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ol.26 2022 Winter

    하늘에서 콘텐츠가 비처럼 내려와

N Story 3

게임으로 쉬어가는 사람들

김영진 교수(청강문화산업대학교 게임콘텐츠스쿨)

콘텐츠를 통한 힐링

  • n3_1 minutt for minutt © NRK
  • 2009년 11월 NRK(노르웨이방송공사)에서 방송된 한 프로그램은 세계적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베르겐에서 오슬로까지의 일곱 시간 기차 여행을 네 대의 카메라를 사용하여 보여준 이 방송은 몇몇 인터뷰 내용을 제외하고는 말 그대로 기차 안팎의 풍경만을 일곱 시간 내내 그대로 보여줄 뿐이었지만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고, 이른바 '슬로우 콘텐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크게 높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치열한 경쟁이 일어나고 있는 유튜브에서 불멍 영상이나 빗소리 영상 등이 상당한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는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큰 인기를 얻었고 지금까지도 다양한 변주가 지속되고 있는 '삼시세끼'나 '윤식당' 부류의 콘텐츠 또한 광범위한 의미에서는 이러한 슬로우 콘텐츠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우리나라 청년층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절반이 넘는 응답자가 "인생 역전 성공 신화보다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담은 콘텐츠를 선호한다"는 답변을 보여준 점은 세대를 뛰어넘는 슬로우 콘텐츠의 인기를 실감하게 해준다.

    하루하루 치열하게 출근하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슬로우 콘텐츠는 힐링을 갈구하는 정서적 탈출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유로운 마음으로 자연이나 좋아하는 대상과 교감하는 순간이야말로 많은 이들이 궁극적으로 선망하는 '전통적인' 힐링의 순간이자 휴식의 형태일테지만, 뷰 좋은 캠핑장을 찾는 차박은커녕 주말마다 인산인해를 이루는 단풍 관광객의 일원이 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평범한 직장인에게는 콘텐츠를 통한 휴식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개인의 취향을 바탕으로 언제 어디서든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는 게임 기반의 가상 공간은 현대인의 힐링을 위한 새로운 대안 공간으로 빠르게 부상하고 있다.

온라인 세상에서 마주하는 나만의 휴식

  • n3_2 게임 <히트2>의 '보주 클래스' 캐릭터 © 넥슨
  • 사실 힐링이라는 용어는 게임 속에서 흔하게 통용되는 단어이다. MMORPG에서 본인이 선택한 직업을 바탕으로 몬스터나 외계 괴물체 등과 대항해 싸우며 입게 되는 부상이나 상처를 치유해주는 과정이 바로 '힐링'이고, 심지어는 이를 주로 행하는 캐릭터 직업군인 '힐러'가 별도로 존재하기까지 한다.

    따지고 보면 힐링이란 과정은 시각과 청각, 후각과 미각 등을 통해 얻어지는 경험을 통해 마음과 뇌 속 깊은 곳에 숨겨진 그 무엇인가를 움직여주는 교감 작업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게임을 비롯한 새로운 디지털콘텐츠들은 이러한 교감의 영역을 현실 세계에서 가상의 영역으로까지 확장해 준다는 데서 향후 큰 발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실제로 게임이 여가문화에서 확장되어 일상생활의 일부가 된 MZ세대는 물론, 인터넷 시대를 거쳐 40~50대를 맞이한 중장년층에게 있어서도 게임은 나만을 위한 핵심적인 휴식 콘텐츠가 된 지 오래다. 지친 하루를 마감하고 퇴근하는 지하철이나 버스 속에서 이어폰을 끼고 끝없이 반복되는 단순한 게임 플레이를 즐기는 것만으로도 현실의 고민 속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소시민의 휴식처가 된 것이다.

  • n3_2 게임 <오버워치 2>와 <모여봐요 동물의 숲> © 블리자드, 닌텐도
  • 지금, 이 순간 어떤 이는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의 권태로움을 3D 리얼타임 렌더링을 기반으로 펼쳐지는 격렬한 전장 속에서 FPS나 AOS 게임을 통해 해소하고, 어떤 이는 정신없고 분주한 일상생활의 피로를 아기자기한 2D 그래픽으로 구성된 한적한 동화 속 마을에서 동물들과 대화를 나누며 풀기도 한다. 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내 집 한 칸의 아쉬움을 도시 경영 시뮬레이션 게임을 통해 해소하기도 하고, 온라인 아바타를 통해 선망하는 이상형과 즐거운 데이트를 즐기거나 호사로운 취미생활을 누리기도 한다.

    오직 하나만이 존재하는 현실 세상과는 달리 무한대로 생성되고 개인화되는 게임 속 '사이버 스페이스'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개성이나 취향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무한의 다양성과 확장성을 가지고 있다.

게임 산업계에 불어오는 변화

  • 하지만, 역설적으로 게임을 비롯한 음악과 웹툰, 웹소설, 영화, 드라마 등의 콘텐츠 소비 형태는 최근 집단 동조화 특성을 보인다. 본래의 콘텐츠 외에도 마케팅 목적으로 콘텐츠를 소개 또는 소비하는 2차, 3차 파생 콘텐츠가 시장의 신주류로 부상하고 있으며, 이른바 '대세 콘텐츠'를 피상적으로라도 경험해야 현실 세계에서의 사회적 대화가 가능해진다는 분위기로 인해 이용자가 지갑을 강제로 여는 일이 일상화되고 있다. 경쟁이 격화되고 있는 콘텐츠 시장에서 거대 자본의 힘이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인 콘텐츠 영역에서까지 소비 대열에서 이탈하면 안 된다는 문화 강박증을 확산시키고 있는 셈이다.

    국내 게임 개발사나 퍼블리셔 또한 수십 년째 아이템 기반의 획일화된 비즈니스 모델을 바탕으로 돈벌이가 되는 유사한 장르의 게임만을 양산하며 이용자들에게 일방적인 소비만을 강요해왔다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 <우마무스메> 유저들의 마차 시위나 게임 사전심의 관련 청원 움직임 등은 객체가 아닌 주체로써 게임 세상 속 본인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변화된 소비 형태의 변화를 투영하고 있다. 내가 비용과 시간을 투자함으로써 잠시의 여유를 만끽하는 만큼 온라인 세상에서라도 더 이상 부당한 대우를 참아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다.

    결국 콘텐츠의 본질적인 소비 주체가 개인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향후 변화될 시장에서는 개인별 성향과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한 콘텐츠의 질적 완성도가 결국 이용자의 선택을 좌우할 것이기에 그동안 시장만을 탓하며 콘텐츠 본질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했던 국내 게임 산업계 또한 변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 n3_4 게임 <Journey> © EPIC GAMES
  • 2012년 콘솔 게임으로 출시되어 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게임 <Journey>는 이용자에 대한 이해와 명확한 목표로 정성껏 만들어진 콘텐츠가 그 흔한 비즈니스 모델의 포장 없이도 상업적 성공과 감동을 동시에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기술 트렌드에 맞게 온라인 멀티 플레이를 지원하지만, 막상 다른 플레이어와는 제대로 된 말 한마디 나눌 수 없는 채로 광활한 사막 속에서 '동행자'로서 플레이할 뿐이다. 해당 게임은 '2013 그래미상'에 노미네이션되기까지 한 음악과, 뭉클함을 느끼게 해주는 그래픽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묵직한 게임 플레이를 통해 깊은 깨달음과 진정한 힐링을 선사한다.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 팬데믹을 겪으며 확장된 인류의 온라인 경험치는 이제 사이버 테라피나 온라인 힐링이 일상화된 세상을 한걸음 가깝게 만들어 주고 있다. 스마트폰이 필수품이 되고 메타버스라는 용어가 보편화되어가고 있는 지금, 온라인 세상 속 힐링 콘텐츠의 장르와 플랫폼은 세분화, 다양화될 것이고, 그 시장 또한 빠르게 성장할 것이다. 현실 속에서 얻지 못하는 위안을 찾아 AR 기반으로 가상의 반려동물을 키우거나 VR 속에 자신만을 위한 공간을 구축하고 휴식을 즐기는 세상의 도래가 멀지 않은 셈이다.

    최근 영화나 드라마 시장에서 히어로물이나 멀티버스, 시간여행에 대한 콘텐츠들이 얻고 있는 큰 인기는 결국 지역 분쟁, 참사, 환경오염 등으로 얼룩진 현실 세계에서의 고단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의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쟁과 규칙성에 매몰되어 현실에서 진정한 평온을 얻을 수 없는 현대인들이 자극적이고 현란한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벗어나 온라인 공간에서 진정한 자신만의 힐링을 찾아가는 움직임은 새로운 시대의 진정한 휴식의 비법이자 잃어버린 나를 되찾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

    생각해보자. 앞으로 현실 세계와 온라인 세계의 휴식은 어떤 차이가 있겠는가?
    아무쪼록 당신의 진정한 휴식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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