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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 1

드라마 제작 환경 변화에 따른
기획 프로듀서의 중요성

글. 신윤하(기획 프로듀서, 스튜디오앤뉴 드라마 기획팀장)

콘텐츠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중 하나가 바로 ‘IP(지적재산권)’이다. 하나의 IP는 영상을 비롯해 다양한 형태로 재가공되며 그 가치 영역을 확장한다. 콘텐츠 기획개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기획 프로듀서의 중요성이 나날이 강조되고 있는 이유다.

제작 환경 변화와 함께 등장한 기획 프로듀서

“직업이 뭐예요?”, “하시는 일이 어떻게 되세요?”라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난감한 웃음을 짓게 된다. “드라마 피디예요.”라고 답하면 대체로 대화가 이렇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럼 감독이신가요?” “아, 아니에요. 저는 프로듀서인데, 어떤 드라마를 만들지 계획하고 대본 작업에 참여하는 ‘기획 프로듀서’라고 해요.” “그렇구나, 작가님이시구나.” “앗, 작가는 아니구요….”

나 또한 아무것도 모르던 학생일 땐 드라마 작가와 감독만 알 뿐 프로듀서라는 직업에 대해선 잘 몰랐다. 게다가 한국 방송업계에서 피디(PD)는 제작자가 아닌 프로그램 디렉터(Program Director)의 줄임말로 오랫동안 감독, 연출자를 일컫는 말이기도 했다. 프로듀서는 창작자들이 일할 수 있는 판을 만드는 중요한 일을 하지만 업의 특성상 그림자 같은 존재이기에, 관계자가 아닌 이상 프로듀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벌어진 드라마 산업의 변화들로 프로듀서의 위상은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드라마 산업의 환경적인 변화

드라마 산업의 변화는 크게 환경적인 측면, 구조적인 측면에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환경적인 측면에선 1) 미디어 환경의 급격한 변화 2) 넘쳐나는 콘텐츠의 양 3) 빠르게 변하는 트렌드 4) 시청자들의 양적/질적 향상, 4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 중 가장 큰 건 플랫폼의 선택지가 다양해졌다는 점이다. KBS, MBC, SBS 지상파 3사 체제에서 tvN을 비롯한 케이블 채널 그리고 JTBC, TV조선, 채널A, MBN 등 종편채널의 등장까지. 레거시 미디어인 TV에서만 드라마를 편성하는 채널이 3개에서 8개 이상으로 늘어나게 됐다. 게다가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 같은 글로벌 OTT와 티빙, 웨이브, 쿠팡 등 국내 OTT의 등장까지.(필자만 해도 가입한 OTT 수가 7개다) 지상파 3사가 독점하던 드라마 시장이 여러 플랫폼으로 쪼개지면서 자연스레 방송사의 위상은 이전 같지 않고, 콘텐츠 수급을 위한 플랫폼 간의 경쟁이 심화하면서 콘텐츠 공급자인 제작사의 위상이 높아졌다.

플랫폼이 다양해지고 드라마의 제작 편수가 증가하면서 드라마 간의 시청률, 화제성 다툼도 치열해졌지만, 드라마의 경쟁작을 드라마로만 한정하는 건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6~7년 전까지만 해도 드라마의 경쟁작은 동일 시간대 방송하는 타 채널의 드라마였지만, 지금은 드라마뿐만 아니라 예능 그리고 숏폼·미드폼 디지털 콘텐츠까지 다양한 영상 콘텐츠들과 경쟁해야만 하는 시대가 되었다.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의 자체 기획 영상 콘텐츠부터 네이버의 웹 시리즈 제작사인 플레이리스트, 유튜브의 ‘숏박스’ 같은 웹드라마 채널까지, 전통적인 드라마들은 콘텐츠의 홍수속에서 무한 생존 게임에 놓이게 되었다.

예전엔 대중문화의 유행이란 게 적어도 6개월, 길면 1년 넘게까지 지속되곤 했는데 지금은 체감상 유행이 2~3개월도 가지 못하고 빠르게 변하고 있다. 유튜브 인기 동영상 순위만 보아도 콘텐츠와 채널 트렌드가 일주일, 나아가선 하루 단위로 바뀐다. 그런 와중에 드라마의 평균 제작 기간은 기획부터 방송까지 최소 2~3년이 걸리면서 트렌드의 반영이란 게 어려워졌다. 최근 방송되는 드라마를 보면 여름엔 겨울 배경이, 겨울엔 여름 배경의 드라마들이 방송되고 있다. 6년 전만 해도 드라마가 사전제작이라고 하면 기사화가 될 정도였지만, OTT의 등장을 비롯하여 방송 분야에도 표준근로시간이 적용되면서 이젠 대부분의 드라마들이 사전제작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렇다보니 기획했던 시점의 트렌드와 방송 시점의 트렌드가 미묘하게 어긋나게 되고 드라마가 가지고 있던 최고의 장점인 동시대성도 희미해졌다.

드라마 산업의 변화에는 시청자들의 양적/질적 향상을 빼놓을 수가 없다. 한국 드라마, 한국 콘텐츠의 성공 요소에 많이 언급되는 것이 까다로운 국내 시청자들로 콘텐츠가 질적으로 향상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다. 한국 시청자는 재미있으면 열광하고 재미없으면 냉정하게 돌아설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하고 반복되는 것은 금방 질려한다. 민감하고 적극적인 한국 시청자들로 인해 한국 드라마는 타 국가의 콘텐츠에 비해 트렌드가 빠르고 수준이 높다. 수준 높은 시청층은 콘텐츠의 발전을 높이고 자연스럽게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게다가 OTT로 전 세계에 실시간으로 드라마가 유통되기 때문에 시청층은 점점 글로벌화 되고 다양해진 만큼 드라마의 공략 타깃이 중요해졌다. 일을 처음 시작할 때 선배들로부터 제일 먼저 배운 것이 ‘드라마는 7살 어린이부터 70세 노인까지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대, 성별 가릴 것 없이 온 가족이 볼 수 있을 정도로 쉽고 공감대가 넓은 스토리텔링만이 성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세대, 성별, 취향, 시청방식에 따라 시청층이 세분화되어 소위 ‘온 가족이 보는 드라마’는 모두를 잡으려다 모두를 놓치는, 이젠 위험한 기획일 수 있다.

1) 플랫폼의 다양화 2) 콘텐츠의 홍수 3) 짧아진 트렌드 주기와 길어진 제작 기간 4) 세분화된 시청층이라는 환경적인 특징은, ①여러 플랫폼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다양한 IP가 준비된 콘텐츠 공급자 ②수많은 콘텐츠 속에서도 돋보일 수 있는 기획력 ③트렌드 민감도와 프로덕션의 효율적 운영 ④시청 타겟에 따른 전략과 마케팅적 사고를 요구하게 되면서 방송사와 창작자 중심의 시스템에서 제작사 즉, 전문적인 프로듀서 중심의 시스템으로 제작 환경을 변화시켰다.

드라마 산업의 구조적인 변화

프로듀서 중심의 제작 시스템으로 변하면서 제작사 구조도 바뀌게 된다. 2016년 스튜디오드래곤 설립을 기점으로 외주제작사에서 드라마 전문 스튜디오 체제로 드라마 산업이 변하게 되었다. 똑같은 제작사인데 부르는 이름만 다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외주제작사와 드라마 전문 스튜디오는 설립의 배경과 구조에서 여러 차이가 있고, ‘기획의 주체가 누구인가’가 둘을 가르는 기준 중 하나이기도 하다.

과거엔 방송사에 소속 또는 계약된 감독, 작가 그리고 국장, CP 등 방송사의 결정권자들이 기획을 정하고 편성을 확정하면 제작사는 방송사로부터 예산 운영과 정산이라는 제작 파트의 외주를 받아 관리하여 드라마를 만들었다. 이것이 외주제작사의 형태이고, 이런 구조에선 당연히 기획의 주체는 방송사가 되고 제작사는 드라마를 완성하여 납품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 외주제작사 시스템에서 드라마 IP가 방송사에 전부 귀속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

드라마 전문 스튜디오는 자본력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작가, 감독 등의 크리에이터 확보에 유리하다. 기존엔 방송사가 기획을 결정하고 작가, 감독을 세팅하여 제작사가 제작만 맡았다면 드라마 전문 스튜디오는 크리에이터를 토대로 기획과 제작을 주도할 수 있게 된다. 이렇기 때문에 과거와 달리 드라마 IP(지적재산권)를 방송사와 제작사가 공동 소유하는 경우부터 제작사가 100% 소유하는 것까지 가능하게 된다. 스튜디오는 제작한 드라마의 IP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드라마에서 파생된 수익으로 새로운 창작자와 다양한 기획에 투자하는 순환이 이뤄진다.

이러한 환경적인 변화와 구조적인 변화로 인해 드라마 산업에서 프로듀서의 전문 역량과 지위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지고, 그중에서도 기획 프로듀서는 드라마 제작의 출발점이자 스튜디오 시스템의 핵심으로 최근 드라마 업계에서 가장 각광 받는 직종이다.

IP 비즈니스의 핵심, 기획 프로듀서

정리하자면 기획 프로듀서는 드라마 산업 내에서 플랫폼-창작자-시청자를 연결하는 허브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앞으로도 기획 프로듀서의 역할은 계속해서 강조될 것이며, 더 나아가 기획 프로듀서는 IP 비즈니스의 핵심이 될 것이다.

2011년부터 10년이 넘은 지금까지 총 9편의 드라마에 조연출과 프로듀서로 참여하였다. 매 작품마다 많은 것을 배우면서 노하우와 경력을 쌓았는데, 그중에서도 2018년 방송한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JTBC)는 기획 프로듀서로서 전환점이 되는 작품이었다. 동명 소설의 작가이자 당시엔 현직 부장판사였던 문유석 작가와의 작업은 새로운 경험이었고 기획 프로듀서인 필자의 관점을 넓혀준 계기가 되었다.

  • 원작 소설의 작가인 문유석 판사가 극본 작업에 참여한 <미스 함무라비>

    출처 : JTBC

그 이후로 신인 작가를 넘어서 드라마 집필 경험이 전무한 원작자와 다양한 기획개발을 시도하였고 현재 진행 중이다. 웹소설 『해시의 신루』의 원작자 윤이수 작가가 직접 집필한 동명의 드라마를 제작 중이고, 인스타툰 『메리지레드』로 유명해져 <유 퀴즈 온 더 블록>(tvN)과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CBS)에 출연한 최유나 이혼전문변호사는 <이혼의 모든 것(가제)>라는 드라마를 집필하는 중이다. 이렇게 원작자가 직접 드라마를 집필하는 형태의 협업은 원작(또는 원작자)의 브랜드와 팬덤을 기반으로 한 IP 비즈니스의 확장 형태다. 그리고 원작자 집필은 드라마 기획 제작 공정에 변화가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이며 이런 구조에선 당연히 제작사 및 기획 프로듀서의 역량이 매우 중요하다.

최근엔 원작자 집필 기획 외에 새로운 형태의 IP 비즈니스에도 개인적인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 기획개발 중인 드라마를 웹툰으로 먼저 탄생시켜 드라마 아이템 자체를 원천 IP로 만드는 모델이다. 결국 앞으로는 기획의 첫 단추를 어떻게 시작하느냐 따라 IP 비즈니스 방향이 결정되고 확장될 것이며, 이 과정을 기획 프로듀서가 주도하게 될 것이다.

  • 필자 소개_ 신윤하

    11년 차 드라마 기획 프로듀서이며, 현재 제작사 스튜디오앤뉴의 드라마 기획팀 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