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ol.24 2022 Summer

    가상인간, 현실로 로그온

핫트렌드 2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인가 텍스트의 영상화, 주객전도의 현장

정민경 기자(미디어오늘)

  • hot2_img1 © 민음사, 넷플릭스
  • 다음 작품의 공통점을 알아보자. 넷플릭스의 <브리저튼> 시리즈, <보건교사 안은영>, 애플TV+의 <파친코>, 왓챠의 <시맨틱 에러>. 장르도 다채롭고 형식도 가지각색인 이 콘텐츠의 공통점은 바로 소설을 원작으로 두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소설 원작의 영상 작품의 등장이 그리 충격적인 일은 아니다. <반지의 제왕>, <트와일라잇> 시리즈부터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공동경비구역 JSA>, <나를 찾아줘>, <늑대의 유혹> 등에 이르기까지 소설의 영상화 역사는 유구했다.

영상을 위한 소설

  • hot2_img2 © 문피아, 카카오페이지

다만, 최근 이 흐름에 한 가지 특이점이 생겼다. 과거엔 영상화될만한 소설을 감독이 고르는 추세였다면, 이제는 처음부터 영상화 목적의 소설을 공모한다는 것이다. 전통적 소설 장르 외에도 웹소설, 웹툰 등 ‘스토리’가 있는 형식이라면 무엇이든 환영하는 분위기다. ‘원작 스토리’를 위해 올해 열리는 공모전만 보더라도 네이버웹툰 ‘2022지상최대웹소설 공모전’, 카카오엔터테인먼트 ‘스테이지 웹소설 공모전’, 조아라 ‘77페스티벌 웹소설 공모전’, KT스튜디오 시리즈 공모전, 대한민국 콘텐츠대상-스토리부문 공모전, 교보문고 스토리 공모전 등이 있다. 상금 규모도 1억부터 10억까지 기본 단위가 달라졌고, 스케일이 커졌다.1)

영상을 위해 소설을 쓴다는 발상이 아직은 익숙지 않을 수 있다. 혹은 영상을 위한 이야기가 내가 생각하던 소설의 모습과 다를 거라는 우려도 될 수도 있다. 사실, 영상화를 의식한 소설과 그렇지 않은 소설은 분명 그 차이가 클 것이다. 우리가 소설을 읽고 사랑하는 이유엔 이야기의 매력도 있지만, 명징한 언어에 대한 쾌감도 있기 때문이다. 몹시 일상적이어서 언어화하기 어려운 것, 사사로운 생각과 감정들. 바로 그것을 작가가 적확한 언어로 읊어주었을 때 독자는 희열을 느낀다. 이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었을 때의 쾌감과는 또 다르며, ‘영상화를 위한 소설’에서 느끼기 어려운 감정임이 분명하다.

변화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 hot2_img5 © 자이언트북스

얼마 전, 소설가 배명훈, 김중혁이 CJ ENM이 기획한 ‘언톨드 오리지널스’(Untold Originals) 프로젝트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소설 출간 후 영상 콘텐츠로 확장하는 것이 해당 프로젝트의 목표이며, 기획과 집필 과정에서도 영상화를 고려해 작업한다. 실제로 소설가 김중혁은 말한다. “가진 이야기 중 영상화에 어울리는 이야기를 선정한다. 영상화에 어울리려면 묘사보다는 대사가 많아야 한다”라고 말이다. 동시에 그가 느끼는 영상화를 염두에 두고 소설을 쓸 때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야기를 대하는 태도’라고 이야기한다.2) 어느새 작가들은 한 편의 ‘소설’을 텍스트 형식과 영상 형식에 어울리게끔 나누어 쓰기 시작한 것이다.

‘주객전도’된 듯 한 이 현상은 IP 거래의 확장과 콘텐츠 시장이 영상으로 재편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연한 것이 됐다. 박현주 작가가 지난 3월 한겨레 기고한 글3)에는 이 시대 작가로서의 현실이 담겨있다. “한 작가가 일정 분량과 형태를 갖춘 작품을 쓰려면 가성비가 좋지 않은 시대다. 만 오천 원 정가의 책 한 권을 써서 초판 이천 부를 찍으면, 작가가 받는 인세는 삼백만 원 남짓. 집필하는 데 327시간이 넘으면 2022년 최저임금도 되지 않는다. 빨리 쓰거나, 지원받거나, 아주 많이 팔거나 영상화 판권을 팔아야 소설가는 살아남는다.”라고 쓴 바 있다. 쉽게 말해 ‘텍스트는 돈이 되지 않고, 영상은 돈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씁쓸한 이유지만 이는 여타 다른 산업에도 똑같이 벌어지는 현상이다.

  • hot2_img3 © SBS, 넷플릭스
  • 특히, 다소 거리가 멀어 보이는 뉴스콘텐츠 시장도 텍스트를 다루기에 상황은 비슷하다. 텍스트 기반 취재물을 영상화하는 수익적 통로가 점차 본격화됐다. 대표적 사례가 2017년 한겨레 사내벤처로 설립돼, 현재는 독립한 ‘팩트스토리’다.4) ‘지존파’를 파헤친 범죄 르포 기사로 이름을 알린 고나무 기자가 대표로 있는 곳이다. 지난해에는 웹소설 ‘재혼황후’로 유명한 콘텐츠 제작사 엠스토리허브가 지분을 확보해 웹소설 및 실화모티프 스토리 전문기획사로 독립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5월 공개된 넷플릭스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 역시 n번방을 취재한 기자들의 취재기를 바탕으로 한다. 인터넷 기사가 유튜브 영상으로 제작된 사례는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텍스트 기반의 콘텐츠는 소설이든, 뉴스든 이제 ‘영상화’의 가능 여부에 따라 그 확장성을 인정받는 시대가 됐다.

씁쓸한 현실, 마주보기

  • 결국 텍스트가 영상의 하위 매체가 된 것 아니냐고 보는 시선도 느껴진다. 문장이 주는 쾌감을 즐기고, 뉴스 기사에 자부심을 품던 과거에 비해 분명히 씁쓸한 현실이다. 시대적 변화를 거역할 수 없다는 것도 잔인한 현실이다. 누군가는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일 것이고 누군가는 거부할 수도 있다. 다만 대중문화의 형태가 시대적 기호와 니즈에 맞춰 빠르게 변화해온 것은 사실이다.

    동시에 왜 사람들이 텍스트보다 영상을 선호하는지, 여전히 텍스트를 사랑하는 이들을 붙잡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분석하고 나아가는 태도도 필요할 것이다. 다소 씁쓸한 현상 그 이면을 이해해야만 스스로 산업의 변화에 탑승할 건지 이 변화를 거부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게 된다. 그 선택은 스스로 내리는 것이지만 산업의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올바른 방향이 될 것이다. 이 변화에 탑승할지, 혹은 거부할지에 대해 옳고 그르다고 판단을 내릴 자격은 적어도 내게 없다. 다만 이런 변화 속에서 모든 생산자들이 자신과 어울리는 선택을 하고 자신과 어울리는 글을 쓸 수 있는 세상이 되길 바라본다.

  • 1)
  • 한국일보(2022.05.19.), ““콘텐츠 원석 낚자” 커진 웹툰·웹소설 시장에… ‘억 소리’ 공모전들”
  • 2)
  • 경향신문(2022.06.08.), “쓴다, 책‘만’ 말고 ‘영상’도 위한 소설···OTT와 손잡은 소설가들”
  • 3)
  • 한겨레(2022.03.25.), “가성비의 시대, 소설은 어디로 가는가”
  • 4)
  • 미디어오늘(2021.09.07.), “팩트스토리, 10억 투자 유치하고 한겨레서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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