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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point 1

지겹도록 외친다,
해방이 필요하다고

글. 신재경(LYD 국제사업팀 매니저)

최근 미디어에서 가장 화제가 됐던 단어를 꼽으라면 ‘추앙’을 떠올릴 사람이 많을 것이다. 사랑 대신 자신을 추앙하라는 독특한 대사로 이목을 끌었던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는 시청자 모두에게 평범한 삶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게 했다.

모두가 해방을 원한다

그냥 지쳤어요. 모든 관계가 노동이에요. 눈 뜨고 있는 모든 시간이 노동이에요. <나의 해방일지> 3화 중

힘들어. 피곤해. 지친다. 퇴근하고 싶다. 집에 가고 싶다. 가만히 돌이켜보니 하루라도 저 말을 하지 않은 날이 없다. 어떤 큰일이 있어서도 아닌데, 지극히 평범한 일상임에도 끊임없이 되뇌인다. 하루에 한 번도 저 말을 안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모든 관계가 노동이고, 눈 뜨고 있는 순간순간이 노동이라는 말이 맞다.

노동으로 지친 우리가 모두 원하고 부르짖는 것, 바로 ‘해방’이다. 1945년 일제 치하 조선의 해방, 2022년 지금 바로 여기서, ‘나’로부터의 해방. ‘구속이나 억압, 부담 따위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뜻이 나라는 작은 존재에도 쓰일 수 있는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자유, 휴가, 혹은 퇴근이라는 작고 귀여운 단어를 대신 쓰기만 했지 말이다.

동호회에 들기 싫다며 회사에서 펑펑 울던 염미정(김지원)과 박상민 부장, 조태훈 과장이 함께 만든 ‘해방 클럽’에 대해 사람들은 한결같이 묻는다. 해방이란 거창한 단어 앞에 “해방 클럽이 뭐 하는 데야? 뭐로부터 해방하는 건데?” 하며 순수하게 비아냥거린다. 마치 “너같이 평범하고 지루한 인간이 해방될 거리가 있어?”라 묻는 듯싶다.

이 드라마는 보여준다. 지루하고 평범하고 촌스러운 사람들이 얼마나 큰 해방을 맛볼 수 있는지, 당신 또한 해방 클럽이 필요한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을 말이다. 혹시나 ‘나의 해방일지’를 모르겠는 당신이라면, 당신에게 해방 클럽의 초대장을 보낸다.

모든 지겨운 것들에 대한 해방

지겨운 것들. 지겨움이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해방. 태어나 죽을 때까지 같이 살아야 하는 운명을 가진 ‘나’라는 존재로부터의 해방. <나의 해방일지>(JTBC)는 그렇게 시작한다.

여기 헤어지는 남녀가 있다. 여자는 단 한 줄의 평가로 남자에게 평생의 트라우마를 만들어준다.

“너 아니? 너 견딜 수 없이 촌스러워. 끔찍하게 촌스러워!”

견딜 수 없이 촌스러움을 입은 남자, 염창희(이민기)는 그렇게 촌스럽게 산포에 있는 촌스러운 집으로 돌아와 촌스러운 친구들 앞에서 촌스러움에 대한 한탄을 늘어놓는다. 촌스러운 남자가, 촌구석의 촌스러운 카페에 삼삼오오 모여 차인 이유를 설명하는 장면을 보면 정말 촌스럽기 그지없다. 그런데 그 촌스러움이 슬퍼야 하는데, 웃기다. 주변과 어울리지도 않는 하와이풍의 카페에서 냉동실에 얼려 둔 커피콩으로 내린 커피를 마시는데 (손님에겐 맛없어서 못 판다는 커피이다), 그들의 촌스러움은 너무 인간적이고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여느 드라마에 나오는, 이별 후 호텔 라운지 바에 가서 값비싼 위스키를 따라 마시며 눈물 흘리는 남자보다 맥주 한 캔 들고 쪼그려 앉아 친구들한테 자신의 못남을 털어놓는 염창희에 정이 간다. 부끄러움을 몰라서인지, 참 속도 없다 싶지만, 그는 그렇게 이별의 아픔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한다.

모든 역사는 차 안에서 이루어지는데 제가 차가 없습니다, 아버지! 어디서 키스를 해요 남녀가. <나의 해방일지> 1화 중

염창희의 해방은 사실 가장 가볍고 순박하다. 큰누나와 예쁨 독차지하는 여동생 사이에 끼어 장남 노릇은커녕, 어렸을 적 친 사고로 부모님 눈치를 살피며 발언권 없이 산다. 그런 그에게 구 씨(손석구)의 롤X로이스란, 자신이 꿈꾸던 모든 것을 이룬, 지겹게 거슬리는 것들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이다. 샌드위치 신세로 여기저기 끼여 살며 뭐하나 없던 촌스런 인간이자 회사의 노예에게 발언권, 우선권, 참정권, 페이스오프, 선망의 대상권, 상류사회 입성권, 세련됨으로 전신 성형, 자기애 풀 충전 등 생각나는 모든 좋은 것들이란 다 들은 종합 선물 세트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뿐인가, 롤X로이스 하나에 회사 과장, 대리가 “나는 이런 차를 타는 사람이다!”라고 대동단결하여 만세삼창을 하는 장면이 어찌 배꼽 빠지게 웃기지 않을 수 있을까. 내 차도 아닌데 우리 롤X로이스가 다친 날, 지분 0%의 사람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모습도 귀엽다. 그런 선망의 물건 하나로 대동단결하는 신기한 세상이다.

그 차를 보는 것, 만지는 것, 타는 것만으로도 나의 자존감이 수직상승한다. 삶이 한순간에 지옥 불길에서 꽃길이 되어버린다. 땀으로 젖어가던 경기도민의 출퇴근길이 세상 가장 여유롭고 향긋한 길이 된다. 누구나 한 번쯤 외쳐보는 ‘로또만 당첨돼라! 내가 돈만 있으면 이까짓 회사!’, ‘야, 나도 돈만 많으면! 내가 건물주라면!’이라는 상상을 실현시킨다. 염창희는 우리 모두가 염원한 해방을 보여준 인물이 아니었을까?

<나의 해방일지>에서 가장 핫한 단어, 추앙

난 한 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나를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 돼. 추앙해요. <나의 해방일지> 2화 중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저런 단어를 쏟아내는 염미정에 대한 부끄러움은 시청자의 몫이었지만, 단전에서 끓어오르는 분노, 원망, 그 복잡 미묘한 심정은 충분히 전달되었다. 추앙이라는 낯선 단어 하나는 폭발적 반응을 끌어올리기에 충분했다. 오죽하면 카메라에 그 사전적 의미까지 담았을까.

허름한 정자에 걸터앉아 소주를 마시고있던 구 씨에게 다가가 저런 말을 건넨 상황은 개연성이 부족한 장면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대사는 작가의 전작인 <또 오해영>(tvN)에서의 대사를 합쳐놓은 장면처럼 느껴진다.

“여자는요. 아무리 취해도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말은요, 죽었다 깨어나도 안 해요. 술이 떡이 돼도 안 해요. 아무 상관 없는, 두 번 다시 볼 일 없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우리 아무 상관 없는 사이 될래요?” 오해영(서현진)이 박도경(에릭)에게 하는 대사

“원래 남녀 사이가 그래. 10년도 된 동성 친구한테도 말 못하는 거 내가 비벼도 될 구석이다 싶으면 만난 지 1분도 안 된 남자한텐 할 수 있어. 그게 남녀 사이야.” 희란(하시은)이 오해영에게 하는 대사

나의 밑바닥을 쏟아내도 내게 상처 주지 않을 아무나가 필요한데, 그 아무나가 어딘가 비빌 구석이 있어 보였던 것이다. 염미정의 평생 다문 입이 터진 게 바로 그 구(口)씨다.

내키는 대로 찾아가, 화를 쏟아낸다. 세상 사람 누구도 몰라야 할 비밀을 구 씨 집에 숨겨둔다. 그렇다고 구 씨가 마냥 착하게 받아주는 인간도 아니다. 아무 자격도 없으면서 톡톡 쏘아붙이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안 그래도 힘들다고, 안 그래도 아프다고 하는데 상처 난 마음 후벼대는 더 미운 말도 주저하지 않는다. 내 마지막 자존심은 지켜줄듯하다가 더 생채기를 내며 사람 미치게 한다.

<또 오해영>, <나의 아저씨>, <나의 해방일지>가 같은 듯 다른 이유

<나의 아저씨>(tvN)에서 박동훈(이선균)이 삶의 밑바닥에 치닫던 이지안(이지은)의 키다리 아저씨였다면, 구 씨는 들개 같은 아저씨다. 키다리 아저씨는 힘들 때 조용히 와서 손수건을 내밀어 주고, 거품이 가득한 배려용(?) 맥주를 따라 주며 안주도 먹으라 챙겨준다.

반면, 이 들개 같은 아저씨는 자기 먹을 술만 사와 소주만 가득 따라준다. 안주 하나 없이. 다가가고 싶은데 언제 팔뚝을 물어뜯을지 모를 들개 같다.

그런 구 씨가 되지도 않는 추앙 생떼를 부리는 염미정에게 숙제를 하나 내준다.

“뚫어야 될 문제를 뚫어. 엉뚱한 데로 튀지 말고.” 촌철살인이다. 우리는 ‘해방’이라는 단어의 뜻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으면서 모두가 ‘추앙’받음으로써 해방을 할 수 있다는 어리석음에 집단으로 속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채워지면 진정한 해방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누군가가 주는 절대적 사랑이 부족해서라고 믿고 싶었던 것이다. 내 노력보단 네가 날 덜 사랑해서, 날 덜 채워줘서 지금 내 상황이 이렇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편이 쉽고 편하니까.

그렇게 염미정은 구 씨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방패 삼아 직면을 배운다. 마치 든든한 백이라도 생긴 것처럼 행동한다. 구 씨는 염미정의 보이지 않는 천군만마가 된다. <나의 해방일지>가 기존의 신데렐라형 드라마들과 다른 점은 바로 남자가 전장에 절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 나쁜 팀장이 날 괴롭히는 상황에 사무실에 박차고 들어와 내 손목을 낚아채 나가줘야 하는데 구 씨는 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미정은 승리를 이끌며 단단하게 성장한다.

우리가 이 커플에게 빠져드는 이유는 간질간질 애타는 로맨스 때문이 아니다. 구렁텅이 같은 현실을 잘 그려내서도 아니다. 해방 클럽이 다섯 가지의 본칙과 부칙을 빠짐없이 지키기 때문이다.(거기에 손석구의 들개美 한 스푼?)

  • 본칙

    행복한 척하지 않겠다.
    불행한 척하지 않겠다.
    정직하게 나를 보겠다.

  • 부칙

    조언하지 않는다.
    위로하지 않는다.

<나의 해방일지>의 특징 중 하나는 대사가 오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서로의 이야기를 쏟아내기만 한다.

어줍잖은 공감, 조언, 충고가 없다. 그래서 눈과 귀가 편하다. 꽃가루 날리는 과한 행복도 없고 슬픔을 넘어선 비참한 불행도 없다. 어떠한 해석으로도 끌고 가지 않는 편안함을 주는 드라마이다.

지겨운 것으로부터의 해방은 곧 나의 해방이다. 무엇이 나를 채우는지, 무엇으로 날 채워야 할지 내가 결정해야 비로소 진정한 해방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걸 염 씨네 가족과 구 씨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보여준다. 참으로 다행인 점은 그 요소가 생각보다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염창희가 부르짖는 에어컨 빵빵 틀며 화장실 2개인 집, 비데까지 있다면 금상첨화다. 매일 식탁에서 마주하는 가족, 20년을 봐온 동네 친구, 편의점에서 만 원에 4캔이나 주는 시원한 맥주. 위험할 때 혹은 화날 때 길에서 마구 집어 던질 수 있는 짱돌. 지금 생각나는 그 사람의 짧은 메시지 하나. 길가에 널려 있는 좋은 글귀가 있는 광고판이면 된다.

‘오늘 당신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맞다. 오늘도 참으로 지겹게 사랑스러운 하루이다.

  • 필자 소개_ 신재경

    인생을 취미처럼 재밌게 사는 게 목표인 사람. 인생이 드라마이고 싶은 사람.
    tvN, 아리랑TV 등에서 근무한 3년차 PD.
    지금은 LYD에서 전 세계의 드라마 배급, 수급이라는 새로운 도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