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ol.25 2022 Autumn

    콘텐츠, 너나들이

N Story 4

다양성의 시대, 포용으로 나아가기

백현지(영화연구자)

  • n4_1 © shutterstock
  • 다양성과 포용성은 정치, 경제, 문화 전 분야에 걸친 세계적 화두이다. 신자유주의 질서의 가속화와 팬데믹의 결정타 이후 산업적, 경제적 성장이 한계에 부딪히게 되자 다양성과 포용성 증진에 대한 요구는 더욱 높아졌다. 이에 반해 국내 콘텐츠산업에서 관련된 논의는 아직 초입 단계에 놓여있다. 3년여의 팬데믹을 지나오며 그간의 성과마저도 퇴보하는 것이 아닌지 위험 신호가 감지되는 가운데, 다양성 증진을 위한 노력과 실천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다양성 후퇴의 신호

  • 코로나19 대유행 3년째로 접어들며 대표적인 콘텐츠산업인 영화 매체에도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극장을 찾는 대신 OTT와 같은 온라인 플랫폼으로 영화를 관람하는 일이 빈번해진 것이다. 넷플릭스, 애플TV, 디즈니플러스 등의 글로벌 기업뿐만 아니라 왓챠, 티빙, 웨이브 등의 토종 업체까지 진출해 있는 국내 OTT 플랫폼 시장은 꾸준한 활기를 이어가고 있다.

    이와 같은 미디어 플랫폼의 다원화는 한국 영화산업의 위축과 긴밀하게 맞물린다. 극장을 찾는 관객이 줄어들자 대규모 제작비가 투입되는 장편 상업영화의 개봉 편수가 감소했다. 한편, 극장 개봉을 포기하고 OTT로 직행하는 작품이 등장했다는 것은 한국 영화산업의 규모와 수익성이 크게 축소했다는 점을 확인해준다. 그런데 OTT 플랫폼의 유행과 맞물린 한국 영화산업의 위기는 비단 양적인 축소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니다. 조금 더 면밀히 들여다보면 한국영화가 다루는 내용에서도 질적인 변화가 관찰된다.

  • n4_2 출처 : 영화진흥위원회(2022), 한국 영화산업 성인지 통계
  • 올해 초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팬데믹 이후 수익을 고려하는 상업영화에서 성별균형, 성인지 감수성, 다양성과 관련된 지표들이 일부 퇴행하는 듯한 징후가 포착됐다. 여성 감독과 여성 주연 영화가 눈에 띄게 줄었고 성소수자와 장애인, 다양한 인종·종족·국적의 정체성을 가진 캐릭터의 가시성과 스테레오타입 재현 여부 등을 조사하는 '다양성 테스트'에서 최근 5년간 가장 낮은 점수를 기록한 것이다.1) 물론 이러한 결과가 팬데믹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한 일시적 현상인지는 향후 몇 년을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양극화의 심화, 다양성 인식 부재 등은 그간의 풍요로운 양적 성장 속에서도 꾸준히 지적되어 왔던 한국 영화산업의 고착화된 문제들이며,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그 위기가 극적으로 앞당겨진 것이라는 내부적 분석이 지배적이다.

다양성 논의의 현재

  • n4_4 2021 넷플릭스 포용성 보고서 ‘포용의 유산 구축’ © 넷플릭스
  • 한국 영화의 이 같은 통계 결과와는 다르게 세계 미디어산업은 이미 다양성의 가치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흐름을 형성해가고 있다. 대표적인 글로벌 OTT 플랫폼인 넷플릭스는 지난해 USC 아넨버그 포용연구소와 함께 '다양성 보고서'를 발간하여 넷플릭스 내부 인력의 다양한 구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넷플릭스가 제작한 콘텐츠를 대상으로 다양성의 정도를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영국의 경우에는 영화진흥기구인 영국영화협회에서 '다양성 표준(Diversity Standard)'을 수립하여 영화산업 전반에 적용하고 있으며, 2016년에는 '다양성 및 포용 전략(Diversity and Inclusion Strategy)'을 새롭게 세워, 협회에서 운영하는 모든 공적기금 지원 선정작의 핵심창작자 구성이 여성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종, 섹슈얼리티,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인구비례에 맞게 적절하게 대표될 수 있도록 보장되어야 한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이외에도 미국, 스웨덴, 호주, 프랑스 등에서 민간이나 국가 기관의 주도로 영화계 성평등 실현과 다양성 증진을 위한 논의와 정책들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2)

    다만 여전히 국내의 미디어 다양성과 관련된 논의는 초입 단계에 놓여있다. 방송산업을 살펴보면, 방송통신위원회는 미디어다양성위원회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미디어 다양성 지표를 개발하고 이에 따른 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연구를 진행해 왔다.3) 해당 보고서에는 방송산업 내 핵심 의제인 사업자 주체의 다양성 이외에도 포맷과 장르의 다양성, 그리고 내용 차원에서의 다양한 정체성의 재현 여부 등을 다루고 있다. 방송계는 이 같은 기초연구를 통해 미디어 다양성 현황을 파악하고, 관련 지표를 개발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으나, 논의의 초점이 매체 소유주의 다양성에 맞춰져 있어 문화 다양성 증진 차원에서는 다소 한계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게임산업 역시 다양성과 포용성에 갖는 관심이 크지만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게임 업계에서는 게임의 사회적 영향력을 인식하고, 경영 전략 가운데 하나로 내부 인력 구성, 콘텐츠 내용 차원에서 다양성 확보를 강조하고 나섰다.4) 하지만 포괄적인 합의에 이르렀을 뿐 이 역시 창작자 구성이나 내용의 다양성과 관련된 구체적 지표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은 상황이다.

다양성 지표의 필요성

  • 그렇다면 제도적 차원에서 다양성과 포용성을 증진하기 위해 우선되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가장 먼저 실행되어야 할 일은 다양성 지표를 개발하여 산업 내 현황을 파악하는 것이다. 영화산업을 비롯해 콘텐츠산업 전반은 그동안 산업적, 경제적 측면의 양적 성장에 치중해왔고, 그 결과 구조적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더욱 내실 있는 산업의 재구조화를 위해 산업적, 경제적 가치를 측정하는 척도만이 아니라, 다양성과 포용성을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마련되어야 한다. 다양성 지표로 구성된 통계는 콘텐츠산업 내 포용 정도를 파악하게 하는 자료로서, 추후 다양성 지수 도입과 같은 제도 마련에 기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n4_3 출처 : 영화진흥위원회(2022), 한국 영화산업 성인지 통계
  • 나아가 이러한 다양성 지표에는 내용과 관련된 항목만이 아니라, 다양한 정체성을 포함하는 창작 인력 구성에 대한 항목 역시 포함되어야 한다. 창작자 인력 구성의 다양성은 내용의 다양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례로, 한국영화에서 여성 감독과 여성 주연의 비율이 가장 높았던 2016년은 영화계 대표적 성평등 지표인 '벡델 테스트'의 통과 비율과 다양성 테스트 점수가 높았고, 스테레오타입 테스트 지수가 가장 낮은 해였다. 이러한 결과는 카메라 뒤 결정권자의 다양한 인적 구성이 카메라 앞의 다양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준다.5)

    국내 콘텐츠산업 전반에서 다양성과 포용성 증진에 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실제 다양성 지표 개발과 관련된 구체적 논의가 진행 중인 분야도 있다. 특히 영화계에서는 성평등 실현과 관련된 연구와 정책을 토대로 하여 점진적으로 다양성 확대로까지 의제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현재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과 영화진흥위원회가 공동으로 진행 중인 포용성 지수 개발 및 정책 제안 연구가 대표적 실천 가운데 하나이다.6) 해당 연구는 한국영화의 지역, 인종·종족·국적, 계급의 다양성, 성소수자, 장애인의 가시성을 파악하고 이들에 대한 재현양상을 조사·분석하는 동시에 업계 종사자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포용성 지수 도입 등 한국 영화산업에 적합한 포용 정책을 제안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한다.

  • n4_6 © shutterstock
  • 한편에서는 이 같은 다양성 지표 개발, 포용성 지수 도입 등의 제도적 실천과 관련하여 문제 제기가 있어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특정 집단에 혜택을 주기 위한 조치가 아니라, 산업의 건강한 성장을 도모하기 위한 것임을 주지해야 한다. 영화진흥위원회 내 지원사업에서 여성창작자에게 가산점을 부여하는 성평등 지수 도입만 하더라도 역차별이라는 반발이 있어 왔다. 그러나 이는 해외 영화산업에서 공통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제도이며, 무엇보다 구조적으로 고착화된 불평등을 시정하여 궁극적으로는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꼭 필요한 정책적 개입이다.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기업이 다양한 인적 구성과 콘텐츠 생산에 노력을 기울이는 이유 역시 서비스의 경쟁력 확보와 무관하지 않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히어로물이 최근 여성 캐릭터와 여성 서사를 개발하는 사례 또한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다양한 수용자 포용하기

  • 마지막으로 콘텐츠가 최종 도달하는 수용의 측면에서 다양성과 포용성 증진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한다. 다원화된 미디어 플랫폼 시대이지만, 누구에게나 동등한 접근성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이, 지역, 장애 여부에 따라 콘텐츠 이용에 제약을 받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특히 시각·청각 장애인이 영상 미디어를 시청하기 위해서는 자막/더빙, 화면해설 서비스가 필수적이지만 국내에서 해당 서비스는 실시간으로 제공되는 장애인방송 이외 매우 미비한 수준이다. 개봉 영화의 경우 한국농아인협회와 함께 '가치봄'이라는 한국영화 한글자막화면해설 상영서비스를 운영하고는 있으나 상영관, 횟수 등이 매우 제한적이다.

  • n4_4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 넷플릭스
  • n4_5
  • 넷플릭스는 이미 다수의 콘텐츠에서 더빙, 한글 자막, 청각 장애인 및 시각 장애인을 위한 해설자막/음성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해외 주요국 또한 원어, 더빙, 자막 등 언어를 선택해 미디어를 시청할 수 있도록 의무화하는 정책을 펼치며 '배리어프리(barrier-free)'에 앞장서고 있다. 미국의 '21세기통신영상접근법', 영국의 '디지털경제법2017', 독일의 '방송과 텔레미디어에 관한 주간협약'이 대표적이다.

    국내에서도 시청 취약 계층을 위한 미디어 접근성 개선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어 왔으며, 관련 법 논의도 진행 중인 상황이다. 팬데믹 이후 산재한 해결 과제들에 묻히지 않도록 지속적인 관심을 갖는 일이 중요해 보인다. 다양한 수용자 포용을 통해 새로운 관객층의 유입을 기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서비스나 콘텐츠 개발의 기회를 확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청 취약 계층의 미디어 접근성 개선은 기본권 보장과 관련된 문제인 동시에 소외 없는 문화적 향유라는 평등 가치 실현을 위한 조치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2015년, UN총회에서는 극심한 양극화, 불평등의 문제를 초래해온 신자유주의 체제 하의 경제 중심 성장에서 탈피하여 '지속가능발전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라는 공동의 목표에 합의하였다. 이 지속가능발전목표의 슬로건은 '단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는 것(Leave no one behind)'이다. 특정 집단을 배제하고서는 양질의 성장을 이뤄낼 수 없음은 이제 시대적 명제가 되었다. 다양성과 포용성 증진은 콘텐츠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반드시 이뤄내야 할 과제이다. 창작자, 내용, 수용의 측면을 다각도로 고려한 지표 개발 등 다양성 증진을 위한 현안들이 조속히 논의되고 진전을 이루어 국내 콘텐츠산업이 그야말로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어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 1)
  • 조혜영 외(2021). 『2021 한국 영화산업 성인지 통계』, 영화진흥위원회, 2~37쪽.
  • 2)
  • 김선아(2022). 영화산업 다양성 정책 현황 및 발전 방향에 관한 연구.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22권 6호, 253쪽.
  • 3)
  • 정보통신정책연구원 홈페이지. https://www.kisdi.re.kr/report/list.do?key=m2101113024770&arrMasterId=3934580
  • 4)
  • 한국콘텐츠진흥원 홈페이지. 글로벌 게임산업 트렌드 (2021년 7+8월호), https://www.kocca.kr/kocca/bbs/list/B0000143.do?menuNo=204150
  • 5)
  • 조혜영 외(2018). 『한국영화 성평등 정책 수립을 위한 연구』, 영화진흥위원회, 148쪽.
  • 6)
  • 김선아 외(2022). '(가)한국영화 포용성지수 개발 및 정책방안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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