입니다. 뉴스레터 <어거스트>의 에디터이자, 브런치 작가 ‘조이’로 활동하면서 영화/방송문화 콘텐츠에 대한 다양한 글을 작성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