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ol.25 2022 Autumn

    콘텐츠, 너나들이

글로벌트렌드

TRPG 작동법

김성일 편집장(도서출판 초여명)

  • trend1

'이야기라는 욕망'

  • trend2 <기묘한 이야기>에 등장한 D&D © 넷플릭스
  • 가상의 세계, 가상의 인물, 가상의 이야기에는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모닥불에 둘러앉은 고대인이 전승하던 부족 신화부터 소설과 영화, 게임은 물론 아이돌 그룹의 세계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존재하진 않지만, 존재한다고 믿고 싶은 또 다른 세계와 그 안의 인물에게 빠져든다.

    나아가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마음속에서 다시 돌려 보고, 다른 전개를 떠올리고, 그 뒤에 숨겨진 무언가를 상상한다. 그렇게 그 세계와 캐릭터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살아 움직여, 한 번 더 생명을 얻는다.

    TRPG는 그 힘을 활용하여 이야기에 대한 욕망을 끝까지 가져가는 놀이다. PC 게임이 가진 화려한 그래픽이나 정교한 밸런스, 리얼타임 액션은 없다. 잘 만든 소설이나 영화 같은 치밀함도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힘만큼은 어느 매체보다 강력하다.

TRPG의 재발견

  • TRPG는 'Tabletop Roleplaying Game'의 약어로, 참가자들이 모여 각자 주인공 캐릭터로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역할 놀이'다. 1974년에 게리 가이객스와 데이브 아네슨의 <Dungeons & Dragons>로 시작된 TRPG는 50년 가까운 세월을 거치며 처음과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발전했다. 국내에서는 <크툴루의 부름>, <피아스코>, <언성 듀엣>과 같은 해외 작품들이 특히 주목받고 있다.

  • trend3 © 유튜브 '침착맨' 채널
  • 90년대에는 TRPG가 그 후손 격인 멀티플레이어 CRPG에 완전히 밀려날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 유튜브와 트위치에는 TRPG의 플레이 실황 동영상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아마추어의 간단한 영상이 있는가 하면, 미국 스튜디오에서 전문 제작한 <Critical Role>이라는 대형 쇼도 있다. 특히, 해당 계정은 유튜브에서 200만 명에 가까운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다.

    즉, 놀랍게도 TRPG의 인기는 지금이 전성기다. 가장 큰 이유는 SNS의 발달로 플레이어를 구하기 쉬워진 것과 영상 통화의 일반화로 공간적 제약이 완화된 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근년 판타지·SF·슈퍼히어로 장르의 약진, 그리고 독자적인 '세계관'과 캐릭터성이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것을 보면, 가상 이야기에 대한 열정의 재발견이 TRPG의 인기에도 기여하지 않았을까 싶다.

경험 그 자체의 매력

  • trend4 TRPG 룰북 © 초여명
  • 특히, TRPG만의 매력은 이야기를 예측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누가 어느 캐릭터를 맡고,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플레이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TRPG에서 플레이어들은 게임의 시작과 함께 캐릭터의 입장이 되어 이야기 속 상황에 대응해 나간다. 세계는 그 대응에 맞추어 변화하고, 플레이어는 변화한 상황에 다시 대응하며 목표를 추구한다. 진행자인 '마스터' 역할을 맡은 참가자는 이야기의 얼개를 제시하고, 플레이어의 행동에 맞추어 상황을 변화시키며 요소를 도입한다. 이 상호작용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선택의 와중에 캐릭터는 점점 더 생생한 인물이 되어가고, 세계는 더욱 풍부해지며,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이 모든 과정에, 책에 담긴 룰의 안내와 보조가 따른다. 그러니 작가로서의 재능이나 경험이 없어도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TRPG에서 결과물로서의 이야기가 얼마나 세련되고 아름다운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내가 그 세계의 주인공이 되어 맞닥뜨리는 상황을 겪으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 자체가 재미의 핵심이다. 가상의 상황에서 내 캐릭터가 무엇을 할지 생각하고 대답하는 것에도 몰입의 즐거움이 있지만, 그 순간이 쌓이면서 인물이 만들어지고, 누구도 미리 생각하지 않은 서사가 생겨나는 느낌은 여타 게임이 대체할 수 없다.

  • trend5 드라마 <빅뱅이론> 주인공들이 TRPG를 즐기는 모습 © 미국 CBS
  • 더욱이 그사이에 오가는 농담과 사소한 장난까지가 TRPG의 경험이고 매력이다. 컴퓨터 시대 이전의 놀이가 대개 그렇듯, 친목과 사교의 수단이기도 한 것이다. 현대에는 많은 엔터테인먼트가 익명이거나 일방적이다. 게임과 스트리밍 영상에서 향유자들의 상호작용이 대화보다는 정제된 인터페이스나 익명의 댓글을 통해 일어나는 지금, TRPG의 사교성은 도리어 신선할 정도로 전통적이다. 어쩌면 최신 엔터테인먼트에서는 없는 것을 찾아 TRPG로 눈을 돌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TRPG가 시대의 흐름과 관계없이 전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전통적인 플레이 방식은 탁자 너머로 눈을 마주치고 몸짓과 손짓까지 읽어가며 웃고 대화하는 것이지만, 최근엔 많은 TRPG 세션이 음성 채팅이나 영상 회의 앱을 통해 벌어진다. 가상현실이나 메타버스를 TRPG의 플랫폼으로 사용하려는 비전은 오래전부터 있었고, 서서히 현실화하고 있다. 물론 온라인의 편의성을 누리건, 오프라인의 친밀성을 추구하건, 아직 완성되지 않은 메타버스에서의 세션을 꿈꾸건 간에 TRPG가 사교적이고 창의적인 놀이임에는 변함이 없다.

    TRPG에서는 누구나 룰의 도움을 받아 가상의 세계를 상상으로 칠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한 바로 그 캐릭터가 되어, 내가 생각하는 바로 그 세상을 다닐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혼자가 아니라 가까운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 이야기에 대한 열망이 있는 한, 그리고 그것을 의미 있게 나누고자 하는 바람이 있는 한, TRPG의 수요는 계속될 것이다.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