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ol.26 2022 Winter

    콘텐츠의 범람

글로벌트렌드

2022년, 지금 미국 영화 시장은

홍수경 북미 주재원(영화진흥위원회)

2022년, 미국 박스오피스는 예상치 못한 영화들이 흥행하며 극장 실험의 마당이 되고 있다. 미국의 '극장 영화'는 OTT 스트리밍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어떻게 지속 가능한 정체성을 구축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을까.

몰입을 위한 공간

  • trend1 © Apple TV+
  • 극장은 수백만의 사람들이 정해진 시간 동안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공간이다. 스트리밍 플랫폼이 발달하면서 극장을 찾던 관객들은 나 홀로 편히 영화를 즐기는 환경에 적응해갔다. 예상치 못한 타인의 방해를 견딜 필요도 없고, 한 편의 영화를 원하는 만큼 나눠볼 수 있으니 이보다 편할 수 없다.

    그러나 <탑건: 매버릭>이 개봉하면서 극장 영화에 대한 호감이 돌아왔다. 2년이나 개봉이 지연된 36년 만의 속편은 액션 영화뿐 아니라 극장 영화를 재정의했다. 130분 동안 톰 크루즈가 펼치는 전투기 액션 드라마를 즐긴 관객들은 입을 모아 "이것이 바로 영화"라고 외쳤다. 평단은 "모든 미국 극장이 애타게 찾던 영화"라 평을 하며 관람을 부추겼다.

    수많은 사람이 집 밖으로 나와 기꺼이 극장에서 '바로 영화'를 감상했고, 그 결과 지난 10월 기준 <탑건: 매버릭>은 2022년 세계 최고 흥행작이자, 역대 미국 박스오피스 5위 영화가 되었다. '바로 영화'라는 찬사에는 극장에서 꼭 봐야 하는 콘텐츠라는 공간적 특성이 포함되어 있다. 극장은 아무리 산만한 관객도 2시간 동안 몰입을 가능케 하는 공간이다. 팬데믹 동안 '구독자(subscriber)'로 명명되었던 이들은 그간 불가능했던 집단적 몰입을 경험하며 영화 관객(audience)으로 돌아왔다.

    액션 영화와 함께 호러 영화도 극장에서 봐야 하는 독보적인 장르로 부상했다. 9월에 개봉한 저예산 호러 영화 <스마일>은 35세 미만 관객층을 극장에 불러들이며 한 달이 넘도록 꾸준한 흥행을 기록하고 있다. 상영 중 관객이 구토를 해서 유명해진 초저예산 슬래셔 호러 영화 <테리파이어2>도 박스오피스 10위권 내에 진입했다. <블랙폰>, <바바리안>, <인비테이션>, <할로윈 엔드> 모두 하반기 박스오피스에서 상위권을 차지했던 영화들이다.

    <스마일>의 배급 담당자는 CNN을 통해 관객의 '공동으로 몰입하는 경험'에 대한 욕구가 흥행 성공의 비결 중 하나라고 말했다. 무서운 장면이 수시로 등장하는 호러 영화를 수많은 사람이 함께 보면 서로의 반응을 즐기는 축제의 장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스트리밍 서비스로는 체험하기 힘든 입체적 경험이다. CNN 기자는 이런 호러 영화를 두고 "스트리밍 혁명에 대한 면역력을 보여준다"고 표현했다. 모든 장르가 스트리밍 서비스로 흡수되고 있는 가운데 유독 호러 영화만 극장에서 더 강한 생명력을 보이고 있으니 '면역력'이란 말이 과장이 아닌 셈이다.

예술을 즐기는 MZ세대

  • trend2 © A24
  • 올해를 대표하는 블록버스터가 <탑건: 매버릭>이라면 독립영화계 주인공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다. 올해초 SXSW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미국 젊은 세대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일명 '스페셜티(specialty)' 영화라고 부르는 독립 예술 영화가 젊은 세대의 아이디어를 대표하는 콘텐츠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예술영화 주 관객층이 20~30대인 한국과 달리 미국의 소비층은 중장년 및 노년층이다. 그런데 이 고정 관객들이 팬데믹 기간 건강을 염려하며 극장 방문을 멈췄다. 이렇게 예술영화관이 사라지는 건가 싶은 순간, MZ세대와 함께 극장을 구원한 영화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였다. 영화를 배급한 A24는 <문라이트>, <레이디 버드>, <미드소마>, <언컷 젬스>, <미나리> 등을 통해 젊은 관객을 타깃으로 한 힙한 독립 영화를 선보여온 배급사였고,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박스오피스와 명성에서 정점에 올랐다.

    사실 예술영화에 대한 젊은 세대의 관심은 <기생충> 때부터 감지되었던 경향이다. Z세대가 관객으로 합류하면서 <기생충> 흥행이 가속화되었기에, <기생충>은 외국어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전 세대를 끌어들인 전설의 작품이 되었다. 이들은 '로튼토마토닷컴'이나 'IMDB' 평점을 참고하는 대신 '레터박스트(letterboxed)'라는 영화 전문 소셜 네트워크에서 소통한다. 나아가 스트리밍 서비스의 알고리즘에 얽매이지 않고, 정체성과 환경, 불평등에 관한 가치를 논하는 영화를 소비하는 데 적극적인 특성을 보인다.

    스페셜티 시장은 이 젊은 시네필로부터 틈새시장을 발견했다. <헤어질 결심>의 미국 배급사 '뮤비'도 이 틈새시장을 주도하고자 하는 회사다. '뮤비'는 비영어권 예술영화 스트리밍 서비스를 구독하면, '뮤비-고' 앱을 통해 한 주에 한 편 예술영화를 극장에서 감상할 수 있게 했다. 스트리밍과 극장을 함께 엮는 구독 서비스로 예술영화관이 대거 위치한 대도시 영화 팬이 대상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점차 예술영화가 젊은 관객 대상 시장으로 조정되면서 예술영화 또한 젊은 감성을 지니기 시작했다. 현재 예측이 오가는 내년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영화상 후보들만 봐도 예년과 사뭇 다른 에너지를 전달할 조짐이 보인다.

더 다양해진 영화들

  • trend3 © Disney+, Netflix
  • 이렇듯 포스트 코로나 이후 극장가에 활기가 돌아오고 있지만, 공급량은 현저히 감소했다. 특히 미국 극장가는 여름 시장 이후 유례없는 '가뭄'을 겪었다. 말 그대로 극장에서 상영할 영화가 부족했다. 가장 큰 이유는 제작 영화의 30% 이상이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훌루의 <프레이>와 디즈니플러스의 <호커스 포커스 2>는 극장 개봉을 건너뛰고 스트리밍으로 공개되어 각 플랫폼에서 인기 순위 1등을 차지했다. <어벤져스> 시리즈 감독으로 유명한 루소 형제는 넷플릭스와 계약을 맺고 <익스트랙션>, <그레이 맨> 등의 액션 영화를 제작하며 넷플릭스 순위를 독식 중이다.

    2억 달러 이상의 예산이 소요된 블록버스터가 극장을 거치지 않고 OTT를 통해 공개되는 일 또한 빈번해졌다. <탑건: 매버릭>이 그렇게 오랫동안 극장에서 상영될 수 있었던 이유도, 독립 영화가 예전보다 극장 노출이 쉬워진 이유도, 메이저 스튜디오 영화의 극장 공급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블록버스터가 아닌 재개봉한 <E.T.>나 데이빗 보위를 다룬 독립 다큐멘터리 <문에이지 데이드림>같은 영화가 아이맥스 상영관을 독식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공급량은 부족해도 영화는 전례없이 다양하다는 점이다. 이제는 업계에서 누구도 '유색 인종이 주연을 맡은 영화는 장사가 되지 않는다'는 무례한 말을 건네지 않는다. 바이올라 데이비스가 주연한 액션 영화 <더 우먼 킹>과 조던 필 감독의 <놉>, 양자경 주연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비백인 주연 영화로서 흥행에 성공했다. 최초의 메이저 LGBTQ 로맨틱 코미디 <브로스>가 호평을 받았고, 숨은 흑인 영웅을 다룬 <틸>이 꽤 관객을 모으며 오스카 레이스 선두에 서 있다.

    연말 시즌 최고 흥행이 기대되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와 <아바타: 물의 길> 또한 유색 인종의 역사와 문화에 기반한 영화들이다. 다양성이 단순한 구호가 아닌 기본 정신으로서 대중 영화에 녹아든다. 이런 분위기는 한국 영화엔 더할 나위 없는 기회를 제공한다. 타 국적 영화도 다양성으로 포용되고 미국의 유명한 엔터테인먼트 시상식에서 후보에 오르는 상황이 빈번해졌다. 미국의 극장은 더 이상 미국 영화만의 무대가 아니며, 세계의 영화가 동등하게 주목받는 플랫폼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극장의 재정립

  • trend4 © Shutterstock
  • 극장은 감각을 극대화하고 타인과 긴장을 공유하는 몰입의 공간이자, 품질이 보증된 다양한 영화가 상영되는 전시장으로 신뢰를 얻었다. 그리고 젊은 관객이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새로이 재정립되고 있다. 극장은 때론 롤러코스터나 유령의 집 같은 테마파크의 한 공간으로, 때론 예술의 미학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관으로 변모한다. 그를 경유한 관람 경험은 같은 감각을 공유하는 영화 애호가 커뮤니티로 이어지기도 하고, 새로운 팬을 유입하는 매력적인 요소가 되기도 한다. 이제 극장은 콘텐츠의 재미가 '극장 경험'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며, 스트리밍 서비스가 주지 못하는 경험과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자체 콘텐츠 시장을 구축하고 있다. 극장과 배급사는 이 시간 OTT의 알고리즘이 전달하지 못하는 틈새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이다.

    지난 2년, 길고 지난했던 팬데믹 동안 미국의 극장은 어쩌면 하나의 돌파구를 찾은 것일지도 모른다. 공급 부족의 완화로 더 많은 블록버스터와 예술영화가 극장 개봉을 앞둔 요즘, 몰입의 경험과 팬 커뮤니티를 창출해낼 수 있는 영화에 대한 환대는 계속될 것 같으니 말이다. 또 한편으로 올해 영화계는 스트리밍 서비스에 의존하기보다 극장 개봉을 병행해야 수익에 도움이 된다는 소중한 교훈을 얻었으리라 생각한다.

    극장이라는 공간은 지금껏 수많은 환경 변화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며 우리 곁을 지켜왔다. 2022년은 더 다양한 영화를, 더 많은 사람과 장벽 없이 만날 수 있게 되는 변화의 계기가 되었고, 극장은 또 한 번 새로운 역할을 정립하며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2023년, 어떤 영화들이 우리를 설레게 하고 또 어떤 모습으로 극장이 변화해갈지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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