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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Issue 2

공영방송 EBS,
차별성으로 살아남기

글. 봉미선(EBS 정책연구위원)

더 이상 TV로만 방송을 보지 않는 시대다. 모든 방송국들이 TV 앞을 떠나려는 시청자를 붙잡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그중에서도 공영방송은 시청자를 사로잡을 재미도 추구해야 하지만, 동시에 공영방송의 책임을 다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공영방송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아야 한다. 그 말은 곧 한 마리를 잡으면 나머지 한 마리를 놓칠 공산이 크다는 얘기다. 공영방송이 잡아야 할 두 토끼는 ‘시청률’과 ‘차별성’이다. 시청률은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며, 차별성은 남다른 것이다. 시청률을 좇다 보면 상업방송의 그것과 차이가 나지 않아 공영방송의 정당성을 의심받는다. 그렇다고 차별성만 좇다 보면 좋은 방송이라는 말은 듣지만 정작 프로그램은 시민들의 외면을 받기가 쉽다. 자칫 차별성의 섬에 갇혀 게토화(ghettoization) 될 우려마저 존재한다.

이래서 양팔로 두 토끼를 동시에 잡기란 참으로 어려운 법이다. 시청률이란 녀석은 참으로 영리하고 뒷배가 든든하다. 시청률이 나오는 프로그램은 높은 제작비를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다. 글로벌 복합 미디어 기업 수준의 자본력이 아니면 쉬운 일이 아니다. 블록버스터급 규모를 앞세운 상업자본에 공영방송이 맞서기란 애초부터 여의치 않은 일이다. 가히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라 할 수 있다. 다윗처럼 다른 전략으로 움직여보자. 그리고 일단 한 마리를 먼저 잡고 보자. 둘 중에 공영방송이 우선해야 할 녀석을 꼽으라면 차별성이다. 이 녀석은 ‘날 잡으라’며 기다린다. 차별적인 편성, 차별적인 장르, 차별적인 프로그램은 대중의 주목을 받기가 쉽지 않아 상업자본이 탐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공영방송의 차별성(distinctiveness)

공영방송의 차별성은 무엇일까? 상업방송과 무엇이 달라야 하며, 어떻게 달라야 할까? 우선, 공영방송의 차별성은 민영방송과 다른 편성을 꼽는다. 이른바 ‘돈’과 ‘이윤’과는 거리가 있는 즉, 상업방송이 멀리하는 보도, 시사, 교육, 건전한 오락을 다루는 고품질 프로그램을 편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차별성은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기에 명분 넘치는 전략이다. 하지만, 제작비를 쏟아부어도 시청자의 관심을 끌기란 쉽지 않다. 차별성 토끼는 시청률이란 녀석과 친하지 않아 둘은 매번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공영방송의 차별성은 시대에 따라 달라져 왔다. BBC는 1920년대 이후 1960년까지 공영방송의 차별성을 ‘미국의 상업방송과 다른 품격 있는 교양 채널’에 두었다. 이후 상업방송이 속속 등장하고 다채널 환경에 접어들면서 차별성의 의미는 달라졌다. 상업방송이 구매력 높은 일부 계층에 집중한다면, 공영방송은 비엘리트적인 대중적 프로그램으로 다양한 계층에게 볼거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2000년대 접어들어 공영방송 BBC의 차별성은 ‘사회의 방송문화를 선도하는 다양성과 창의성에 기반한 대중적 프로그램’으로 개념화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변화했다.

영국 BBC는 지난 2015년 칙허장 갱신을 앞두고 ‘차별성’을 놓고 다시 한번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 결과물인 <차별적인 BBC (A distinctive BBC)>라는 보고서는 이후 10년간 BBC가 어떻게 차별성을 구현하고, 이를 평가할 것인지를 담고 있다. BBC는 차별성(distinctiveness)을 단지 다름(different)에 머물지 않고 탁월한 품질을 앞세운 도드라짐(distinctive)에 방점을 두었다. BBC는 차별성을 평가하는 기준 4가지를 제시했다. △수신료로 운영됨에 따라 위험을 감수하고 보다 도전적이고 혁신적이며, 창의적인 고품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는지 △대중들의 높은 기대를 충족시키는 공정성, 정확성 및 균형성에 입각한 편집기준을 적용하는지 △수신료 납부자에게 다양한 장르와 장르별 최고의 깊이를 갖춘 콘텐츠를 제공하는지 △영국의 고유성을 갖춘 높은 수준의 방송 콘텐츠를 만들고 영국의 아이디어와 재능을 지원하는가의 여부다. 물론 BBC는 보고서에서 차별성과 함께 공영방송의 필수 요건인 ‘보편성(universality)’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BBC의 차별성 실현 전략은 고품질을 앞세워 시청률도 놓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교육공영방송 EBS의 차별성: <건축탐구-집>과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

우리나라 공영방송, 특히 EBS를 ‘차별성’이라는 잣대로 들여다보자. 채널의 차별성은 ‘교육 전문 공영방송’이라는 정체성으로 구현되고 있다. EBS의 방송편성과 서비스가 ‘교육’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교육’에 천착하고 있다면 차별성을 충분히 실현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 EBS는 미국 PBS와 함께 시청점유율은 상대적으로 낮지만, 공영방송 다운 차별성을 가진 대표적인 방송사로 분류된다. EBS는 방송은 물론, 인터넷과 모바일 서비스로 양방향 교육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공영서비스미디어(PSM, Public Service Media)로 발전해 왔다. EBS는 공영서비스미디어로서 코로나19로 인해 개학이 연기되는 초유의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그 임무를 수행했다. 세계적으로도 처음인 12개 전 학년 라이브 방송 강의를 제공하는 등 어느 공영방송보다 먼저, 적극적으로 공교육을 보완 할 수 있었다.

한 겹 더 젖혀 채널에서 프로그램으로 들어가 보자. EBS 프로그램 중 <건축탐구-집>은 차별성을 실현하는 프로그램으로 주목할 만하다. <건축탐구-집>은 ‘집과 사람, 공간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표방하며, 매주 방방곡곡 집을 찾아 나선다. 2019년 4월 시즌 1을 시작으로, 2019년 8월 시즌 2, 2020년 3월부터 시즌 3을 방송중이다. <건축탐구-집>의 차별성은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에서 먼저 나타난다. 흥미를 앞세워 요란하게 남의 집문턱을 드나드는 연예·오락이 아니다. 건축가를 앞세워 누군가의 집 한 채를 주인과 함께 찬찬히 들여다본다. 단지 집 안팎의 구조나, 집을 짓게 된 우여곡절에 그치지 않는다. 그 집에 사는 사람의 인생, 철학, 그리고 그의 가족에 주목한다.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다른 집을 다루지만 ‘집은 곧, 내가 살고 있는 우주의 중심’이라는 본질적인 가치를 놓치지 않는다.

내 집을 소개하고 싶은 사람은 프로그램 홈페이지에 출연 신청을 할 수 있다. 게시판을 통해 방송에 소개된 집과 주인공에 관한 궁금증을 해결할 수도 있다. 시청자들의 반응도 다양하고 뜨겁다. 시청자 게시판에는 <건축탐구-집>을 시청하고 삶의 활력소를 되찾았다는 사람, 집주인의 진솔한 얘기를 통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시청자도 눈에 띈다. 전문가를 앞세워 집 한 채를 깊이 있게 들여다봄으로써, 전문성은 물론 심층성을 드러낸다. 스튜디오에 갇히지 않고, 수도권 중심에서 벗어나 지역 곳곳을 누비는 점도 <건축탐구-집>이 갖는 차별성이다. 한국 고유의 집과 사람 간 관계를 조명하고, 지역별 특성을 자연스럽게 렌즈에 담아낸다.

시청자들은 프로그램을 보면서 자신의 집을 들여다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집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안에 사람이 살기 때문이라 하지 않던가. 그 안에 사는 사람의 이야기에 빠져들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 집 안으로 들어간다. 제작진은 ‘집을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이 보인다’며, ‘타인의 집을 들여다보는 일이 그래서 흥미롭다’고 설명한다. 차별성이라는 토끼를 잡았더니 시청률이라는 토끼가 다가온 경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건축탐구-집>은 <세계테마기행>(EBS), <한국기행>(EBS)과 더불어 EBS 대표 프로그램으로 발돋움했다. TV뿐 아니라 넷플릭스와 유튜브에서도 주목받는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다.

2021년 EBS가 선보인 강의 프로그램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 또한 차별성을 보이는 프로그램이다. EBS가 그동안 쌓아 온 세계 석학 취재 전문성과 네트워크에 힘입어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을 뚫고 탄생하였다. 석학 한 명 한 명이 분야별 혜안을 제시함으로써 시청자는 최고로 불리는 석학들의 강의를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클래스e>(EBS) <EBS 비즈니스 리뷰>(EBS) 등과 비슷한 강연 포맷 속에 나름의 특징을 담고 있다. 세트와 자막에서 드러나는 형식의 독창성, 평생을 그 분야에 몰두해 온 출연자가 지닌 전문성의 깊이가 시청자로 하여금 집중하게 만든다.

공익에 기여하는 ‘도드라짐’이 경쟁력

넷플릭스와 유튜브로 대표되는 글로벌 복합 미디어 그룹의 파죽지세가 코로나19에 힘입어 더욱 가열하다. 지상파 방송사들이 위기상황에 봉착했다. 플랫폼의 위기와 콘텐츠의 위기가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혼돈에 빠져들고 있다. 소용돌이 속에 내 몸을 내가 가누기 힘든 립타이드1)에 비유될 정도다. 미디어 공공성의 보루로 인식되는 공영방송의 상황이 다를 리 없다. 누가 봐도 한 번 넘어서면 되는 파고에 그치지 않을 게 눈에 보인다. 언제 그칠 줄 모르는 거대한 삼각파도의 정점에 놓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글로벌 자본에 맞서 공영방송은 다윗의 전략과 전술을 생각한다. 흔히 공영방송을 민주주의 발전의 한 축으로, 한국의 혼과 정신을 담은 콘텐츠 발전소라고 말한다. 본연의 기능을 충실히 해낼 때 시청자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고, 공영방송다운 차별성을 실현할 때 그 정체성을 굳게 다질 수 있지 않겠는가. 그들과 다른 꼭 필요한 가치를 전문성으로 무장하여 고품질로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차별성’이고, ‘차별성’이야 말로 글로벌 미디어와 자본에 맞서 공영방송이 살아남을 수 있는 최선의 방책 아닐까?

필자 소개

  • 봉미선
  • EBS 정책연구위원이다. 성균관대학교 통계학과·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공영방송 제도, TV수신료에 관한 논문과 미디어 전문 서적을 다수 공동 저술하였다. 주요 관심 분야는 공영방송, 공공서비스미디어, 미디어 리터러시, 보편적 시청권 및 미디어 정책 등이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