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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point 3

문해력과 리터러시,
그리고 미디어 리터러시

글. 봉미선(EBS 정책연구위원)

작년 3월, EBS는 <당신의 문해력>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전 세대를 아우르는 문해력 문제에 대해 고찰했다. 이어 시청자 조사를 통해 세대별 문해력 테스트를 진행하는 등 문해력 이슈를 수면위로 꺼내는 데 성공했다. <당신의 문해력>을 계기로 사람들이 왜 문해력 그리고 리터러시에 주목하는지 들어본다.

심심한 사과가 화제다. 매우 깊이(甚深) 뉘우쳐, 용서를 빈다(謝過)고 말했건만, ‘심심한’을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사람들 때문이다. 언론은 이때다 싶어 요즘 세대들의 어휘력이 한심하다며 혀를 찼다. 마침 한글날이 다가왔고 ‘사흘’을 ‘4일’로, ‘고지식하다’를 ‘지식수준이 높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문해력 수준이 바닥이라고 우려를 나타냈다. 이렇게 그냥 지나치고 말 일이 아니다. 이 글에서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그에 답해 보고자 한다.

1. 어휘 몇 개 모른다고 문해력이 부족하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2. 문해력이란 과연 무엇인가?
3. 문해력과 리터러시는 어떻게 다른가?
4. 언론은 리터러시와 어떤 관계인가?
5. 사람들은 왜 리터러시에 이토록 주목하는가?

1. 어휘 몇 개 모른다고 문해력이 부족하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1번 질문의 답은 ‘없다’이다. 과거 세대에게 익숙한 말일지라도 현재 세대에게는 새로울 수 있다. 과거 세대도 옛말을 이해하지 못해 국어시간에 따로 배웠다. 언어의 시대성으로 과거 세대는 모르는 현재 세대만 이해하는 어휘들도 숱하게 많다. 세대를 아울러 서로 이해하기 위한 소통이 우선이다. 수십 년의 경험과 공부를 통해 어휘를 습득한 과거 세대와 불과 일이십 년을 살아온 사람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과연 우리나라 현재 세대의 문해력 수준이 다른 나라 또래들에 비해 떨어질까? OECD가 국가별 15살(우리나라 기준 중2) 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Program for International Student Assessment)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OECD, 2022). 2000년부터 3년 주기로 실시된 PISA 조사에서 우리나라 학생들의 ‘읽기 소양’ 평균 점수가 조금씩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OECD 37개 국가 가운데 2~7위 범위1)로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이다(한국교육과정평가원, 2020). 교육전문가들은 ‘우리나라는 언어동질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순위가 높을 수 있다’며, ‘하위권 학생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는 추세에 주목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상위권 비율은 그대로인데, 하위권 비율은 2009년보다 2018년 조사에서 2배 이상 늘어났다. 하위권이 늘어나면서 평균 점수가 하락했고, 하위권 증가는 교육불평등 심화를 방증한다는 해석이다. ‘심심한’ 해프닝은 우리 사회 양극화, 불평등의 문제를 생각하게 만든다.

2. 문해력이란 과연 무엇인가?

답은 ‘문해력의 사전적 의미부터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이다. 문해력의 사전적 의미는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다. 단순한 어휘력이 아니다.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맥락을 파악하고, 행간을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 물론 이를 위해 어휘력이 기본이다. PISA 조사결과는 의미 있는 또 다른 메시지를 제공한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읽기 능력은 매우 높은 순위인 데 비해,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는 능력에서는 최하위권 수준이다. 사실과 의견을 구별하는 문제의 정답률은 25.6%에 그쳤다. OECD 평균은 47% 수준이다. 사실과 의견을 구별한 다음, 그 사실이 진실인지 허위/조작인지를 구별하고, 그 의견이 공정한지 기울어졌는지를 해석하는 게 순서일진대, 첫 관문에서 4명 중 3명이 막히고 만다는 얘기다.

3. 문해력과 리터러시는 어떻게 다른가?

3번 답은 ‘문해력을 넘어 리터러시로 확장해야 한다’이다. 영어 ‘literacy’라는 단어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문해력이나 독해력으로 번역하기에는 단어가 내포하는 의미를 다 담아내지 못한다. 영어사전에서 ‘리터러시’는 ‘읽고 쓸 수 있는 능력(the ability to read and write)’이다. 물론 ‘리터러시’라고 쓰는 사람들도 이런 의미만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지난 2020년 8월 관계부처 합동 발표자료에서도 고민이 묻어난다. 방송통신위원회와 교육부, 문화체육관광부 등 관계부처가 ‘디지털 미디어 소통역량 강화 종합계획’을 발표하면서, 문해력이라는 용어 대신 ‘리터러시’를 사용했다. 단어가 담고 있는 뉘앙스의 차이 때문일 테다. 범부처 종합계획은 비대면 시대에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소통하고, 건강한 디지털 공동체를 만들어가겠다는 여러 내용을 담고 있다. 초중고 교육을 강화하고, 시청자미디어센터를 전국으로 확대하며, 교원 연수를 전담하는 미디어 교육원을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무엇보다 디지털 시민성(digital citizenship)의 개념을 강조하면서 미래사회 필수 역량으로 ‘디지털 리터러시(digital literacy)’를 강조하고 있다. 문해력이 리터러시로 확장되고 시민성과 연결될 때, 민주주의는 발전한다.

4. 언론은 리터러시와 어떤 관계인가?

4번 답은 ‘리터러시는 수용자만의 몫이 아니라 공급자의 역할 또한 크다’이다. 리터러시는 국어 실력이 아니다. 사회 전반, 제반 학문 영역을 아울러 경험과 학습을 통해 지식을 수평적으로 탄탄히 터득해 나갈 때, 수직적으로 리터러시 역량이 길러진다. 언론은 사회 전반, 제반 영역을 가장 가까이 쉽게 만날 수 있는 창구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미디어 리터러시에 관한 한 언론사에 유독 관대한 편이다. 영국 방송통신규제기구인 오프컴(Ofcom, Office of Communications)은 영국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정책을 주도한다. 영국은 2003년 커뮤니케이션법을 제정할 때 미디어 교육에 관한 사항을 포함했고, 2009년에는 문화부(DCMS, Department for Digital, Culture, Media and Sport)가 디지털 브리튼(Digital Britain)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방송사들의 역할을 강조했다(DCMS, 2009). 영국 문화부는 미디어 리터러시 개념을 디지털 생활능력, 디지털 포용(digital inclusion)까지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확장했다. BBC는 2013년에 미디어 리터러시 전략을 발표하고,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실천하고 있다(BBC, 2013). 청소년들이 직접 영상을 제작하는 BBC 영 리포터(Young Reporter)를 운영하고, 사실과 의견을 구별하는 방법, 가짜뉴스에 대응하는 방법,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에 관한 리터러시 교육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영국 사례는 언론사가 문해력에 관한 ‘충격’을 전하는 데 그칠 게 아니라, 시민 리터러시 역량 증진의 책임 있는 주체임을 일깨워 준다.

5. 사람들은 왜 리터러시에 이토록 주목하는가?

5번 답은 ‘사회적으로는 민주주의 발전에 대한 열망이고, 개인적으로는 속지 않고 살기 위한 생존전략이다’이다. EBS가 기획한 <당신의 문해력> 시리즈는 문해력을 사회적인 이슈로 새삼 부각시켰다. 한글의 오남용이 매번 한글날의 단골 기획기사였다면, 올해는 어휘력 부족 실태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문해력을 진단하고, 이를 키워주겠다는 책들이 연이어 출간됐다. 디지털, 세대 차이, 교육 양극화, 코로나19 등 그동안 수면 아래 잠재되어 있던 제반 사회적 이슈들이 문해력이라는 화산을 통해 분출된 모양새다. 휴대폰에는 이른바 ‘주작’ 영상이 흘러 다니고, 극단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듣고 보기 거북한 영상들이 눈과 귀를 괴롭힌다. 사회적으로는 시민성이 떨어져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개인적으로는 허위조작정보에 말려들어 막대한 피해의 늪에 빠질 수 있다. 시청자들은 <당신의 문해력> 시리즈를 보면서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내일을 걱정하지 않았을까?

캐나다 미디어 학자 마셜 맥루한(Herbert Marshall McLuhan)은 텔레비전을 ‘쿨 미디어’로 분류했다(McLuhan, 1994). 그가 미디어를 ‘핫(hot)’과 ‘쿨(cool)’로 구분하면서 ‘핫 미디어’는 많은 정보량을 전달하고, 단일 감각기관으로 해석하는 탓에 정보가 왜곡될 수 있으며, ‘쿨 미디어’는 적은 정보량을 여러 감각기관에서 동시에 소화하기 때문에 피로감이 덜하다고 설명했다. 맥루한의 구분대로라면 라디오는 귀를 쫑긋 세워 의자 등받이에서 몸을 떼어야 하고, 텔레비전은 의자에 등을 기대어 편하게 시청하면 되는 쿨미디어다. 그의 저서 ‘인간의 확장’은 1964년에 처음 출간되었다. 텔레비전보다 라디오가 인기를 누리던 시대다. 60여 년이 훌쩍 흘렀다. 맥루한의 구별이 지금도 통할까? 아쉽게도 현실은 ‘쿨’한 미디어를 ‘쿨’하게 볼 수 없는 지경이다. 사실을 보도하고 진실을 다루는 신뢰도 높은 언론, 수용자들이 믿고 보는 콘텐츠를 제공하는 방송, 생비자(Prosumer)로 표현되는 디지털 시대 수용자들과 함께하고 그들의 권리를 소중히 여기는 미디어는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미디어가 살아남기 위한 필수조건이 되었다(봉미선·신삼수, 2020). 텔레비전이나 휴대폰에서 맞닥뜨리는 영상이 진짜인지 허위조작인지, 도대체 누가, 왜 만들었는지, 무슨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 합리적인 의심을 갖고 살아야 하는 세상이다. 리터러시야말로 함께하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 눈뜨고 코 베이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주는 해법 아닐까?

  • 필자 소개_ 봉미선

    EBS 정책연구위원이다. 성균관대학교에서 언론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공영방송 제도, TV 수신료, 미디어 리터러시에 관한 논문과 미디어 전문 서적을 다수 공동 저술하였다. 주요 관심 분야는 공영방송, 공공서비스 미디어, 미디어 리터러시, 보편적 시청권 및 미디어 정책 등이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