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방송의 근본을 흔들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방송은 그것을 흡수하며 진화해 왔다. 컬러 TV는 화면의 문법을 바꿨고, 디지털 편집은 후반 작업 방식을 변화시켰으며, 인터넷은 유통 구조를 재편했다. 그러나 AI는 제작 과정의 특정 단계를 개선하는 수준을 넘어, 콘텐츠란 무엇인지, 누가 만드는지, 누구를 위한 것인지라는 방송의 근본적인 질문 자체를 바꾸고 있다. 즉, 기술적 진보를 넘어선 패러다임 전환이다.

영국 옥스퍼드대 알렉스 코녹(Alex Connock)은 미디어 산업에서 AI 도입으로 인한 미디어 지형 변화를 세 단계로 구분한다.1) 2007년 유통 및 추천 알고리즘, 2017년 후반 작업 도구, 2020년 이후 기획 단계 침투를 거쳐, 2026년 현재 AI는 ‘기획–제작–후반–유통’ 전 과정에 스며든 정착기에 도달했다. 2025년 상반기 국내 콘텐츠 사업체 생성형 인공지능 활용은 20%로, 2024년 하반기 대비 7.1% 상승했다.2)20%라는 수치는 기술이 본격적으로 확산되는 대중화의 전환점을 의미한다. 특히 방송·영상 산업의 활용률은 26.6% 증가하며 두드러진 확산세를 보였다. 중요한 점은 창작의 영역에서 AI가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생성형 AI의 주요 활용 분야는 ‘콘텐츠 제작’(63%)과 ‘콘텐츠 창작’(43%)으로 조사됐다. 이 변화는 단순한 효율 향상을 넘어, 콘텐츠의 서사 구조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지금 미디어는 서사와 매체가 융합되고, 창작자, 시청자, 출연자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플랫폼까지 통합되는 새로운 콘텐츠 생태계가 형성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AI는 보조 도구에서 창작의 주체로 급속하게 진화하고 있다.

방송 제작 현장 속 AI 활용과 흐름: 자동화에서 서사적 행위자로

방송 제작 현장에서 AI 활용 양상은 크게 두 축으로 읽힌다. 하나는 AI가 제작 효율을 높이는 도구로 기능하는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AI가 콘텐츠의 서사적 주체로 진화하는 방향이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다양한 시도들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으며, 이 스펙트럼 위에 놓인 다양한 사례들을 따라가 보면 AI의 역할이 어떤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는지가 잘 드러난다.

첫째, 전편 AI 제작형이다. 인간 창작자가 기획 방향을 설정하되, 제작의 전 과정을 AI가 수행하는 방식이다. EBS 〈AI 단편극장〉의 에피소드 〈뤼순에서〉는 편당 제작비 70만 원 수준을 목표로 한 100% AI 제작 프로젝트로 설계되었다.3) 기존 애니메이션 한 편에 1,200~1,500만 원이 들던 비용 구조와의 극적 차이는, 앞으로 AI 제작이 방송 제작 체계를 근본부터 흔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EBS는 이를 계기로, 올해 100% AI 제작 콘텐츠를 본격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영국 AiMation Studios의 〈Non-Player Combat〉(2025)도 전편 AI 제작형의 해외 사례다. 6명의 AI 캐릭터가 무인도에서 생존 경쟁을 벌이는 이 리얼리티쇼는 캐릭터, 배경, 대화, 행동이 모두 AI로 생성되며, 5명으로 구성된 제작팀이 2개월 만에 4개 에피소드를 완성했다. 시즌 전체 제작비는 전통 리얼리티쇼 한 회 제작비의 10% 수준에 불과했다.4) 중국 CCTV의 AI 애니메이션 '천추시송'(2024)도 26편, 회당 7분 분량 고전 시 애니메이션을 생성형 AI로 제작하며 제작 기간을 전통 방식 8개월에서 4개월로 단축했다.5) 여기서 핵심은 비용 절감이 아니다. 어떤 이야기를 할지, 어떤 장면을 선택할지, 어떤 감정을 남길지는 여전히 인간 제작자의 판단에 달려 있다. 즉, 전편 AI 제작형은 무인 제작이 아니라 인간의 판단이 더욱 농축된 고강도 제작 방식에 가깝다.

둘째, 정보 영상 자동화형이다. 정형화된 텍스트 정보를 AI가 자동으로 영상으로 변환하는 방식으로, AI가 뉴스와 같은 정보 콘텐츠 영역에 직접 적용된 유형이다. 이 경우, AI는 반복적이고 구조화된 작업을 인간의 개입 없이 연속적으로 처리한다. 연합인포맥스의 ‘인포X’는 생성형 AI 방송뉴스 제작 플랫폼으로, 보도자료 같은 텍스트를 입력하면 AI 에이전트가 이를 방송용 대본으로 작성하고, AI 아나운서 음성과 이미지, 영상 자료를 결합해 30초에서 5분 길이의 숏폼 뉴스 영상을 자동 생성하는 자동화 시스템이다.6) SBS는 인공지능 기반 미디어 혁신을 포괄하는 통합 브랜드 ‘스브스 AI’를 론칭하고, 핵심 서비스인 ‘데이터랩스’와 ‘미디어랩스’를 도입하였다. 데이터랩스는 콘텐츠 기획 및 편성 단계에서 음원 분석, AI 자동 선곡, 협찬고지 항목 자동 파악 등을 통해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을 지원한다. 미디어랩스는 인물 자동 검색, 영상 정보 자동 추출, 하이라이트 자동 추천 등을 통해 제작 현장의 효율을 높이고 디지털 채널 운영의 자동화를 뒷받침한다.7) 이처럼 정보 영상 자동화형은 포맷과 길이, 구성 요소가 일정하게 반복될수록 콘텐츠 구조가 더 정형화되고, AI를 적용했을 때 효율성과 효과가 가장 크게 나는 유형이다.

셋째, 촬영 및 편집 보조형이다. 인간이 연출의 주도권을 유지하되, AI가 제작 과정의 특정 구간을 보조하거나 대체하는 방식이다. KBS AI ‘버티고’는 8K 영상에서 인물을 자동 추적해 멀티뷰 영상을 생성한다. 이 기술은 NHK 〈홍백가합전〉 제작에도 적용됐다.8) 2025년 방영된 MBC 〈PD수첩〉의 계엄 상황 AI 영상 구현은 물리적 촬영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AI가 실제 촬영을 대체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해외에서는 넷플릭스가 AI 후반 작업 스타트업 인터포지티브를 인수하며 자동화를 본격화했고, 할리우드 주요 스튜디오들도 법적·노동 리스크가 상대적으로 낮은 후반 작업 공정부터 AI를 표준 워크플로우로 편입하는 추세다.

넷째, 포맷 및 플랫폼형이다. AI가 콘텐츠의 중심 서사 주체로 등장하거나, 이용자가 직접 참여해 스토리를 만드는 방식이다. 여기서 AI는 단순 도구를 넘어 서사적 행위자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MBC 〈PD가 사라졌다〉(2024)의 AI PD ‘엠파고(MPAGO)’는 캐스팅, 미션 설계, 연출, 실시간 편집, 출연료 산정 등 기존 인간 PD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설계되었고, MBC 〈A-IDOL〉(2025)의 AI 프로듀서 ‘로디아이’는 참가자의 노래, 안무, 표정, 무대 매너를 분석하고 평가하며, 오디션 프로그램 진행부터 심사까지 주도한다. ‘엠파고’가 인간 출연자를 낯선 규칙 속에 던져 반응을 관찰하는 실험실 관리자에 가깝다면, ‘로디아이’는 참가자의 성장을 돕고 감정을 조율하는 평가자이자 조력자에 가깝다.

해외에서는 페이블 스튜디오의 ‘쇼러너(Showrunner)’가 프롬프트만으로 애니메이션 에피소드를 생성하고, 사용자가 캐릭터로 등장할 수 있는 인터랙티브 플랫폼으로 주목받고 있다.9) 사용자는 텍스트 몇 줄만 입력해서 자신만의 에피소드를 만들거나 기존 시리즈 세계관 안에 새로운 이야기를 추가할 수 있다. 이 유형에서 시청자는 세계관과 스토리에 개입하는 참여자로 이동하며, AI는 인간과 함께 공동 창작 주체로 자리 잡는다. 이러한 주요 흐름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분명하다. AI는 인건비와 시간을 줄이는 보조 도구를 넘어, 제작 시스템과 포맷 문법을 재정의하는 핵심 인프라로 위상이 전환되고 있다.

AI 활용의 진화 방향과 지속가능성의 과제

이제 질문은, ‘이러한 흐름이 앞으로 방송 제작 생태계에서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것인가?’이다. 첫째, 방송사의 파이프라인 인프라화이다. AI를 전면에 내세운 혁신 기술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제작 공정을 지탱하는 기본 인프라로 편입하는 방향이다. EBS는 생성형 AI를 도입해, 기존에 편당 800만~1,000만 원이 들던 인문 교양 프로그램 제작비를 700만 원 이하로 낮추면서 비용 부담 때문에 미뤄두었던 프로젝트를 다시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10) 이렇듯 AI는 방송사가 그동안 경제성 문제로 포기했던 기획을 다시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둘째, 1인 크리에이터의 창작 자율성 확대다. AI 기술을 활용해 ‘기획, 제작, 편집, 유통’ 전 과정을 한 사람이 수행하는 1인 제작 파이프라인 구축이 점점 구체적인 현실이 되고 있다. 중국 센스타임의 ‘세코 2.0(Seko 2.0)’은 대본만 입력하면 최대 100부작까지의 숏드라마 시리즈를 자동 생성하는 드라마 생성 에이전트로, 에피소드 전반에 걸쳐 캐릭터, 장면, 소품의 서사적 일관성을 유지하도록 설계되었다.11) 최근 보도에 따르면, 상용 AI 드라마 제작 솔루션들은 이미 분당 제작비를 약 30달러 수준까지 낮추고, 하루 수백 편의 숏드라마를 양산하는 ‘AI 드라마 공장’에 가까운 생산성을 구현하고 있다.12)

그러나 생산 수단이 이처럼 급격히 평준화될수록, 역설적으로 기획력과 독창적 세계관의 희소성은 더 커진다. 인간의 상상력이 결여된 콘텐츠는 곧바로 소비자의 관심에서 밀려나 ‘디지털 폐기물’로 사라지기 쉽기 때문이다.13) 유튜브도 2026년에는 저품질 AI 콘텐츠의 확산을 줄이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고 밝혔다. AI가 영상 제작의 진입 장벽을 획기적으로 낮출수록, 콘텐츠의 가치는 무엇을, 어떻게 차별적으로 구성하는가를 기준으로 재편될 것이다.

셋째, 엔터테크 영역에서는 방송, 게임, 가상현실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이용자 상호작용에 따라 AI가 서사를 실시간으로 생성하는 가상융합 콘텐츠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한상열(2025)은 “우리는 흔히 메타버스에 AI가 기여한다고 말하지만, 이제는 메타버스 또한 AI의 진화를 돕고 있다”며 “두 기술은 서로를 보완하고 강화하며 함께 진화하고 있다”고 분석한다.14) 메타버스는 AI 학습에 필요한 풍부한 상호작용 데이터를 제공하고, AI는 이를 바탕으로 개인화된 세계와 서사를 생성함으로써, 두 기술 간의 선순환 구조를 형성한다. 이러한 공진화는 엔터테크 뉴미디어를 견인하는 핵심 동력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향성을 관통하는 공통 핵심과제는 결국 지속가능성이다. 2026년 3월, 오픈AI ‘소라’의 갑작스런 서비스 종료 발표는 이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소라의 총매출 210만 달러는 하루 이틀치 운영 비용에도 미치지 못했다.15) 이 사례는 기술적 완성도와 경제적 지속가능성이 별개의 문제임을 증명한다. 최근 K-콘텐츠 제작사의 67%가 '툴 피로'를 호소하며 AI 플랫폼을 선호한다고 답한 조사 결과는, AI 평가 기준이 '얼마나 놀랍게 생성하느냐'에서 '얼마나 지속 가능한 구조인가'로 옮겨가야 함을 시사한다.16)

공진화가 만드는 새로운 방송 생태계

AI가 바꾸는 방송의 미래는 결국 ‘섞이는 판’의 이야기다. 방송사는 AI 인프라를 확장하고, 1인 크리에이터는 기획부터 촬영, 편집, 유통까지 스스로 해내고, 엔터테크 기업은 방송과 게임, 가상현실을 넘나들며 새로운 장르의 콘텐츠를 연이어 선보이게 될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서로를 잠식하는 경쟁이 아니라, 서로 융합되어 밀어 올리는 공진화 과정이다. 앞으로의 제작자는 ‘감정 큐레이터’, ‘AI 콘텐츠 설계자’와 같은 직함으로, AI와 사람, 데이터와 감정을 어떻게 조합할지 설계하고 감독하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17) 따라서 결국 자기만의 세계관과 워크플로우를 설계할 수 있는 크리에이터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경쟁력 있는 크리에이터는 AI를 많이 쓰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도구를 어디에 쓸지 선별하고 자신의 워크플로우에 맞게 설계할 줄 아는 사람이다. AI 시대에도 결국 차이를 만드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그것을 활용해 새로운 서사와 경험을 설계하는 창작자의 역량일 것이다.

최민근

최민근
(MBC 글로벌IP 제작팀 PD)

서강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뉴욕시립대학교에서 TV Production 전공으로 MFA, 런던대학교 골드스미스(Goldsmiths)에서 Screen Drama Direction 전공으로 MA를 취득했으며, 현재 서강대학교 가상융합전문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2005년 MBC 예능 PD로 입사한 이후 20년간 <진짜 사나이>, <황금어장>, <라디오스타>, <무한도전> 등 다양한 장르의 예능 콘텐츠를 기획·연출해 왔으며, 현재는 <잇츠라이브>를 연출하고 있다. 2024년에는 세계 최초 AI 연출 프로그램 <PD가 사라졌다>, 2025년에는 세계 최초 AI 오디션 프로그램 <A-IDOL>을 기획·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