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ol.24 2022 Summer

    가상인간, 현실로 로그온

N Story 1

아직, 예고편일 뿐이야

이원용 기자(글로벌이코노믹 IT부)

디지털 휴먼, 메타 휴먼, 버츄얼 휴먼까지. 의미를 자세히 따지고 들어가면 조금씩 다르겠지만, 이들은 모두 컴퓨터 기술로 구현한 가상 인간을 지칭하는 말이다. 가상 인간은 최근 들어 인플루언서, 광고 모델, 가수, 방송까지 다양한 분야로 활동 영역을 넓히며 다방면에 활용 가능한 미래 사업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 n1_1 사이버 가수 '아담' © 아담소프트
  • 인간이 다른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리스 신화 속 ‘피그말리온’의 이야기에서도 나온 유서 깊은 서사다. 피그말리온이 조각한 상아상이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기적으로 움직였다면, 현대의 인간들은 컴퓨터 기술로 이러한 일을 재현하고 있다.

    SF 소설계 거장 아서 클라크는 저서 <Profiles of the Future>에서 "충분히 발전한 과학 기술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고 말했다. 수천 년 전 사람들이 기적, 마법으로만 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일이 기술 발전에 힘입어 실현 가능한 일로 성큼 다가왔다.

사이버 가수에서 ‘보컬로이드’로

  • 1998년 한국 가요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사이버 가수 ‘아담’을 기억하는가. 그의 첫 음반은 20만 장 이상 판매됐고, 국내외 기업의 광고 모델로 선택받으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러나 3D 그래픽의 인간을 묘사하기엔 당시의 컴퓨팅 기술은 너무나 부족했고, 아담은 과도한 비용 문제로 활동을 중단했다.

    컴퓨터 기술로 가상 인간을 만들려는 시도는 이렇듯 수십 년 전에도 있었다. 일본에선 대형 연예기획사 호리프로가 아담보다 2년 앞선 1996년에 ‘다테 쿄코’란 사이버 가수를 선보였다. 하지만 ‘21세기 멀티미디어 환경에 걸맞은 탤런트 1호’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활동에 나섰던 다테 쿄코 역시 기술적 한계로 아담과 비슷한 말로를 걸었다.

  • n1_2 하츠네 미쿠 ⓒ 크립톤 퓨처 미디어·세가
  • 그렇다면 사이버 가수를 대신해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첫 가상 인간은 누구였을까. 미국 디지털 콘텐츠 기업 오프비트는 일본의 가상 캐릭터 ‘하츠네 미쿠’를 지목했다. 하츠네 미쿠는 2007년 일본의 크립톤 퓨처 미디어가 출시한 음성 합성 소프트웨어 ‘보컬로이드’의 모델명으로, 만화에 나올 법한 녹색 양갈래 머리 미소녀 캐릭터로 묘사됐다.

    하츠네 미쿠의 성공에 있어 가장 중요했던 ‘오리지널리티’를 제공한 것은 수많은 아마추어 작곡가, 즉 크리에이터들이었다. 이들의 활발한 활동의 배경에는 2005년 런칭된 유튜브 등 이용자 창작 영상 플랫폼의 세계적 성공이 있다. 뛰어난 작곡 역량과 발전한 컴퓨팅 기술을 토대로 미쿠는 2009년부터 세계 각지에서 홀로그램 콘서트를 선보였고, 사이버 가수의 성공적인 사례가 될 수 있었다.

'가상 인플루언서'의 등장

  • 특히, 2016년은 가상 인플루언서 업계에 있어 중요한 해로 기록된다. 이 해 일본에선 ‘키즈나 아이’가 데뷔했고, 실존하는 인간이 가상 캐릭터를 내세워 크리에이터 활동을 하는 ‘버츄얼 유튜버’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또, 미국에선 구찌·샤넬·프라다 등 내로라하는 패션 브랜드들이 앞다퉈 찾게 될 가상 인간 ‘릴 미켈라’가 인스타그램 활동을 시작했다.

    데뷔 1년 만에 키즈나 아이가 100만 구독자를 달성하며 파워 인플루언서의 영역에 도달하자 그 성공을 벤치마킹한 후발주자들이 나타났다. 2021년에는 일본의 버츄얼 유튜버 전문기업 홀로라이브 프로덕션에서 론칭한 영어권 유튜버 ‘가우르 구라’가 300만 구독자를 모으며 키즈나 아이를 추월하기도 했다.

    전속 연기자를 두지 않는 완전한 ‘가상’의 ‘인간’ 또한 꾸준한 발전을 이어갔다. 릴 미켈라는 인스타그램에서 300만 팔로워를 모으며 승승장구했고, 2017년부터는 음원을 내며 가수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세계 각지에서 미켈라의 뒤를 이을 ‘버츄얼 인플루언서’들이 등장하고 있다. 동시에 음성 합성 기술, AI 딥러닝 기술 등을 통해 이들을 ‘진짜 인간’에 가깝게 만드는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여전히 높은 진입 장벽

사실 ‘버츄얼 유튜버’와 ‘가상 인간’은 목소리와 모션을 고정 담당하는 전속 연기자의 존재를 제외하면 개념적 차이가 크지 않다. 하지만, 시장에 공급되는 양에서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일본 유튜버 통계 분석 플랫폼 유저 로컬은 지난해 버츄얼 유튜버의 수가 1만 6,000명을 넘어섰다고 발표했다.1) 이는 영국 인플루언서 분석 사이트 ‘버츄얼 휴먼즈’가 지난해 발표한 가상 인간의 수 188명2)에 비해 85배 이상 많은 수치다.

양자 간에 큰 간극이 나타난 이유는 진입 장벽의 격차와 그로 인한 유입 인원의 차이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버츄얼 유튜버는 라이브 2D 그래픽 아바타를 활용하는 것이 보편화돼있어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도전할 수 있다. 또한 업계 최고 수준의 버츄얼 유튜버 모델도 2D 그래픽 기준 1,000만 원 수준에서 구매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가상 인간 구축에 있어 1,000만 원은 지극히 적은 자본에 불과하며, 더욱 진짜에 가까운 현실적인 모델 구현을 위해선 이보다 몇 배 내지는 수십 배의 비용이 필요하다. 이에 관해 가상 인간 ‘루미’를 개발한 덴츠 싱가포르 측은 "2~3달에 걸쳐 막대한 돈을 들여 가상 인간을 만드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며, 가상 인간을 인플루언서로서 유의미한 지점까지 올리려면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다"3)고 말했다.

  • n1_3 버츄얼 유튜버 '아뽀키' ⓒ VV엔터테인먼트
  • 시장에 공급되는 콘텐츠의 양과 더불어 인기 면에서도 가상 인간은 버츄얼 유튜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틱톡에서 360만 명이 구독 중인 ‘아뽀키’, 2021년 12월 발매와 함께 가온 차트 다운로드 순위·벅스 실시간 차트 1위 등을 차지했던 ‘이세계 아이돌’ 등 여러 버츄얼 유튜버들이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하지만, 가상 인간은 인스타그램에서 12만 명이 팔로우 중인 ‘로지’ 외엔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파악된다.

'인간다움'을 찾아서

  • 버츄얼 유튜버과 비교했을 때 가상 인간의 미진한 성과는 ‘인간다움’의 부족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최근 상당수 버츄얼 유튜버들은 단순한 영상 콘텐츠 제작을 넘어 실시간 스트리밍을 통해 시청자들, 나아가 다른 크리에이터들과 직접 교감하고 있다. 하지만, 가상 인간은 AI 기술의 한계로 실시간 음성 합성·커뮤니케이션이 어려워 아직 대중화되진 못하고 있다.

    특히, 가상 인간의 주요 약점으로 꼽히는 ‘불쾌한 골짜기 현상’은 향후 중요한 문제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해당 현상이 단순히 시각적인 면에서 느껴지는 불쾌함 외에 음성과 말하는 내용, 표정 등을 통해 느껴지는 감정적인 부분을 포괄하기에 더 그렇다. 그 단계를 넘어선 이후엔 버츄얼 유튜버의 인기 요인으로 작용하는 소통과 교감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가상 인간을 수십 년 동안 연구해온 이제희 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부 교수는 가상 인간의 전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가상 인간이 실제 인간과, 또는 가상 인간끼리 자유로이 '인터랙션(상호작용)' 할 수 있어야겠죠. 단순히 인간을 닮은 것을 넘어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표정에 반응하고, 나눈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이를 활용할 수 있어야 진정한 의미의 가상 인간이 될 겁니다." 4)

    이는 가상 인간이 아무리 시·청각적으로 매력적이라 해도 자유로운 상호작용이 가능한 ‘인간다움’이 갖춰졌을 때 비로소 그 매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앞으로 가상 인간이 어디까지 발전하고, 어떤 모습으로 대중에게 다가올지 확실한 답은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1990년대 말 사이버 가수로 태동한 가상 인간 사업이 불과 30여 년 만에 주목받는 미래 사업으로 성장하리라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충분히 발전한 과학 기술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는 아서 클라크 작가의 말은 기술 발전이 과거 사람들에겐 마법처럼 놀라운 것이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가상 인간을 향한 지난 30여 년간의 발전사는 어쩌면 지금의 우리로선 놀랄 수밖에 없는, 더욱 ‘인간다운’ 가상 인간들이 나타나기 위한 서막에 불과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 1)
  • UserLocal(2021.10.19.), “バーチャルYouTuber、本日1万6千人を突破(ユーザーローカル調べ”
  • 2)
  • VirtualHumans(2022.06.24.), “How Many Virtual Influencers Are There?”
  • 3)
  • Campaign(2022.05.09.), “Is creating a virtual influencer worth the trouble for brands?”
  • 4)
  • 엔씨소프트(2022.05.13.), “SCIENCE to the Future #9 현실과 상상의 인터랙션으로 새로운 즐거움을 창조하다, 이제희”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