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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Issue 1

뉴미디어를 준비하는
방송국 프로듀서의 마음

글. 김한진(SBS 모비딕스튜디오 PD)

방송국 프로듀서에게 모바일 시장과 뉴미디어는 이전에 없던 기회의 땅이다. 길잡이도 없이 스스로만 믿고 나아가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이미 와버린 세상, 엎질러진 물이라면 도망치기보다 그안에서 헤엄치는 법을 배우는 게 낫지 않을까?

뉴미디어 콘텐츠의 기회와 새로운 시도

“무엇보다, 희망을 잃지 말라.”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속 생존 지침서의 내용이다. SBS의 작은 부서 ‘모비딕스튜디오’에서 근무한 지 올해로 3년이 되어 간다. 바쁜 생활 중 가끔 내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보면, 조그마한 구명보트를 타고 바다를 떠다니는 영화 속 주인공의 모습이 생각난다. 때론 몰아치는 태풍에 맞서도 보고, 때론 내 자의식과 싸우기도 하고, 때론 이름 모를 행선지를 향해 헤엄치기도 하고, 때론 자연이 만든 기적의 장관을 보기도 하면서 하루하루 두려움과 설렘 속에 살아가는 것이 아마도 2020년대 ‘방송국 모바일 부서 PD’들의 모습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시청률이 20%대를 상회하던 <런닝맨>(SBS), <정글의 법칙>(SBS) 등의 막내 조연출 시절, 큰 배의 선장과도 같았던 메인 PD 선배들이 블록버스터급 재미를 위해 수많은 크루들과 밤새 씨름하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반면, 2021년 나름(?) 메인 PD가 된 나의 고민은 생존을 위해 몇 안 되는 동승자들과 어떻게든 살아남아보려는 ‘파이’의 고민에 좀 더 가깝다. 망망대해를 헤엄치고 있지만, 시장은 디지털 플랫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미디어계의 메시지를 토대로 “희망을 잃지 않고” 다시 촬영장으로 향하고 있다.

머리글에 두려움의 심상이 많긴 하지만 사실 모바일 PD로서 살다보면 희망의 마음이 더 크다. 뉴미디어는 제작자에게 가슴 설레는 블루오션이다. 아이디어와 기획만 좋다면 PD들에게 기회가 많이 돌아오는 땅이기도 하다. 과거에 ‘과연 그게 될까?’라고 생각했던 기획안들이 디지털 세상에서는 큰 환영을 받고 있다.

디지털 문법의 대세인 숏폼 콘텐츠의 장점들을 꼽아보자면 기승전결이 꼭 필요하지 않다는 점, 하나의 뾰족함만 잘 발견하고 발전시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점, 프로그램 론칭에 있어서 절차가 많지 않아 가볍게 움직일 수 있다는 점 등 결론적으로 ‘한 번 해보지 뭐’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때론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기획안이나 막연히 재밌겠다고 생각되는 한 포인트가 있는 기획안이면, ‘한 번 찍어볼’ 수 있고, 그러다보면 의외의 ‘빅잼’이 터져서 바이럴이 생성될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이것저것 마구 찍어볼 수 있는 환경이란 것은 아니다…) 또한 콘텐츠의 구조를 처음에 잘 세워놓으면, 미디어 콘텐츠들의 특성상 팬들이 알아서 만들어주고 소통해주는, 신기로운 양육(?)의 과정을 관찰할 수 있다. 단순히 업로드 영상뿐 아니라 배포 전략, SNS 관리, 수익 및 제작비 구조 창출 등 관리할 일은 많아지지만 콘텐츠 내용의 확장은 더욱 쉽게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뉴미디어 정글에서 조금이라도 콘텐츠가 바이럴을 타면 TV에서와는 또 다른 짜릿함을 느낄 수 있다. ‘끼인 세대’라고 불렸던 필자 세대의 PD들이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게 되면서 오히려 누릴 수 있는 틈새시장의 즐거움이다. (비록 복어처럼 숨겨진 독이 있긴 하지만…)

“될까?” 했던 일이 이뤄낸 것

<제시의 쇼!터뷰>라는 콘텐츠는 필자의 PD 생활에 있어서 매우 의미가 큰 콘텐츠이다. 2019년 6월에 프롤로그와 함께 첫 업로드를 시작했다. 기획 당시 ‘제시’라는 인물이 자유분방하면서도 인생의 경험이 많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팬들과의 소통을 적극적으로 즐긴다는 점 등이 MZ세대를 타깃으로 하는 유튜브 정글에 맞을 것 같다는 의견을 작가가 던졌다. ‘과연 제시라는 인물이 토크쇼의 호스트를 맡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점과 불안함은 있었지만 그것 자체가 60분짜리 TV쇼에서는 못해 볼 시도였기 때문에 더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게 될까?’라는 아이템이 현실이 될 때, 그리고 그게 팬들에게 먹힐 때의 시너지는 상상했던 것보다 크고 짜릿했다. 뉴미디어 시장이 아니었으면 ‘운’이라고 표현되는 부분들마저 애초에 없었다고 본다.

모바일 시장에 대처하는 PD의 자세

18~24세들의 미디어 소비 및 또래 집단 간의 향유 방식은 확실히 TV를 통해 공통의 대세를 따르던 필자 세대 이상(3049세대)의 그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새로운 시대로의 적응을 위해서 어떤 것들은 버려야 하고 어떤 것들은 몸소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러한 변태의 과정은 두려움과 설렘을 동시에 수반한다. 콘텐츠가 ‘터지는 것’은 하늘의 뜻이지만 그 운을 잡기 위해서는 시장의 고객들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는 필수다. 비록 회사의 팀 내에서는 귀염둥이(?) 막내지만, 30대 중반의 머리로 지금의 1020세대들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더욱 더 유연함을 몸에 지니려고 노력한다. 누군가의 말을 잘 믿고 들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팔랑귀의 도박을 적은 제작비로 실험할 수 있는 곳, 그 곳이 뉴미디어 시장이다. 열악한 인프라와 적은 제작비의 고통은 있지만 매력적인 시장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수많은 플랫폼이 생겨나고 있는 시기, 새로운 장에 도전해야 하는 과도기의 시기에 살고 있다. 이를테면 뉴미디어 시장은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어드벤쳐형 정글이다.

다른 방송사의 모바일 PD님들을 많이 뵙진 못했지만 레거시 미디어에 있다가 모바일 부서로 오게 된 PD들의 힘든 부분은 비슷할 것이다. 확 줄어든 제작비와,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나가야 하는 인프라, 혼자서 해결해 나가야하는 일이 많다보니 밀려드는 외로움, 차가운 섭외 현실 등등 서러운 일도 많다. TV처럼 광고 수익이 큰 구조가 아니다보니, PD로서 재미도 중요하지만 수익성에 대한 압박을 많이 받게 되는 곳도 이 곳이다. 마케팅, 제작비 구조 등에 있어서 기존 방송 CP(Chief Producer, 책임연출가)로 있을 때보다 훨씬 디테일하게 접근할 수밖에 없다. TV에 비해 매우 적은 금액에도 목숨을 걸어야 하다보니 콘텐츠를 시작할 때 꿈에서 돈을 세는 때도 있었다. ‘분명히 미래에는 이 시장의 수익이 커질 것이다’라는 명제를 증명해내기 위해 많은 PD들은 오늘도 각개전투를 하고있을 터이다.

새로운 구조에 대해 공부하고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것은 매우 스트레스가 있는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도전’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이만큼 매력적인 곳도 없다. 분명 실패도 많지만, 누군가에게는 내 시도가 좋은 레퍼런스가 될 수 있기에 다양한 것을 시도해보고 있다. 그러한 경험들이 쌓여 다원화된 미디어 시장의 질서를 만들어 갈 것이다.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여겨졌던 말들이 이미 현실화가 되고 있고 변화의 보폭은 우리의 생각보다도 훨씬 크다. 지금의 힘든 과정들이 분명 변화하는 사회에 훌륭한 지팡이가 될 거라 믿는다.

‘엎질러진 물’에서 헤엄치는 법

“이미 일어난 일에 무슨 의미가 필요해요?” <라이프 오브 파이> 속 파이가 본인의 조난 스토리를 들려준 후 청자에게 던진 말이다. 미디어 업계의 패러다임 전환은 이미 상당부분 진행되었다. 이미 일어난 일들은 그냥 닥칠 때마다 하나씩 풀어나가며 노하우를 쌓아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명확한 명제 자체를 만들어내기 어려운 미디어 생태계가 되었다. 전문가의 분석보다 더 명확한 것은 SNS에서 활동하는 MZ세대들의 반응이다. 그리고 그러한 반응들은 단선적인 의미 정리가 불가능하다. 줄여서 말하자면, 모바일 왕국에서 무조건 대박으로 이어지는 성공 공식이란 건 잘 모르겠다. 그래서 ‘이렇게만 하면 콘텐츠가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한 듯하다. 과거의 성공 공식도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 예를 들어 소위 말하는 TV 탑급 연예인들의 ‘공들인 대박 섭외’가 성공하고, 필패의 아이템으로 접근하더라도 그것이 모바일 유저들에게는 보증수표가 되지 못한다. 애초에 안방극장을 잡겠다는 ‘범국민적 예능’의 구성은 숏폼 콘텐츠가 주류인 디지털 시장에서는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너 그거 봤어?”는 되지만 “아빠 그거 재밌죠?”는 어렵기 때문이다. 방송국 디지털 PD로서 어려운 점이 여기에 있다. 빅데이터는 이미 존재하지만 이를 해석하여 논리가 탄탄한 기획안을 만들기는 참 어렵다(그다지 실용성이 큰 작업도 아니다). 그냥 헤엄치면서 만들어 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본다. 오히려 명쾌한 해답을 요하는 마인드가, 가벼워야 할 디지털 공장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필자 역시 10년이라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애매한 경력을 토대로 어떤 부분에서는 ‘반드시 이래야 한다’는 원칙들이 있긴 하지만, 이조차도 최대한 가볍게 가져갈 수 있도록 덜어내고 있다. ‘꼭 이래야 돼?’라고 생각해보는 유연함과 ‘무지를 아는 것이 곧 앎의 시작’이라는 겸손함을 갖추기 위해 노력중이다. 아직도 동료는 적고, 갈 길은 멀고 험난해서 외로울 때도 있지만 트렌드의 최전선에서 뭔가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자부심을 매일 아침 약처럼 갈아 마시며 콘텐츠를 기획하고 있다. 과연 내가 10년 뒤에는 또 어떤 환경 속에서 일하고 있을지 참으로 궁금하다.

필자 소개

  • 김한진
  • 2012년 SBS 제작본부 예능 PD로 입사하여, 각종 프로그램의 조연출로 근무하다가 2018년 <런닝맨> 공동연출을 끝으로 2019년 SBS 모바일제작사업팀 모비딕스튜디오로 부서를 옮겼습니다. <김준현의 짠>, <마미손에 붙어라> 등 오리지널 콘텐츠와 각종 브랜디드 콘텐츠를 제작하며 웹예능 PD로서 커리어를 쌓았고 2020년 김한진 <제시의 쇼!터뷰>라는 콘텐츠를 론칭하며 현재까지 근무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