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이후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SK그룹 회장)은 반도체·인공지능 등 첨단산업 협력을 축으로, 한국과 일본이 시장과 산업 기반을 연결해 하나의 경제권으로 협력하자는 ‘한일 경제공동체’ 구상을 여러 차례 제안해 왔다. 혼자 만들기 어려운 시장은 함께 만들고,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은 나누자는 구상이다.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방향에는 공감했지만, 현실보다는 이상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제도와 이해관계가 다른 두 나라의 협력을 선뜻 그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5년 도쿄에 부임해 한일 콘텐츠산업의 변화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적어도 콘텐츠 분야에서는 두 나라가 완성된 콘텐츠를 사고파는 단계를 넘어 기획과 투자, 제작, 유통을 함께 설계하는 움직임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며 떠올린 개념이 한일 콘텐츠 시장의 ‘공동시장화’이다.
여기서 공동시장화란 한국과 일본의 콘텐츠 시장이 제도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서로 다른 두 나무가 각자의 뿌리를 유지한 채 가지를 맞대어 자라는 연리지처럼, 양국 콘텐츠산업이 각자의 생태계를 유지하면서 기획과 투자, 제작, 유통과 소비의 여러 지점에서 연결돼 가는 현상을 뜻한다.
과거 한일 콘텐츠 비즈니스의 중심은 완성작 수출과 판권 거래였다. 한국 드라마와 예능이 일본 방송사와 플랫폼에 판매되고, 일본 만화와 소설이 한국에서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됐다. 리메이크와 포맷 판매도 주요 협력 방식이었다. 이 단계에서 양국은 대체로 콘텐츠를 ‘만드는 시장’과 ‘구매하는 시장’으로 구분돼 있었다.
최근에는 이러한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한국의 기획・제작 역량과 OTT 경험, 일본의 원천 IP와 배급망을 결합하려는 움직임이 늘고 있다. 협력도 공동기획과 제작을 넘어 웹툰・웹소설의 영상화, 캐릭터 상품화, 무대 공연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 같은 변화는 양국 산업이 처한 현실적인 사정이 있다. 한국 콘텐츠산업은 세계 시장에서 높은 인지도를 확보했지만, 제작비 상승과 국내시장의 성장 한계에 직면해 있다. 글로벌 OTT의 투자 환경도 이전과 달라졌다. 한국 기업에는 제작비 부담을 나누면서 안정적인 유통망과 IP 확장성을 함께 확보할 파트너가 필요하다. 큰 내수시장과 다양한 원천 IP, 방송사・출판사・광고회사・유통기업이 축적한 사업 기반을 보유한 일본은 매력적인 파트너다.
일본에서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위기의식이 높다. 애니메이션, 게임, 만화 등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지만, 드라마와 예능 실사 영상의 해외 진출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다. 큰 내수시장은 산업의 안정적인 기반이었으나, 기획과 제작, 권리 관리, 유통 생태계를 국내시장 중심으로 형성하게 한 배경이기도 했다. 방송 광고 시장의 구조 변화와 글로벌 OTT의 영향력 확대는 일본 방송사와 제작사에도 새로운 사업모델을 요구하고 있다.
2023년 일본 콘텐츠의 해외 매출은 약 5조 8천억 엔으로 이 가운데 게임이 약 3조6천억 엔, 애니메이션이 약 1조7천억 엔으로 전체의 약 90%를 차지한다. 반면, 영화·방송 등 실사 영상 콘텐츠의 해외 매출은 약 1,405억 엔에 그쳐 장르 간 격차가 크다. 일본 정부가 최근 실사 콘텐츠의 국제 경쟁력 강화에 주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 방송사와 제작사는 해외 파트너와의 공동제작을 통해 제작 규모를 키우고, 글로벌 OTT에 적합한 기획・제작・유통 방식과 IP 사업 경험을 축적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단순한 콘텐츠 공급국이 아니라 글로벌 제작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파트너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정책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콘텐츠를 새로운 핵심 산업으로 육성하고, 2033년까지 콘텐츠 해외 매출 20조 엔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여기서 해외 매출은 통관 기준의 수출액이나 일본 기업에 실제로 환류되는 수입만을 뜻하지 않는다. 해외 현지에서 일본 콘텐츠와 관련해 발생한 소비와 시장 규모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지원 확대와 함께 정책 추진체계를 일원화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일본의 콘텐츠 지원은 경제산업성, 문화청, 총무성, 외무성, 내각부에 분산돼 있어 정책 간 연계가 부족하고 기업이 필요한 지원을 한 곳에서 받기 어렵다는 지적이 이어져 왔다. 이에 기획과 제작, 인재양성, 해외 유통과 사업화를 연계해 지원할 전담조직을 신설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처럼 콘텐츠사업 지원을 종합적으로 수행하는 기관을 참고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아직 조직 형태와 권한이 확정된 단계는 아니지만, 흩어진 정책과 지원 기능을 하나의 체계로 묶으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정책 전환을 대표하는 지원사업이 경제산업성의 ‘IP360’이다. 올해 본격적으로 추진된 IP360은 2026년 기준 약 333억 엔 규모로, 애니메이션・만화・게임・실사 영상・음악 등을 대상으로 9개의 세부 보조사업을 운영한다. 하나의 IP를 제작해 해외에 판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획과 제작, 유통, 현지화, 홍보, 상품화 등 IP 생태계 전반을 해외 시장으로 확장하려는 사업이다.
<표 1> IP360 지원 대상분야 및 세부 사항
(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2026). 해외산업동향. <IP360 : 콘텐츠산업 성장 투자 지원 사업>, 오사카 26-1호, p.5)
과거 일본의 해외 진출 지원이 번역과 자막 제작, 해외 행사 참가와 홍보에 집중됐다면, IP360은 신규 IP 기획과 대규모 제작부터 해외 유통, 현지화, 장기적인 IP 사업화까지 지원 범위를 넓혔다. IP360을 포함한 일본 콘텐츠산업의 육성 예산은 2026년 589.3억 엔으로 전년 대비 2배 이상 증가했다. 새로운 정책 도입에 비교적 신중한 일본이 이처럼 대규모 예산을 편성한 것은 콘텐츠산업의 구조를 글로벌 시장 중심으로 바뀌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방송영상 분야에서는 IP360의 대규모 작품 제작지원과 로케이션 유치 지원이 특히 주목된다. 세부 예산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두 사업은 합쳐서 약 150~200억 엔 규모로 추정된다. 대규모 작품 제작지원은 글로벌 진출을 겨냥한 게임・애니메이션・실사 영상의 제작비를, 로케이션 유치 지원은 공동제작 등 해외 스튜디오가 주도하는 실사 작품의 일본 내 제작비를 지원한다. 두 사업 모두 제작비의 50%까지 지원하며, 지원 한도는 제작지원은 사업자당 최대 15억 엔, 로케이션 유치 지원은 작품당 최대 15억 엔이다. 완성작의 수출을 돕는 수준을 넘어 일본 자체를 글로벌 제작 거점으로 전환하려는 산업 정책에 가깝다.
다만 현장의 반응은 엇갈린다. 사업 인지도가 충분히 높지 않고, 실효성에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대규모 제작지원에는 게임 10건, 애니메이션 8건, 실사 영상 9건 등 총 19개사 27건이 선정되었지만, 대형 제작사 프로젝트가 대부분이다. 로케이션 유치 지원은 토호 톰보픽처스(TOHO Tombo Pictures) 한 곳만 선정되어 현재 추가 선정이 진행되고 있다. 과거 작품의 최고 매출액이 10억 엔 이상이고, 지원 프로젝트의 일본 내 제작비가 8억 엔 이상이어야 하는 등 신청요건 자체가 높아 참여할 수 있는 기업이 제한적인 한계가 있다. 정책의 방향은 분명하지만, 산업 전반의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중견・중소 제작사와 해외 파트너의 참여 통로를 넓힐 필요가 있다.
지원 대상은 당연히 일본 사업자다. 한국 기업이 이를 활용하려면 일본 제작사나 방송사, 배급사 등 신뢰할 수 있는 현지 파트너를 확보해야 한다. 어느 나라에서 어떤 비용을 지출할지, 각 기업이 어떤 역할과 권리를 가질지를 기획 단계부터 설계해야 한다. 한국의 지원사업과 IP360, 일본 지방자치단체의 로케이션 지원을 하나의 프로젝트 안에서 연계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 IP360은 한일 공동제작에 활용할 수 있는 재원이면서 단기적인 거래를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협력으로 전환하도록 요구하는 제도이기도 하다.
국제 공동제작의 핵심은 제작비 분담만큼 기획 단계부터 시장과 역할, 권리를 함께 설계하는 데 있다. 양국 시장을 우선할지, 처음부터 글로벌 OTT 유통을 목표로 할지에 따라 소재와 출연진, 제작 규모, 언어, 홍보 전략이 달라진다. 저작권과 유통권, 후속편・리메이크 제작권, 포맷권, 상품화권도 초기에 협의해야 한다. ‘글로벌 진출’은 결과를 수식하는 구호가 아니라 기획과 계약부터 반영해야 하는 사업 조건이다.
양국의 제작 관행 차이도 넘어야 한다. 한국은 제작사와 방송사, 플랫폼을 중심으로 비교적 신속하게 의사결정이 이뤄지지만, 일본은 방송사・광고회사・출판사・배급사 등이 참여하는 제작위원회 방식이 발달해 있다. 투자 위험을 분산하는 데 유리하지만, 권리가 여러 기업에 나뉘어 글로벌 사업을 신속하게 추진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공동제작’이라는 용어의 의미도 다르다. 한국에서는 공동기획과 제작 협력까지 포괄해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일본에서는 주로 출자와 저작권 보유를 수반하는 계약적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처음부터 공동제작이라는 형식을 정하기보다 공동기획, 공동개발, IP 협업, 로케이션 협력 등 가능한 방식을 구체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일본에서 공동제작보다 새로운 가치를 함께 만든다는 뜻의 ‘공창(共創)’이 자주 사용되는 배경이기도 하다.
정책 지원과 기업 간 교류가 확대된다고 공동제작이 저절로 성사되는 것은 아니다. 한일 기업의 협력은 여전히 개별 인맥이나 특정 작품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한 작품이 끝나면 네트워크가 단절되고, 축적된 정보와 경험이 다음 프로젝트로 이어지지 않는 한계도 있다. 공동제작을 산업적 흐름으로 정착시키려면 파트너를 연결하는 데서 나아가 양국의 제작・투자 구조와 계약・권리 체계를 함께 이해하고 협업 경험을 다음 사업으로 축적하는 플랫폼이 필요하다.
한국콘텐츠진흥원 도쿄비즈니스센터가 올해 처음 개최하는 ‘한·일 콘텐츠 공동제작 위크(日韓コンテンツ共創ウィーク 2026)’는 이러한 간극을 줄이기 위한 시도다. 포럼과 기업 피칭, 비즈니스 매칭, 실무 워크숍, IP 법률상담, 콘텐츠 전시 등을 통해 기획 발굴부터 파트너 연결, 제작구조 이해, 계약과 권리 협상까지 공동제작에 필요한 과정을 하나의 프로그램 안에 담는다. 일본의 제작위원회와 수익 배분 방식, 지역별 로케이션 지원처럼 개별 기업이 파악하기 어려운 정보도 다룬다. 한국 기업을 일본에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과 협력할 의지가 있는 일본 기업의 기획을 발굴한다는 점도 중요하다.
[그림 1] 한·일 콘텐츠 공동제작 위크 2026
(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도쿄비즈니스센터 제공)
한일 콘텐츠 시장의 공동시장화는 단순히 콘텐츠를 더 많이 사고파는 데 있지 않다. 한 작품의 우연한 성공을 반복 가능한 협력 구조로 바꾸고, 다음 프로젝트로 이어지게 만드는 데 있다. 일본 정부가 정책의 사령탑을 정비하고 IP360으로 글로벌 제작 기반을 확충하고 있다면, 공동제작 위크는 양국 기업이 파트너와 프로젝트를 만나는 현장이다. 정책과 기업, IP와 자본, 제작과 유통을 연결하는 접점이 쌓일 때 두 나라가 시장을 함께 만들고 위험을 나눈다는 구상도 콘텐츠산업의 현실이 될 수 있다.
- 일본 경제산업성(2025). <엔타메・크리에이티브산업전략 – 콘텐츠산업 해외매출 20조 엔 달성 위한 5개년 실행계획(エンタメ・クリエイティブ産業戦略―コンテンツ産業の海外売上高20兆円に向けた5ヵ年アクションプラン)>.
- 일본 경제산업성(2026). <엔타메・크리에이티브산업전략(エンタメ・クリエイティブ産業戦略2026)>.
- 일본 VIPO(2026). 「IP360 보조금」사업 안내 및 분야별 공모요강.
- 한국콘텐츠진흥원(2025). 해외산업동향. <일본 방송 산업 및 한일 공동제작 동향>, 도쿄25-10호.
- 한국콘텐츠진흥원(2026). 해외산업동향. <IP360 : 콘텐츠산업 성장 투자 지원 사업>, 오사카 26-1호.
- 한국콘텐츠진흥원(2026). 해외산업동향. <일본 방송산업 동향 : TV를 떠나는 시청자, 세계로 향하는 일본 방송사>, 도쿄 26-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