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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이 빨라질수록,
인간다움은 오히려 ‘선택의 이유’가 된다

글. 노창희 | 디지털산업정책연구소 소장
기술이 콘텐츠 제작 전 과정에 스며들고 콘텐츠를 더 빠르고 완성도 높게 만들어 줄수록, 역설적으로 향유자의 시선은 결과물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사람’에게로 향한다. ‘무엇을 만들었는가’보다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가’가 콘텐츠를 선택하는 새로운 기준이 되고 있다.

‘인간다움’을 찾아가는 오디세이

영화 <오디세이>(2026) 스틸컷 © 유니버설 스튜디오

올여름 가장 큰 주목을 받은 영화 중 하나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였다. 놀란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오디세이>는 실물 세트와 로케이션, 인카메라 촬영을 적극 활용해 경이로운 장면들을 구현했다. 프랜차이즈 캐릭터가 감독이나 스타 배우보다 더 주목받는 오늘날의 할리우드 시스템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연출자는 단연 크리스토퍼 놀란이다. 특정 감독이 연출했다는 이유만으로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 놀란인 것이다.

모든 화두가 인공지능으로 수렴되는 시대에 2026년 가장 위대한 영화로 평가받는 작품이 <오디세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로 시사적이다. 작품에서 등장인물들은 이방인을 환대하라는 제우스의 법을 잊을 만하면 강조한다. 제우스의 법이 중요한 이유는 타인을 환대하라는 규칙이 인류가 공동 번영할 수 있는 문명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역시 문명의 산물이다. 인공지능이 놀라운 결과물을 연일 쏟아내는 가운데 우리는 왜 인공지능에 대해 여전히 의구심을 품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인공지능이 환각과 같은 오류의 가능성을 불식시키지 못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문명은 기술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인간이 기술을 ‘인간다움’을 위해 활용할 수 있을 때 문명에 대한 신뢰가 구축된다.

LLM(Large Language Model) 기술이 등장해 확산된 이후, 결과물에 인간이 얼마나 기여했는지가 그 결과물을 평가하는 핵심 척도로 자리 잡았다. 물론, 인간의 관여도를 직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콘텐츠를 둘러싼 맥락은 이용자에게 가늠자가 되어 준다. 다시 <오디세이>로 돌아오면 놀란이라는 감독 이름 자체가 인간 주도의 제작 과정과 작가적 판단을 기대하게 하는 단서가 된다. 인공지능이 콘텐츠 제작에 개입하는 농도가 짙어질수록 이용자는 ‘인간다움’을 원하게 될지 모른다. 무엇을 볼 것인가를 선택하는 행위는 잃어버린 ‘인간다움’을 되찾아가는 오디세이(Odyssey)가 될 수 있다.

‘과정’이 서사의 일부가 된다

디지털 대전환으로 인해 인터넷을 통한 콘텐츠 소비가 보편화되고 인공지능이 보고 싶은 콘텐츠를 추천해 주기 시작하면서 이용자의 관심을 향한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매일같이 새로운 콘텐츠가 쏟아지는 환경에서 완성된 결과물만으로 이용자의 시선을 붙잡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이용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콘텐츠와 아티스트가 탄생하는 과정 자체가 서사로 자리 잡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 유튜브 채널 ‘BANGTANTV’ <‘달려라 방탄’ 2022 스페셜 에피소드> 영상 갈무리

이러한 흐름을 가장 먼저 보여준 것은 K팝이다. BTS는 무대 위에서의 퍼포먼스만으로 성공을 거둔 아이돌이 아니다. BTS는 SNS를 통해 팬들과 꾸준히 소통해 왔고, ‘달려라 방탄’과 같은 자체 제작 콘텐츠를 통해 자신들을 알려 왔다. K팝이 쌓아온 상징 자본에는 무대 뒤에서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며 아티스트의 서사를 팬들과 공유해 온 전략이 한몫했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사례로는 최정상 아이돌 그룹으로 성장한 리센느를 들 수 있다. 리센느는 라이브 방송을 통해 자신들을 알리고 친근감을 쌓아왔다.

같은 흐름은 드라마와 예능에서도 반복된다. 인기 드라마 <폭군의 셰프>는 임윤아가 촬영 전에 3개월 동안 요리를 연습했던 과정이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개되어 관심을 모았다. 김태리가 주연을 맡았던 <정년이>의 경우 김태리가 오랜 기간 판소리를 익혔다는 것이 마케팅 포인트로 작용했다. <동궁>에 등장한 붉은 글씨는 CG가 아니라 서예가 이정화 작가의 작품이었고, 창작의 과정이 작가의 SNS에 공개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창작의 과정은 단순히 마케팅 포인트를 넘어 이제 콘텐츠를 둘러싼 중요한 서사로 작동하고 있다.

드라마 <김부장> 스틸컷 © SBS

흥미로운 것은, 인공지능을 적극 활용한 콘텐츠에서도 결국 화제를 만든 것은 심혈을 기울인 노력이었다는 점이다. 인공지능을 제작에 활용해 주목받은 <김부장> 역시 화제성의 상당 부분은 배우 소지섭의 몸과 액션에서 나왔다. 1화의 복근 노출 장면이 화제가 됐고, 흥행 이후에는 그의 과거 운동 영상이 SNS에서 다시 퍼지며 관심을 이어갔다. 결국 인공지능 같은 첨단 기술이 제작 효율을 아무리 높여도, 시청자의 시선을 붙잡는 것은 그 과정에 담긴 사람의 노력인 셈이다.

추천 알고리즘을 통해 취향에 맞는 콘텐츠를 즉각적으로 접할 수 있는 환경이 될수록, 이용자들은 오히려 그 콘텐츠가 탄생하게 된 배경과 맥락에 더 큰 관심을 두게 된다.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콘텐츠를 한결 손쉽게 제작할 수 있게 되면서, 창작자들은 콘텐츠 자체를 넘어 그것을 둘러싼 아우라까지 만들어 내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협업의 파트너로서의 인공지능

그렇다면 인공지능은 인간이 만들어낸 콘텐츠의 아우라를 위협하는 존재일까, 아니면 함께 만들어가는 존재일까. 지금과 같이 고도로 발달하기 전부터 인공지능을 둘러싼 가장 큰 공포는 인간의 역할을 기계가 대체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현재의 양상을 보면 콘텐츠 제작과 관련하여 인공지능이 인간의 역할을 잠식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물론, 제작 과정에서 인공지능의 등장과 확산이 인간의 역할을 재편시키고 그 과정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드는 일은 불가피해 보인다. 하지만 이용자들은 여전히 인간의 손길이 느껴지는 콘텐츠를 선호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인공지능을 덜 활용한 콘텐츠가 갖는 가치가 높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인공지능이 제작 전 과정을 도맡는 콘텐츠는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콘텐츠 생태계 전체를 채울 수는 없다. 지금 창작자들은 인공지능을 비효율을 줄여 주는 파트너로 삼아, 과거에는 보여줄 수 없었던 것들을 선보이고 있다. 이 협업의 양상은 제작 규모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텐트폴급 콘텐츠(막대한 제작비가 투입되고 흥행 가능성이 가장 높아, 제작사나 플랫폼의 한 해 수익을 책임지는 핵심 기대작, 대형 블록버스터)에서 인공지능은 작품의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한편, 제작진이 직접 투입될 때 뒤따르는 위험 부담을 덜어주고 있다. 반면 1인 또는 소수 인원이 제작을 전담하는 경우에는 과거 사람의 손을 거쳐야 했던 작업을 나눠 맡는 조력자로서, 적은 인력으로도 수준 높은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뒷받침하고 있다.

‘신뢰’가 자산이 되어간다

© shutterstock

로이터 저널리즘 연구소 1 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뉴스에 대한 신뢰도는 2026년에 전년 대비 3%p 하락해 조사를 시작한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뉴스 이용 창구별 신뢰도는 더욱 시사적이다. 뉴스 전반에 대한 신뢰도는 37%, 검색엔진을 통해 접한 뉴스에 대한 신뢰도는 32%, SNS를 통해 접한 뉴스에 대한 신뢰도는 22%다. AI 챗봇을 통해 이용한 뉴스에 대한 신뢰도는 20%로 가장 낮은 신뢰도를 기록하고 있다.

위의 조사 결과가 시사하는 것은 사람들이 인공지능이 전달해 주는 정보를 아직 온전히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같은 조사에서 매주 AI 챗봇으로 뉴스를 이용한다는 응답은 2025년 7%에서 2026년 10%로 늘었다. 이용은 빠르게 늘고 있지만 신뢰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편리함이 곧바로 신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콘텐츠를 제작할 때 인간의 관여도를 높이는 것이 신뢰를 높이는 방법이 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뢰는 정보의 정확성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누가 어떠한 관점과 맥락에서 콘텐츠를 다루는지, 그리고 그 결과에 누가 책임을 지는지가 신뢰를 확보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앞서 살펴본 창작 과정의 공개가 화제성을 넘어 일종의 신뢰 장치로 기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제작 과정에서 인공지능을 어디에, 얼마나 활용했는지를 투명하게 밝히는 일 역시 이용자와의 신뢰를 쌓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인공지능은 도움을 줄 수는 있어도 모든 것을 대신해 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결국 신뢰는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책임질 때 비로소 자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다움은 ‘선택의 이유’가 된다

© clipartkorea

기술은 콘텐츠 제작의 많은 부분을 대신하거나 효율화할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사람이 직접 만들고, 사람이 무언가를 겪어낸 흔적이 담긴 콘텐츠를 찾는다. 이는 기술을 거부하는 태도라기보다 기술이 흔해질수록 흔하지 않은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자연스러운 반응에 가깝다. 누구나 그럴듯한 결과물을 손쉽게 만들 수 있는 환경에서는 결과물 그 자체보다 그것을 만든 사람의 판단과 경험, 그리고 창작자가 이용자와 맺어온 관계와 맥락이 차별화의 원천이 된다.

그렇기에 기술과 인간을 대립 구도로만 볼 필요는 없다. 인공지능이 발전할수록 인간다움은 콘텐츠를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이용자가 그 콘텐츠를 ‘선택하는 이유’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콘텐츠의 미래는 기술의 효율성이 아니라 그 안에 남겨진 ‘인간다움의 역설’에 있을지도 모른다. 오디세우스가 긴 여정 끝에 결국 집으로 돌아왔듯, 기술이 멀리 나아갈수록 우리는 사람다움이라는 출발점으로 되돌아오게 될지도 모른다.

필자 소개

노창희

중앙대학교 신문방송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미디어미래연구소 센터장 등을 역임한 미디어·콘텐츠 정책 전문가로, 현재 디지털산업정책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OTT, 미디어 플랫폼, 콘텐츠 생태계 등 급변하는 디지털 환경의 핵심 이슈를 분석하며 실효성 있는 제도 혁신과 정책 대안을 활발히 연구하고 있다. 더불어, 유수 매체에 꾸준히 미디어 관련 칼럼을 연재하며, 미디어 산업의 흐름과 미래 전망을 꿰뚫는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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