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막극은 K-드라마 산업의 연구와 개발을 위한 중요한 자양분으로, 신인 발굴과 기성 작가·감독의 역량 강화에 기여하며 드라마 생태계를 복원한다. tvN의 <오프닝(O’PENing)> 같은 단막극 프로그램은 실험적 형식과 내용으로 K-드라마의 질적 향상을 견인하며, 미래 경쟁력을 높이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글. 윤석진(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K-드라마 산업의 연구 개발, 단막극
[그림 1]
<오프닝(O’PENing) 2024>포스터 (자료: tvN)
마냥 화창하기만 할 것 같았던 K-드라마의 기상도에 먹구름이 잔뜩 꼈다. 글로벌 OTT 플랫폼과 함께 세계가 주목하는 K-콘텐츠의 주역으로 자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신규 제작 드라마가 줄어들고 있다는 보도가 이어진다. 제작이 끝난 드라마들도 편성을 받지 못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한다. 사태 파악과 원인 진단이 한창이지만, 스타급 배우의 출연료를 포함한 제작비 관련의 산업적 차원에 그치고 있다. 모든 산업이 그러하듯, 연구와 개발(이른바 R&D)은 산업의 경쟁력과 지속 가능성을 판단하는 지표이다. 드라마 산업이라고 다를 바 없는데, 이에 관한 진단은 없다.
단언하건대, 드라마 산업에서 연구와 개발은 단막극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단막극은 미니시리즈를 포함한 장편 드라마 제작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막극은 시청률에 근거한 경제적인 이유로 한없이 위축되어 있다. 연구와 개발 없이 성과를 취하겠다는 심보가 아니라면 인식 전환이 필요할 터인데, 현실은 녹록치 않다. 지상파 방송에서 단막극을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제작할수록 ‘손해’가 아니라, 인적 자원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투자’라는 인식의 전환이 시급하다.
지상파 방송에서 단막극은 시청률 저조를 이유로 순차적으로 폐지되었다. 민영방송인 SBS가 2004년
<오픈드라마 남과 여>
를 폐지한 것을 필두로 2007년 MBC의
<베스트극장>
이 폐지되었다. 공영방송 KBS의
<드라마시티>
마저 2008년 정규 편성에서 제외되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2010년
드라마 제작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극본과 연출 그리고 연기 분야의 새로운 인력 공급이 원활하지 않다 보니, 영화계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인력이 드라마 제작에 참여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 OTT 플랫폼의 활성화로 드라마와 영화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현실을 고려하면 특별히 문제 삼을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영화계도 새로운 인력 충원이 원활하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이조차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 드라마는 작품의 물리적 길이가 길어 스토리 전개의 완급을 조절하는 스토리텔링이 영화와 다르다. 물리적 길이가 짧아도 단막극이 영화와 다른 이유다. 그런 만큼 미니시리즈를 포함한 장편 드라마의 호흡을 익힐 수 있는 단막극에 관한 연구와 개발이 절실하다.
<오프닝(O’PENing)>
은 케이블 방송 tvN의 단막극 프로그램이다. 2017년
<드라마 스테이지>
로 시작하여 2022년
<오프닝(O’PENing)>
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2024년 현재 드라마 연구와 개발의 전초 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상업 방송의 단막극이라는 점에서 공영방송의
주지하다시피, 단막극은 내용에 따라 최소 1회에서 최대 4회까지로 구성한다. 물리적 길이가 짧은 만큼 스토리의 밀도가 높아 미니시리즈나 장편 드라마에서 시도하기 어려운 내용과 형식 실험이 가능하다. 단막극을 통한 내용과 형식 실험은 최소 2개월에서 최대 6개월까지 긴 호흡으로 방영하는 속성 때문에 영상 미학적으로 새로운 양식 실험을 시도하기 어려운 미니시리즈와 장편 드라마의 질적인 향상을 견인한다. 신인 작가와 감독 그리고 배우들의 등용문 역할은 물론, 기성 작가와 감독 그리고 배우들에게도 새로운 도전을 통해 예술적 역량을 강화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tvN의
<오프닝(O’PENing) 2024>
는 미니시리즈나 장면 드라마에서 보기 어려운 감각으로 K-드라마의 미래 역량 강화에 이바지하고 있다. 딸을 위해 평생 희생했던 중년의 여성이 트로트 가수의 팬클럽 총무로 종횡무진 활약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덕후의 딸>
, 어린 시절 버림받은 상처로 인해 사람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 젊은 여자와 화가로서의 존재감을 인정받지 못한 채 고향에 돌아온 젊은 남자의 정서적 교감을 느낄 수 있는
<고물상 미란이>
같은 단막극들이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장면 연출로 도파민 과잉을 유도하는 K-드라마의 디톡스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우리 여름>역시 한때 신인 배우의 등용문이었으나 지금은 명맥이 끊어지다시피 한 ‘청소년 드라마’의 계보를 이으면서 K-드라마가 시나브로 잃어버린 감성과 감각을 일깨웠다. 시청률로 단막극의 가치를 재단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1부작으로 구성한
<덕후의 딸>
이나
<고물상 미란이>
와 달리, 2부작으로 구성한
<아름다운 우리 여름>
은 10대 청소년들이 남모를 아픔 속에 서로 의지하며 성장하는 과정을 제목만큼이나 발랄하고 상큼하여 형상화하였다. 햇볕 알레르기로 고통받다가 안타깝게 18살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네쌍둥이 막내 ‘나라’의 시선으로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해 죽음을 생각하는 19살 ‘여름’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상당히 참신하다. <아름다운 우리 여름>은 네쌍둥이의 출산 소식을 전하는 뉴스에 이어, 이들의 성장기를 촬영한 ‘인간극장’ 유형의 휴먼 다큐멘터리 ‘소중한 네쌍둥이’ 방송 장면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네쌍둥이네 가족이 살아가는 아파트 옆집으로 19살의 ‘여름’이 혼자 이사 오면서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으로는 많이 곪아 있”었던 인물들의 속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네쌍둥이의 막내는 1부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프도록 뜨거웠던 열아홉 여름, 아름다운 우리가 여름을 만났다.”라고 말한다. ‘아름(유영재)’ ‘다운(손상연)’ ‘우리(김민기)’ ‘나라(김소혜)’로 이름을 나눠 가졌던 네쌍둥이 가운데 유일한 딸이어서 엄마와 각별한 사이였던 막내 ‘나라’의 시선으로 그려나가는 19살의 여름은 매우 뜨거웠다. 부모의 이혼으로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엄마의 재혼으로 혼자가 된 여고생 ‘여름(장규리)’은 의도치 않게 막냇동생의 죽음 이후 각자의 방식으로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세쌍둥이의 관찰자가 된다. ‘여름’은 ‘나라’의 빈자리를 채우며 쌍둥이네 가족들의 돌봄을 통해 부모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 ‘나라’는 ‘여름’의 입을 빌려 쌍둥이 남매들과 엄마를 위로한다. 두 명의 여고생 ‘여름’과 ‘나라’는 ‘노란 양산’을 매개로 상징적 동질성을 담보한다. 19살 청소년의 성장과 가족의 본질 성찰이라는 다소 밋밋할 수 있는 스토리를 ‘시점’의 교집합이라는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내면서 극적 매력을 더한다. 엄마의 재혼과 유럽 신혼여행으로 혼자 지냈던 6주 동안 발생한 사건(이 글을 읽는 이들이 드라마를 꼭 봤으면 하는 생각에서 스포일러성 내용 생략) 때문에 강제 전학 조치를 당하고, 이로 인해 이사까지 하게 된 ‘여름’의 사연에 도파민을 자극하는 일부 에피소드가 있지만, 여타의 드라마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드라마의 전체 분위기와 정서에 어울리지 않게 튀지만, ‘여름’의 캐릭터를 구체화하고 ‘여름’을 향한 세쌍둥이네 가족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한 설정으로 받아들일 만하다. ‘여름’의 상처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아니었다면, ‘나라’의 죽음 이후 각자 다른 방식으로 고통을 감내하는 세쌍둥이의 속내와 이들의 엄마 마음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세쌍둥이네 가족에게 위로받은 19살의 ‘여름’은 폭우가 쏟아지던 19살의 여름에 딸을 출산하고 세상이 무서웠다는 엄마의 마음을 이해한다. 여름에 낳아서 아무렇지 않게 ‘여름’이라는 이름을 지었을 거란 생각이 틀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갓 태어난 너를 안고 창밖을 보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해가 쨍쨍하게 떠 있는 거야. 진짜 예쁜 여름날이었어. 그래서 네 이름 여름이라고 지은 거야. 그렇게 살았으면 해서. 내 딸이 나랑 다르게, 예쁘고 강한 여름처럼.” 엄마의 바람처럼 ‘여름’은 세쌍둥이와 함께 여름을 보내면서 한 단계 성장했다. ‘나라’도 쌍둥이 남매들에게 “난 너희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여행도 떠나고, 첫사랑도 하고, 생일도 함께 보내고. 셋이서 같은 애 좋아해서 싸우지는 말”라는 바람을 전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나라, 그리고 여름”이 마무리 된다.
<아름다운 우리 여름>
은 OTT 플랫폼이 주도하는 드라마 환경에서 느끼기 어려울 정도의 청량감이 넘치는 ‘청소년 드라마’이자 가족의 의미를 성찰하는 ‘가족 드라마’이다. 다양한 캐릭터와 풍성한 에피소드를 2부작으로 응축하여 풀어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소재와 주제, 그리고 캐릭터와 플롯 등 드라마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조합이 뛰어나다. 최다형 작가와 정다형 감독이 호흡을 맞춘 미니시리즈 드라마를 기다리게 할 만큼 단막극의 매력을 잘 살렸다. 정다형 감독이 연출한
<오프닝(O’PENing) 2023>
의
<복숭아 누르지 마시오>
는 ‘제19회 서울드라마어워즈’ 단막극 작품상을 받았다. 이러한 성과가 <아름다운 우리 여름>으로 이어진 것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래서 다시 이야기한다. 단막극은 투자 대비 수익률이 떨어지는 상품이 아니라, 연구와 개발이 필요한 드라마 생태계의 자양분이다. 신인과 기성을 아울러 작가와 감독 그리고 배우가 새롭게 등용되고 자기 계발을 할 수 있는 연구와 개발의 전초 기지로서 단막극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드라마 생태계는 적자생존이 아니라 공생과 상부상조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단막극은 시청률 지상주의가 훼손한 드라마 생태계를 복원하는 지름길이자, K-드라마의 기상도에 드리운 먹구름을 거둘 수 있는 비법이다.
글로벌 OTT 플랫폼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K-드라마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사례도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는 글로벌 OTT 플랫폼이 구축되기 전까지 K-드라마가 성취했던 결실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글로벌 OTT 플랫폼이 K-드라마의 단물만 빨아먹는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K-드라마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자 한다면, 드라마 구성의 기본 요소인 캐릭터와 플롯의 실험이 가능한 단막극을 마중물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 신인은 물론 기성 작가와 감독 그리고 배우와 촬영 등의 역량을 강화하면서 K-드라마의 미래를 낙관할 수 있다. KBS의
<드라마스페셜>
과 tvN의 <오프닝(O’PENing)>처럼, 글로벌 OTT 플랫폼에서도 단막극을 만날 수 있기 바란다.
신인 작가 배출의 전초 기지, tvN
도전 정신이 아름다운 단막극
[그림 2]
tvN <고물상 미란이>(자료: tvN)
[그림 3]
tvN <아름다운 우리 여름>스틸컷 (자료: tvN)
단막극의 실험 정신, K-드라마의 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