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프리미엄 콘텐츠의 격전지로 떠오른 한국 OTT 시장에 HBO가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쿠팡플레이는 워너브러더스 디스커버리(Warner Bros. Discovery, Inc.)와의 콘텐츠 협력 파트너십을 통해 2025년 3월 21일부터 ‘미드 명가’라 불리는 HBO 오리지널 콘텐츠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전에도 일부 OTT(Over-the-Top) 플랫폼이나 케이블 PP(Program Provider) 채널을 통해 HBO의 일부 콘텐츠가 서비스된 적이 있기는 하나, 이번처럼 대량의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공급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처음이다.
HBO는 1972년에 출범한 미국 최초의 유료 케이블 TV 채널이다. ‘미드 명가’라는 수식어답게, HBO는 고품질 프리미엄 드라마 브랜드로서 확고한 위상을 구축해 왔다. 대표작으로는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 <밴드 오브 브라더스 (Band of Brothers)>,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 <체르노빌(Chernobyl)> 등이 있다. OTT 플랫폼인 HBO Max(현재는 ‘Max’로 서비스명 변경함)가 출범한 이후로 글로벌 콘텐츠 기업으로서의 위상을 확대해 나가는 추세이다. 특히, HBO의 콘텐츠 중 <왕좌의 게임>은 전 세계적으로 흥행했다고 평가받는다. 드라마 장르에서 구현하기 쉽지 않은 판타지 장르물인 <왕좌의 게임>은 판타지라는 표면적인 특성과는 달리 정치, 사회 영역에서의 현실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묘사해 내며 많은 이들의 호평을 얻기도 했다. <왕좌의 게임>을 포함한 몇몇 작품이 전 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국내에도 HBO 콘텐츠에 대한 충성도가 일정 수준 형성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쿠팡플레이와의 콘텐츠 협력 파트너십 체결은 단순한 유통 계약을 넘어, 일반 대중을 향한 본격적인 시장 진입, 즉 HBO의 국내 ‘상륙’의 첫 발걸음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국내 시장에서 HBO 콘텐츠 서비스가 시작된 지 두 달이 지난 지금, 이제는 HBO 콘텐츠의 ‘상륙’을 넘어 ‘안착’의 가능성을 살펴볼 시기다. 이를 위해 국내 이용자들이 HBO의 어떤 콘텐츠에 관심을 두었는지 살펴보자. 2025년 5월 22일 기준, 쿠팡플레이가 제공하는 HBO 콘텐츠의 인기 상위 10위권(TOP 10) 순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위는 <왕좌의 게임>, 2위는 <더 라스트 오브 어스(The Last of Us)>, 3위는 <섹스 앤 더 시티>, 4위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 5위는 <하우스 오브 드래곤(House of the Dragon)>, 6위 <더 피트(The Pit)>, 7위 <트루 디텍티브 나이트 컨트리(True Detective: Night Country)>, 8위 <웨스트월드(Westworld)>, 9위 <더 퍼시픽(The Pacific)>, 10위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Zack Snyder's Justice League)>로 나타났다. 이들 작품의 몇 가지 특징을 살펴보자.

5월 기준 HBO 콘텐츠 인기작
쿠팡플레이의 공식 정보에 따르면, <왕좌의 게임>은 2011년, <섹스 앤 더 시티>는 1998년, <밴드 오브 브라더스>는 2001년에 각각 처음 방영된 작품이다. 여기에 더해 7위 <트루 디텍티브>는 2014년, 8위 <웨스트월드>는 2016년, 9위인 <더 퍼시픽>은 2010년에 공개되었다. 흥미로운 지점은 TOP 10에 이름을 올린 HBO 콘텐츠 가운데 절반에 넘는 여섯 편이 첫 방영 이후 최소 10년, 길게는 27년이 지난 작품이라는 것이다. 빠르게 변하는 콘텐츠 시장, 신작 중심의 OTT 플랫폼 경쟁 환경 속에서도, 이들 작품은 여전히 시청자의 선택을 받고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시간의 흐름을 견디고, 세대를 뛰어넘어 지속적으로 회자되고 사랑받는 콘텐츠를 우리는 흔히 ‘명작’이라 부른다. <왕좌의 게임>, <섹스 앤 더 시티>, <밴드 오브 브라더스> 등은 각각의 장르와 형식 안에서 완성도 높은 내러티브, 시대를 앞서간 주제 의식, 그리고 기술적 연출력까지 두루 갖춘 프리미엄 콘텐츠로 평가받는다. 단순히 과거의 히트작이 아닌,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보고 싶은 콘텐츠'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이들 작품은 명실상부한 HBO 명작의 위상을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또한 이러한 명작 콘텐츠들은 국내에서도 여전히 높은 인기를 누리며 지속적으로 소비되고 있다. 단순히 ‘명작’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넷플릭스와 같은 구독형 OTT 서비스의 등장은 이용자의 콘텐츠 소비 패턴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변화 중 하나는 바로 ‘반복 시청(repeat viewing)’의 확산이다. SSCI 등재 학술지 Journal of Media Economics에 게재된 콘텐츠 관련 연구에 따르면, 영화나 드라마 콘텐츠에 대해 정서적 유대감을 강하게 느끼는 이용자일수록 해당 콘텐츠를 반복적으로 소비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연구 결과를 토대로 해석해 보면, HBO의 대표작들이 오랜 시간 동안 정서적 몰입과 감정적 연결을 기반으로 한 팬덤을 형성해 왔으며, 이러한 요인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반복 소비되며 상위 순위에 오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출시한 흥행 작품들의 특성도 여겨볼 만하다. 쿠팡플레이 HBO 작품 인기 순위 2위인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2023년에 공개된 작품으로 인류 문명이 무너진 세계에서 소녀와 남성이 감염병을 피해 여정을 떠나는 생존 드라마이다. <오징어 게임>의 수상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즈(Critics Choice Awards)와 골든 글로브(Golden Globe Awards)의 드라마 시리즈 후보로 오를 만큼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하우스 오브 드래곤>은 인기 순위 5위를 기록한 작품으로 드래곤을 지배하던 타르가르옌 왕조 내부의 계승 전쟁을 그린 판타지 왕위 쟁탈극이다. 2023년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드라마 부문 최우수 TV 시리즈를 수상할 만큼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마지막으로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는 앞선 작품과는 달리 장편 영화이다. DC 코믹스의 슈퍼히어로가 총출동해 지구를 구한다는 전형적인 팀업 히어로 장르이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HBO 최신작의 공통된 특성이 있다. 바로 원천 IP를 기반으로 두고 있는 ‘IP 확장 콘텐츠’라는 것이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게임사 너티 독이 2013년에 출시한 액션 어드벤처 게임을 원작으로 하며, 현재까지 4,000만 장 이상 판매된 글로벌 히트작이다. <하우스 오브 드래곤>은 HBO의 명작 <왕좌의 게임> 프리퀄 시리즈이자, 장르 소설인 <불과 피>를 원천 IP로 삼고 있다.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는 배트맨으로 유명한 DC 코믹스 IP를 기반으로 한 대표적인 슈퍼히어로 팀업 영화다.
이러한 IP 확장 콘텐츠는 이용자의 심리적 진입 장벽을 낮추는 역할을 한다. 콘텐츠에 깊은 관심이 있는 이용자라면 HBO라는 브랜드에 익숙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일반 시청자에게 HBO는 낯선 브랜드일 수 있다. 이때, 이용자에게 익숙한 원천 IP, 예컨대 게임, 유명 드라마의 세계관, 혹은 대중적으로 알려진 캐릭터 등은 ‘심리적 저항’을 줄이고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 또한, IP 확장 콘텐츠는 ‘보장된 품질’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며 콘텐츠에 대한 신뢰와 기대감을 동시에 자극한다. 이미 성공한 IP를 바탕으로 제작된 작품은 이용자에게 완성도와 재미를 담보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콘텐츠는 이용자의 연계 소비를 유도하고, 플랫폼 충성도(로열티)를 높이는 동력이 된다. 예를 들어, <더 라스트 오브 어스>를 시청한 이용자는 동일 플랫폼 내 <왕좌의 게임>에 흥미를 느낄 가능성이 있고,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를 감상한 이들은 현재 쿠팡플레이에 서비스되고 있는 DC 코믹스 관련 작품인 <저스티스 리그>,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을 연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HBO의 IP 확장 콘텐츠는 익숙함을 통한 진입 유도, 품질에 대한 신뢰 확보, 콘텐츠 연계 소비 촉진이라는 세 가지 효과를 동시에 이끌어내며, 이용자의 플랫폼 내 체류 시간과 몰입도를 높이고, 콘텐츠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를 강화하는 핵심 전략으로 기능할 수 있다.

쿠팡플레이 메인 화면의 HBO 배너
HBO와의 협력에 대한 전략적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서인지, 쿠팡플레이 역시 HBO 콘텐츠 알리기에 적극적인 플랫폼 전략을 펼치고 있다. 플랫폼 메인 화면에는 ‘콘텐츠의 명가 HBO’라는 전용 배너가 별도로 구성되어 있어 이용자들이 HBO 콘텐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HBO 인기 TOP 20작품, 신규 등록 콘텐츠, 쿠팡플레이 독점 공개 콘텐츠 등을 따로 분류해 소개하고 있으며, 장르, 주제, 콘텐츠 유형별 큐레이션을 통해 이용자가 자신의 취향에 맞는 콘텐츠를 효율적으로 탐색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와 같은 전략은 단순한 콘텐츠 제공을 넘어, HBO라는 브랜드 자체에 대한 신뢰와 프리미엄 이미지를 플랫폼 내에 적극적으로 심어주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이는 이커머스 기업의 멤버십 혜택 중 하나로 여겨졌던 쿠팡플레이가, 이제는 독자적인 콘텐츠 플랫폼으로 정체성을 확장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행보로 해석된다.
HBO의 국내 상륙은 한국 OTT 콘텐츠 시장의 경쟁 구도에 미묘하지만, 분명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와이즈앱 리테일의 조사에 따르면, 2025년 1월 기준 국내 OTT 앱 이용 시간 점유율은 넷플릭스가 61.1%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으며, 티빙이 16.5%, 쿠팡플레이가 10.2%로 뒤를 이었다(와이즈앱 리테일, 2025). 이처럼 넷플릭스가 시장을 선도하는 구도 속에서 HBO 콘텐츠의 본격적인 국내 공급은 국내 토종 OTT 서비스인 티빙과 쿠팡플레이의 경쟁 구도에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음을 시사한다.
헤럴드 경제 보도에 따르면, 2025년 3월 쿠팡플레이의 월간 활성 이용자 수(MAU)가 748만 명으로 확인되었고, 이는 티빙의 705만 명보다 앞선 수치이다(박세정, 2025). 해당 조사 시기가 HBO 콘텐츠의 독점 공급 시점과 겹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HBO 콘텐츠가 쿠팡플레이의 이용자 확대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쿠팡플레이 입장에서 HBO 콘텐츠는 단순한 ‘보완재’가 아니라, OTT 플랫폼 간 경쟁 판도를 흔들 수 있는 ‘전략적 자산’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내 OTT 시장의 주요 플레이어들은 HBO라는 글로벌 IP의 파급력을 어떻게 활용하고, 어디까지 통제할 것인지에 대해 전략적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새로운 콘텐츠 영역에 대한 선점 여부 역시 향후 경쟁력 확보의 관건으로 작용할 것이다. 티빙이 KBO 리그 중계를 선점한 사례, 쿠팡플레이가 HBO 콘텐츠와 ‘쿠팡플레이 스포츠 시리즈’ 등 특화 콘텐츠를 통해 영역을 확장한 사례는 OTT가 새로운 틈새시장을 개척한 대표적 시도로 볼 수 있다.
“국내 OTT 시장이 넷플릭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국내 OTT 간 경쟁이 심화되고 있다!” 등 의 볼멘소리는 오래전부터 귀가 아프고 닳도록 들어왔다. 중요한 것은 누가 먼저 ‘개척자’로서의 움직임을 실천할 것인가이다. 그런 점에서 쿠팡플레이의 HBO 콘텐츠 독점 제공은 정체된 국내 OTT 시장에 새로운 자극과 실험을 던진 계기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