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ol.26 2022 Winter

    하늘에서 콘텐츠가 비처럼 내려와

핫트렌드 1

유행의 회전목마를 탄 '샘플링'

이종민 대중음악평론가

  • hot1_img1 © 스타쉽 엔터테인먼트, YG 엔터테인먼트
  • 2022년 9월 음원 차트에서 흥미로운 일이 발생했다. 한 달 차이로 발표된 아이브의 'After LIKE'와 블랙핑크의 'Shut Down'이 모두 샘플링을 도입하며 차트 상위권을 차지한 것이다. 샘플링을 사용한 인기곡이 탄생한 건 처음은 아니지만, 두 개의 대형 걸그룹이 비슷한 시기에 같은 선택을 했다는 건 꽤 드문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을 계획적이라고 바라보기보단, '유행의 흐름에 맞춘 우연의 일치'라고 보는 게 더 자연스럽다. 이미 2022년 기준으로 레드벨벳은 'Feel My Rhythm'에서 바흐의 'G 선상의 아리아'를 가져오며 앞선 움직임을 선보인 바가 있다. 어떻게 보면, 클래식 곡과 대중음악 샘플링에 기대는 방식이 K-Pop 유행의 또 다른 공식으로 비치는 상황이기도 하다.

샘플링, 도대체 뭐길래?

  • 그렇다면 샘플링은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렇게 대형 기획사들이 초점을 맞춘 걸까. 일단 미국에선 커버(Cover)로 불리기도 하는 리메이크(Remake)와 구분하면 쉽다. 리메이크는 원곡의 처음부터 끝을 모두 재해석하는 방식이다. 직접적인 예로 MBC 예능 <나는 가수다>에서 경연에 쓰인 곡들과 빅뱅의 '붉은노을'(2008)을 들 수 있다. 한편 샘플링은 원곡의 특정 부분만 추려 새로운 곡에 덧붙이는 방법이다. 파가니니의 'La Campanella'를 빌린 'Shut Down'과 글로리아 게이너의 'I Will Survive'(1978)을 후렴에 쓴 'After LIKE'는 리메이크가 아닌 샘플링 기법을 활용한 것이다.

  • hot1_img2 © MBC
  • 물론 이런 시도가 국내 최초는 아니다. 샘플링 열풍이 처음으로 불어오고 있는 것도 더더욱 아니다. 베토벤의 가곡 'Ich Liebe Dich'를 샘플링한 신승훈의 '보이지 않는 사랑'(1991)은 약 30년 전에 가요계에 등장한 바 있다. 이후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 제2악장'을 다룬 이현우의 '헤어진 다음날'(1997), 이승철의 '비애'를 감각적으로 해석한 조PD의 '비애'(1999)를 통해 샘플링은 음악계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 방식은 신화의 'T.O.P.'(1999), 비의 '태양을 피하는 방법'(2003), 아이비의 '유혹의 소나타'(2007), 최근엔 악동뮤지션의 '오랜 날 오랜 밤'(2017)까지 꾸준하게 사용되었다. 이 중 국내에서 샘플링으로 가장 성공한 곡을 뽑자면 '헤어진 다음날', 'T.O.P.', '태양을 피하는 방법' 등이 선두로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샘플링도 변화한다

  • 샘플링도 크게 두 가지 선택이 있다. 하나는 국내 가수들이 주로 쓰는 클래식, 또 다른 하나는 래퍼들이 자주 쓰는 대중음악이다. 과거 느린 템포의 곡에선 클래식이 주로 선호되는 경향이 있었다. 힙합에선 샘플링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주된 작법 중 하나이기에 유명했던 해외곡을 자주 사용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랩송인 드렁큰 타이거의 '난 널 원해', 다이나믹 듀오의 'Ring My Bell' 모두 스타일리스틱스의 'Love Is the Answer'(1974)와 애니타 워드의 'Ring My Bell'(1979)을 샘플링 했다. 그러나 다양한 장르의 속성이 합쳐진 변주 방식이 케이팝의 보편적 편곡으로 자리 잡으면서 현재는 샘플링 선택의 경계가 무의미해진 상태다.

  • hot1_img3 © FL STUDIO
  • 이는 곧 매년, 꾸준히 유명 노래를 샘플링한 곡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는 얘기인데, 이를 통해 뮤지션이 얻는 것은 양날의 검과 같다. 샘플링에 기대면 순수 창작물보다 익숙한 멜로디를 동반해 대중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사람은 새로운 노래보다 익숙한 음악을 더 반기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흥행 가능성이 커지나, 이렇게 성공하면 후속작이 문제가 된다. 유명했던 멜로디 라인에 맞먹는 창작 멜로디를 만드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샘플링을 통해 차트 1위에 오른 뒤, 그만한 후속작을 못 내 과거의 영광만 좇게 되는 가수들이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샘플링 도입이 잦아진 건 노래 제작 방식이 바뀌게 된 탓이 크다. 과거엔 악기를 통해 독창적인 기타 리프 또는 멜로디 라인을 만들고 거기에 여러 악기의 소리를 덧붙이는 방식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인터넷을 통해 작곡가가 샘플링 소스를 직접 사거나 승인받은 뒤, 여러 샘플링을 PC에서 오리고 조립하여 하나의 곡을 완성하는 시대가 됐다. 덕분에 작곡가들 사이에서 샘플링을 사용하는 건, 마치 건반을 치고 기타를 치듯이 당연한 방식이 되고 말았다. 평소 우리는 여러 케이팝 곡을 접하게 되지만, 몇 곡을 자세히 듣다 보면 각기 다른 작곡가들이 쓴 곡임에도 같은 샘플링을 쓴 걸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샘플링 없이는 살 수 없는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샘플링, 저작권은?

  • 이렇게 샘플링 시장이 커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샘플링 사용에 대한 저작권도 수면에 오를 수밖에 없다. 일단 음악 창작물은 저작자 사후 70년까지 저작권 보호받게 된다. 베토벤, 바흐 등 우리가 아는 클래식 대가들은 세상을 떠난 지 100년도 넘었기 때문에 영리 목적으로 사용해도 상관없다. 문제는 대중음악이다. 기본적으로 적합한 절차는 원곡자의 사전 동의를 얻고 진행하는 것이다. 전문 표현으로는 '샘플 클리어런스'라고도 하는데, 종종 원작자가 금전적 요구를 하는 경우도 발생하거나 여러 이유로 샘플링 사용을 불허할 때도 있다. 이럴 경우 창작자는 다른 샘플링 곡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 hot1_img3 마돈나의 'Vogue' 뮤직 비디오 © The Mirror
  • 샘플링 사용을 사전 동의 없이 사용하는 경우 표절과 비슷한 상황이 연출된다. 원작자가 사용자에게 법적인 대응을 하는 경우다. 다행히 대한민국에선 아직 샘플링과 관련된 법적 다툼이 일어나진 않았지만, 미국에선 종종 발생하여 판례를 남기고 있다. 래퍼 드레이크는 'Pound Cake/Paris Morton Music 2'(2013)에서 오르간 연주자 지미 스미스의 목소리를 도입부에 썼고, 마돈나의 'Vogue'(1990) 역시 샐소울 오케스트라의 'Chicago Bus Stop'(1975)의 오케스트라 세션 소리를 넣었다고 하여 고소당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미국 법원은 곡마다 샘플링이 쓰인 사용 시간과 상업적 영향이 미미하다는 이유로 샘플링을 사용한 뮤지션들에게 손을 들어줬다. 잦은 경우는 아니지만, 확실히 샘플링에 대한 법률적 기준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아직 확실한 가이드가 없는 게 사실이다.

돌고 도는 K-Pop 세상

  • 음악 제작에서 어떤 방식이 더 좋고 나쁜지는 감히 판단할 수 없다. 한때는 SG워너비를 필두로 소몰이 창법이 유행했고, 원더걸스의 'Tell Me'(2007)와 함께 원 코드 방식이 한국을 들썩였다. 대중음악엔 늘 트렌드라는 게 존재하고, 현재의 샘플링 방식 역시 이 흐름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재밌는 건, 장르적으로 더는 새로운 게 나오기 어려운 시점에서 음악의 흐름이 마치 패션처럼 돌고 돈다는 것이다. 1990년대 유행했던 통 넓은 바지와 스트리트 패션이 다시 유행의 중심에 선 것처럼, 이현우와 신화, 비를 통해 맞이했던 샘플링 시대를 우리는 20년이 지나 다시 마주하고 있다. 향후 전 세계 대중음악의 방향성이 조심스럽게 예측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