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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ustry & Policy 1

TV 속 젠더 트렌드:
혼자이고 싶은 여자들

글. 이자연(대중문화 평론가, 미디어 에디터)

<논스톱>(MBC) 시리즈를 보고 자란 청소년이라면 한 번쯤 ‘내 대학 생활도 저런 유쾌한 모습일 거야’라는 환상을 가진 적이 있을 것이다. TV는 사회제도와 통념을 녹여낸다. 응당 그래야만 하는 세계, 그 안에서 여성은 오랜 기간 타자의 시선으로 다뤄져왔다. 특히 결혼이라는 제도권 속에서

TV가 남긴 나의 사회적 유전자

내가 열한 살이었을 때 우리 집에는 매일 밤 거대한 폭풍이 몰아쳤다. 부부간의 갈등은 몸집이 쉽게 부풀어 올랐고 아빠는 무언가를 때려 부수거나 엄마에게 언어적·신체적 폭력을 가하며 대화를 마쳤다. 나는 마치 빗발치는 총알들 사이에서 잔뜩 웅크린 채 겨우 살아남은 생존자처럼 열한 살을 버텼다. 이따금 경찰이 찾아오기도 했지만 종식 없는 전쟁엔 일말의 관심도 갖지 않은 채, “조금만 조용히 해달라”는 말만 남기고 홀연 사라져 버렸다. 당시 뉴스에서는 ‘매 맞는 아내’라는 말이 자주 등장했다. 나는 그 말 앞에서 꽤 의연했다. 이게 우리 집만 그런 게 아니구나, 한편으로 안심했다.

그리고 그 해 안방을 사로잡은 예능 프로그램이 있었으니 바로 <특명! 아빠의 도전>(SBS)이다. 이 프로그램은 아빠가 미션을 성공하면 멋진 가구, 각종 최신식 전자기기 그리고 쥬쥬 인형까지 모든 가족구성원이 원하는 것을 상품으로 주었다. 미션은 덩크슛부터 지하철 노선 외우기, 식탁보 빼기 등 예상할 수 없는 것으로 가득했다. 온 가족이 공동의 목표를 두고 똘똘 뭉치는 모습은 실로 대단했다. 남은 가족구성원의 기쁨과 아쉬움은 아빠 손에 달려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런 장면 앞에서 알 수 없는 불편함으로 몸을 배배 꼬았는데, 현실 세계와 TV엔 교묘하게 맞닿은 구석이 있었다. 현실에서 아내들이 남편의 군림 아래 폭력과 구타에 시달려야 했다면, 텔레비전 속에서는 오로지 아빠만이 도전의 주인공이자 응원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엄마의 도전일랑 기회도 주어지지지 않았다. 가족공동체라는 집단의 주도권은 자연스레 남성의 것이었다.

TV에서 결혼이라는 제도권 속 여성을 그리는 방식은 내가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005년, 한창 열풍이던 MBC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을 본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여자는 서른 되면 그렇게 되는 거야”. 그래, 서른이다 서른. 삼순이가 지금의 나보다 어렸던 고작 서른이었단다. 그렇지만 극은 시종일관 김삼순을 나이 들어서 시집도 못 간 억척스러운 노처녀로 그려냈고, 그걸 보고 자란 나와 친구들은 서른 된 여자를 대하는 사회적 시선을 학습했다. 저런 노처녀가 되지 않기 위해 여자는 무엇을 해야 할까? 드라마를 통해 우리는 쉽게 답을 찾을 수 있었다. ‘20대에 결혼하면 돼!’

2008년 즈음부터는 여성을 더 위풍당당하고 멋진 주체자로 그려내려는 시도가 많아졌다. SBS 예능 프로그램 <골드 미스가 간다>에선 여성들이 자신이 원하는 남성을 적극적으로 찾도록 기획했다. 게다가 명칭도 ‘노처녀’가 아닌, ‘골드미스’다. 골드미스는 30대 독신여성들 중 높은 학력과 경제적 능력을 갖춘 이들을 의미하는 신조어로, 노처녀, 올드미스 같이 결핍이 느껴지던 단어로부터 탈피해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명명까지 신경 쓰다니. 이만하면 큰 성장을 이룬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잠깐! 이상하게 찜찜하다. 높은 학력과 경제적 능력을 갖춘 독신남성을 따로 부르는 명칭이 있던가?

  • 골드미스라는 단어에도 여성의 결혼 여부를 따지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출처 : SBS 홈페이지

결과적으로 골드미스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여성’을 부각하는 단어를 하나 더 늘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자면 여자인 거지 왜 ‘아직 결혼하지 않은 여자’여야만 하는 걸까. 도대체 여성에게 결혼이 뭐기에. 여전히 TV는 여성들에게 ‘결혼 여부’라는 잣대를 들이밀고 있었다. 그래도 백번 양보해서 긍정적인 여성상을 그려냈다 치자. 높은 학력과 탄탄한 경제력까지 두루 갖춘 성인 여성들이 어떻게든 결혼 시장에 진입하도록 맞선 자리를 끊임없이 제공하는 콘텐츠를 보고 자란 아이들은 무엇을 생각하게 될까? 결혼 제도에 의존하지 않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여성. 우리에겐 그게 결핍돼 있었다.

더 자유로운 여자들을 발견하는 일

진짜 변화는 2016년부터 일어났다. 많은 여성 시청자가 기존 방송에서 결혼 제도와 여성을 그려내는 방식에 피로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여성의 역할이 부각되는 것보다 그냥 한 명의 인간으로 그려지는 것. 여성 시청자는 그것을 바랐다. JTBC 예능 <최고의 사랑>에서 김숙과 윤정수의 가상결혼에 많은 이들이 환호하고 뜨거운 반응을 보낸 것 또한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비롯했다고 볼 수 있다. 김숙이 윤정수에게 반복해 말했던 “돈이야 내가 벌면 되지”, “조신하게 살림 잘하는 남자가 최고야” 등은 오랫동안 여성들을 따라다녔던 말이지만 남성 타깃으로 전복되면서 많은 이들이 간접적으로나마 통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불편할 수도 있는 말을 웃으면서 할 수 있다는 가능성마저 동시에 경험했다. 이로써 가부장 사회에서 관용어처럼 전해온 말을 완전히 탈바꿈하면서 김숙은 ‘가모장’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됐다.

많은 이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했던 <최고의 사랑> 속 김숙의 말들

출처 : <최고의 사랑> 네이버 TV 홈페이지

TV 프로그램 속 결혼을 대하는 여성의 태도가 기존과 달리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바뀌자 사람들은 그간 생각해본 적 없던 질문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꼭 결혼을 해야만 할까?” 그리고 이 의문에 답하듯 많은 방송에서도 비혼에 관한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게 되었다. JTBC 예능 <연쇄쇼핑가족>에 출연한 소녀시대 멤버 써니는 비혼주의자라는 사실을 밝혔다. 결혼하고 싶다는 동료 가수의 말에는 “결혼을 꼭 해야 해? 연애도 하고 싶으면 하는 거고, 굳이 왜 결혼을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라고 답했다. 또 MBN 예능 <비행소녀>에서 핫펠트(예은)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비혼주의 생각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결혼이 필수라고 생각하지 않아. 결혼을 위해 누군가를 만나 내 삶을 바꾸고 싶지 않아.”

그간 무수한 방송 프로그램이 여성을 언젠가 결혼할 사람으로 그려냈다면, 2016년 이후에는 그 이미지에 물음표를 제기하면서 타인에 의존하지 않고 제 두 발로 떳떳하게 서 있는 여성의 모습을 다각도로 그려내려 했다. 실제로 2020년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전국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 따르면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한다’라고 답한 반응은 6.3%에 그쳤다. 12년 전인 2008년의 응답률이 17.1%인 것을 보면 결혼에 대한 인식이 현저히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본인이 원한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답한 비율은 2008년에 41.6%로 절반도 못 미치지만, 2020년에는 59.9%의 선택을 받으며 절반을 훨씬 뛰어넘는 가장 보편적인 인식이 되었다. 오로지 방송만으로 이러한 흐름이 만들어졌다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TV 속에서 여성과 결혼을 그려내는 방식이 뒤바뀌면서 Z세대가 그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는 해석할 수 있다. 마치 <내 이름은 김삼순>을 보고 자란 내가 결혼은 어린 나이에 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처럼.

그 이후에도 변화는 잇따랐다. 스스로 결혼 제도에 발을 들이지 않는 여성의 이야기를 훌쩍 넘어서 결혼 이후에도 자신의 정체성과 자아를 잃지 않으려는 여성들까지 조명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JTBC 예능 <내가 키운다>는 이혼 후 홀로 육아를 전면으로 도맡게 된 여성 연예인의 일상을 꾸밈없이 보여준다. 일명 ‘정상가족’ 바깥의 모습을 여성들이 어떻게 긍정하고 노력하고 있는지 드러내면서 가장의 의미를 넓게 확장시켰다. 실제로 여성가족부 조사에 따르면 아이를 홀로 키우는 사람 10명 중 1명은 남들의 시선이 두려워 동네나 이웃 주민에게 한부모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는다고 답했다. 일찍 결혼 하라는 부추김과 비혼을 의심하는 눈초리 등 여성들이 감내해야 할 게 많은 사회에서 이혼을 경험한 여성들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를 직면하고 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대중 앞에 나와 자신의 삶을 토로하고 고민을 수면 위로 올릴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된 것은 무척 반길만 하다. 문제를 해결할 정책과 제도가 마련되기 위해서는 공동의 문제 의식이 가장 먼저 필요하기 때문이다. TV가 그동안 여성의 결혼에 관해 외면하거나 강요했던 지점들이 조금씩 개선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TV와 OTT 프로그램을 보며 웃고 우는 동안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선명한 영향을 받게 된다. 이제 다음 스텝은 무엇일까. 화면 속 여성들의 자유로운 모습을 더 많이, 더 자주, 더 다양하게 볼 방법을 찾을 차례다.

필자 소개

  • 이자연
  • 대중문화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 영상 콘텐츠를 여성주의 관점으로 분석한다. 미디어 비평 에세이 『어제 그거 봤어?』(상상출판)를 썼고, 한겨레신문에서 <MZ커뮤니티 보고서>를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