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ol.25 2022 Autumn

    콘텐츠, 너나들이

N Story 2

또 다른 '우영우'를 위해

박주연 기자(일다)

OTT 플랫폼은 '개인'을 타깃으로 삼고 다양한 환경과 상태, 취향을 고려한 콘텐츠를 제작해왔다. 기존의 TV가 타깃으로 삼았던 '가족'에서 그 대상이 세분화되자, 개개인을 울릴 더 섬세한 이야기가 필요해졌고 이는 사회적 반향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국내외 방송, 영화 등의 미디어산업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지난 몇 년간 '다양성과 포용'(Diversity & Inclusion)이 주요 키워드로 부상했다는 걸 모르지 않을 것이다.

  • 미투운동(나는 고발한다), BLM운동(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 기후정의 운동 등이 'MZ세대'라 불리는 젊은 청년들 사이에서 지지를 얻은 것도 이 때문이다. 현실을 반영해 콘텐츠를 제작하는 미디어산업은 이런 변화에 기민하게 반응한다. 과거와 다르게 콘텐츠의 제작 과정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에서 논의가 그치지 않고, '누구'를 '어떻게' 그릴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누구의' 이야기인가

  • n2_1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 넷플릭스
  • 아직 올해가 끝나진 않았지만, 2022 화제의 드라마로는 단연 ENA 채널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변호사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 드라마는 신생 채널에서 1%도 안 되는 시청률로 출발했지만, 마지막 회엔 17%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물론, 배우의 연기와 에피소드 형식의 구성 등 인기 요인은 다양하지만 자주 접할 수 없었던 장애여성의 이야기를 담았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흔히 장애인이 방송, 영화 콘텐츠에 등장할 땐 몇 가지 패턴이 있다. 일단 장애인 캐릭터는 대부분 주인공이 아니며 비장애인 주인공의 성장을 돕거나, 성장의 발판이 되는 보조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또 항상 주변의 돌봄을 받는 존재로 설정되어 주체적인 행동을 하지 못한다. 이런 재현의 반복은 '장애인=의존적인 존재'라는 편견을 가중할뿐더러 장애를 희화화하거나 부정적으로 그리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반면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이런 재현 방식에서 벗어났다. 우영우는 주인공으로서 매력을 뽐내며 이야기의 중심이 됐다. 주변 인물과의 관계 또한 불균형한 장애인과 비장애인 관계로 그리지 않았다. 장애여성이 방송 미디어에서 재현되는 일이 극히 드물어, 인상적인 장애여성 캐릭터를 꼽는 일이 어렵다는 걸 고려하면 더 의미가 있다. 이외에도 올해 tvN에서 방영된 <우리들의 블루스>에 다운증후군이 있는 발달장애인 '영희'가 등장했다는 것, 그리고 그 캐릭터를 비장애인이 아닌 장애 당사자가 연기했다는 점도 '다양성 재현' 이슈를 한층 더 확장했다고 할 수 있다.

  • n2_2 <메리퀴어> © wavve
  • 최근의 '성소수자'의 미디어 재현도 주목해볼 만하다. 드라마 등의 방송 콘텐츠에서 종종 등장한 바 있던 성소수자 캐릭터가 작년엔 tvN <마인>, tvN <갯마을 차차차>, tvN <더 로드: 1의 비극>, 티빙 <술꾼도시여자들> 등에 등장했다. 올해 여름 웨이브에서는 퀴어 예능 리얼리티 쇼 <메리퀴어>와 <남의연애>가 방영되기도 했다. 사실 성소수자의 존재는 여전히 사회적 이슈로 여겨지는 탓에 미디어 재현이 시사/다큐에 한정되는 경향이 많았다.

    앞서 언급된 다양한 프로그램 중 <메리퀴어>와 <남의연애>는 리얼리티 예능의 형태로 그 흐름을 바꿨다. 성소수자가 무겁고 심각한 '사회적 이슈'로서가 아니라 누구나 함께 보고 즐길 수 있는 콘텐츠 속 인물로 등장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메리퀴어>엔 성소수자 내의 다양성을 드러내는 인물이 등장한다. 각각 성적지향(개인이 타인에게 느끼는 감정적, 낭만적, 성적 끌림)도, 성별정체성(개인이 본인의 젠더를 자각하는 방식)도 다른 사람들이었다. 해당 프로그램은 그러한 개개인이 어떤 생각으로 삶을 살아가는지, 어떻게 파트너와 관계를 맺어 가는지 보여줬다.

    2021년 SBS의 <골 때리는 그녀들>, Mnet의 <스트릿 우먼 파이터> 등을 비롯한 다양한 콘텐츠가 여성 서사와 캐릭터의 가능성을 확장했던 것처럼, 방송 미디어에서 좀처럼 재현되지 않았던 성소수자와 장애인 이야기가 드러났다는 점은 분명 고무적인 일이다.

'어떻게' 그리는가

  • 그렇다면 다양성과 포용이라는 건 그동안 미디어에서 볼 수 없었던 어떤 소수자를 등장시키기만 하면 되는 걸까? 당연히 답은 "아니오"다. 다양성은 구색맞춤이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화제를 모았던 건 단지 장애여성이 주인공이어서가 아니다. 장애여성인 우영우가 비장애인 중심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잘 보여줬기 때문이다. 장애인에 대한 흔한 편견인 '불행할 것이다', '불쌍할 것이다', '아무것도 해내지 못할 것이다' 등의 인식을 깨면서 말이다.

    한동안 한국 영화 시장에서는 재현되는 인물 대부분이 남성인 것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이후 점차 이를 의식하고 바꾸려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물론 이는 반길만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보십시오! 우리는 콘텐츠에 여성 캐릭터를 한 명을 추가했습니다." 혹은 "등장인물의 성별 비율을 동일하게 맞췄습니다."로 끝나면 곤란하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형식적인 것을 개선하기 위해 제기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핵심은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어떻게 다뤄지는지다. 다양성 재현 이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벡델 테스트'가 탄생한 것도 그런 이유다. 미국 작가 앨리슨 벡델이 1985년 만든 이 테스트는 콘텐츠 속에서 여성이 얼마나 도구적으로 이용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테스트를 통과하기 위한 기준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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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즉, 다양한 인물을 재현하는 것만큼 중요한 건 그들이 도구적이고 보조적으로 이용되지 않도록 하는 것과 정체성에 의한 고정관념과 편견을 재생산하지 않는 것임을 잊어선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앞서 언급한 <메리퀴어>가 트랜스남성 캐릭터를 그리며 '진짜 남자가 됐다', '이제 남자가 된' 등의 표현을 반복한 부분은 큰 아쉬움이다. 트랜스젠더는 자신이 인식하는 성별과 사회가 지정한 성별이 달라서 성별을 정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기 때문에 해당 표현은 트랜스젠더에 대한 편견을 가중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다양성과 포용을 재현한다는 건 말 그대로 우리 사회가 얼마나 다양한 구성원을 가졌는지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그들을 향한 편견과 차별, 혐오를 깨고 서로 포용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천리길, 한 걸음부터

  •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흥행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사례들과 함께 '우영우'가 세상의 '정상성'에 대한 의문을 던진 것은 확실하다. 낯설지만 과연 이상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어디까지가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모두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다. 또, 앞으로 미디어가 이들을 재현하면서 무엇을 고민하고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하나의 과제를 내준 것으로도 보인다.

  • n2_4 <별나도 괜찮아> © 넷플릭스
  • 실제 자폐 스펙트럼 청소년의 성장을 그린 넷플릭스의 <별나도 괜찮아>는 시즌 1 종영 이후, 자폐 스펙트럼 주인공을 비장애인이 연기하는 것과 자폐 당사자를 제작진에 포함하지 않은 점 등으로 논란이 되었다. 이후 제작자인 로비아 라시드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받아들여 개선해 나갔다. 시즌 2부터 자폐 당사자들을 직접 출연시키고, 제작진에도 포함하며 그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제작자는 <별나도 괜찮아>를 통해 자폐 스펙트럼 청소년의 삶과 꿈을 보여줌은 물론, 자체적으로 자폐 스펙트럼 배우와 제작진을 발굴했다. 사실 장애 당사자인 배우가 장애가 있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다. 미국 FOX 채널에서 방영되었던 뮤지컬 드라마 시리즈 <글리>에서도 휠체어를 탄 장애여성 캐릭터가, 미국 HBO 채널의 명작 <왕좌의 게임>에서도 장애를 가진 캐릭터가 주요 캐릭터로 활약했다. 영미권에서 드문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캐릭터에겐 '장애인'이라는 설정만 주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콘텐츠 내에서 학생, 과학자, 의사, 예술가, 학부모 등의 다양한 정체성과 이야기가 주어진다.

    다양성과 포용을 재현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순 있다. 하지만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미 도전한 창작자들이 새로운 길을 열고 있다. 참고할 수 있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 n2_5 CW open to all 캠페인 © the CW
  • 2018년, 미국 공중파 채널 중 하나로 주로 2030 세대를 타깃으로 하는 CW는 'CW는 모두에게 열려 있다'(CW open to all) 캠페인을 진행하며 다양한 인종, 성정체성, 장애유무, 이주환경 등을 포용한 이야기와 캐릭터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다른 플랫폼도 마찬가지다. 그런 노력과 시도의 결과로 흑인 레즈비언 히어로 주인공의 드라마가, 자폐인들의 데이팅 리얼리티 쇼가, 이주민 가족 이야기의 시트콤이 만들어졌다.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말이다.

    도전은 모험이지만, 모험이 결국 새로운 세계를 연다. 앞으로 이야기를 만들 때부터 이런 걸 해 보는 건 어떨까? '원주민 비장애인 이성애자 시스젠더(자신이 인식하는 성별과 사회가 지정한 성별이 같은 사람) 성인 남성'이 아닌 캐릭터를, 그 캐릭터가 펼쳐나갈 수 있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상상해 보는 거다. 벌써 새로운 이야기가 샘솟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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