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게임산업 동향
코지마 프로덕션의 창립자 코지마 히데오는 비디오 게임의 발생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30년 이상 현역으로 활동 중인 게임 개발자로, 모국인 일본과 해외 모두에서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으며 현재 글로벌 게임업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 중 한 명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의 대표작은 1987년 첫 작품을 시작으로 2015년까지 이어진 잠입 액션 게임 <메탈기어 (Metal Gear)> 시리즈이다.
해당 시리즈는 가능한 많은 적을 쓰러뜨리는 것이 목적인 기존의 액션 게임과는 달리 적의 눈을 피해 미션을 달성하는 속칭 ‘스텔스(stealth)’ 액션을 처음으로 선보이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발전된 기술과 정교해진 스토리를 더하여 30년 가까이 이어진 장수 IP가 되었다. 그러나 <메탈기어> 시리즈를 비롯한 여러 작품의 성공으로 게임 제작사 ‘코나미 (Konami)’에서 부사장의 자리까지 오른 코지마 히데오는 소액 과금 위주의 BM을 가진 캐주얼 모바일 게임 제작에 집중하려는 회사와 여전히 완성도 높은 고품질 콘솔용 게임 제작을 원하는 자신의 의견 차이로 인해 갈등을 겪었고, 2015년에 오랜 기간 몸담았던 코나미를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퇴사 직후 자신의 이름을 딴 독립 게임 제작사 코지마 프로덕션을 설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코지마 히데오 출처 : IMDb다른 일반적인 게임 제작자들과 코지마 히데오의 가장 큰 차이점은 게임을 단순한 유흥 또는 아이들의 놀이라고 생각했던 당시의 많은 제작자들과는 달리 게임이 제작자의 철학과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매체(media)라고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게임을 영화나 드라마, 소설 등과 동일하게 여긴 것인데, 이는 코지마 히데오의 커리어 목표가 본래 영화감독이었던 점과도 맞닿아 있다.
영화 제작을 꿈꿨던 코지마 히데오는 커리어 초반, 영화계에서는 자신이 뜻한 바를 이루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게임 제작자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순수 놀이로서의 게임으로 <펭귄 어드벤처(Penguin Adventure)>를 성공시켜 보다 자유로운 제작 권한을 얻게 된 코지마 히데오는 <메탈기어> 시리즈의 첫 작품을 제작하면서 자원을 두고 갈등하는 인간과 반전 메시지 그리고 애국심의 양면성을 스토리에 녹여냈다. 이러한 경향은 그의 또 다른 히트작이자 SF 소설의 거장 ‘필립 K. 딕(Philip K. Dick)’의 작품을 연상케 하는 <스내처(Snatcher)>에서도 나타난다. 코지마 히데오는 인간을 흉내 내는 범죄 안드로이드가 등장하는 <스내처>에서 사회를 지탱하는 요소로서 신뢰가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제기했다.
또한 코지마 히데오는 영화계에 몸담으려 했던 자신의 성향을 연출에도 반영하여, 게임에 영화적 연출 기법을 가장 적극적으로 접목하기도 했다. 특히, 기술의 발전으로 사실성 높은 그래픽의 게임 제작이 가능해진 이후에는 그러한 시도가 더욱 두드러졌는데, 코지마 히데오는 영화적 연출을 통해 게임 제작자가 의도한 메시지를 플레이어에게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메탈기어솔리드2: 선즈 오브 리버티 출처 : Kojima Productiions코지마 히데오가 자신의 제작사 코지마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가장 처음으로 출시한 게임은 2019년 발표한 <데스 스트랜딩(Death Stranding)>이었다. 티저 트레일러부터 신작 영화처럼 제작된 이 게임은 모종의 사건으로 기존의 국가 시스템이 무너진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파편화된 소규모 인간 사회를 다시 연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주인공과 이를 방해하려는 테러리스트 세력, 그리고 관계와 네트워크의 중요성과 집단 간의 믿음이라는 다소 무거운 소재를 주제로 삼았다.
코지마 히데오는 이처럼 깊은 고찰이 필요한 스토리에 게임을 영화처럼 느낄 수 있게 하는 최신의 기술과 엔진을 동원하여 게임 배경과 캐릭터를 창조했고, 그 과정에서 ‘노먼 리더스(워킹데드 시리즈)’, ‘매즈 미켈슨(더 헌트,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 ‘레아 세두(007 시리즈)’와 같은 유명한 헐리웃 배우를 섭외하여 페이셜 및 모션 캡쳐를 진행하여 사실성을 더하는 데 힘썼다.
<데스 스트랜딩>은 컨트롤러로 조작하는 게임적 측면에서도 플레이어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하여 게임 본연의 재미에도 충실했지만, 무엇보다 플레이어가 게임의 스토리에 몰입할 수 있도록 내러티브를 풀어나가는데 가장 큰 힘을 쏟았다. 이를 위해 게임 플레이 중간 ‘컷신(cut scene)’이라고 불리는 시네마틱 영상을 다수 삽입했으며, 플레이어가 조작하는 게임 플레이와 컷신이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이는 코지마 히데오가 영화적 연출을 대거 적용한 <메탈기어> 시리즈부터 강조했던 ‘게임은 능동적으로 하는 영화’라는 그의 생각과 일치하는 연출이기도 하다.
코지마 프로덕션의 첫 작품: <데스 스트랜딩> 출처 : Kojima Productiions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스토리 플롯에 영화를 보는 듯한 연출이 더해진 <데스 스트랜딩>은 결국 정식 영화화가 결정되었다. 지난 2023년 12월, 미국 독립 영화 제작사 A24(A24 Films LLC)는 코지마 히데오와 <데스 스트랜딩> 영화화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A24는 2022년 아카데미 영화제 7관왕에 오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배우 윤여정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비롯하여 다수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한 <미나리> 등 최근 여러 웰메이드 영화를 제작한 신흥 영화 제작사로, 흥행성에만 초점을 맞춘 기존 거대 영화 제작사와는 달리 다양한 장르와 주제의 영화를 제작 또는 배급하고 있다. 이러한 이력을 지닌 A24가 <데스 스트랜딩> 영화화에 관심을 보인 것은 <데스 스트랜딩>이 스토리와 연출 측면에서 영화화 가치가 충분한 작품이라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한편, 코지마 히데오는 <데스 스트랜딩> 영화 제작 발표에서 <데스 스트랜딩>이 게임을 영상화한 기존 작품과는 다른 방향으로 제작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실, <워크래프트 (Warcraft)>, <툼 레이더(Tomb Raider)>, <레지던트 이블(Resident Evil)>, <언차티드 (Uncharted)> 등 이전에도 유명 배우나 대규모 예산을 투입한 게임 기반 영화는 많았지만, 게임을 단순히 스크린으로 옮기거나 원작과 크게 달라 원형을 찾아보기 힘든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코지마 히데오는 “데스 스트랜딩은 그저 게임을 영화로 복사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영화의 특성과 세계에 맞게 데스 스트랜딩을 재창조할 계획”이라 언급하며, “많은 게임 원작 영화가 게이머를 염두에 두고 제작되지만, 우리는 게이머뿐만 아니라 영화 관람자의 시각도 존중할 것”이라 덧붙였다. 다시 말해 오래전부터 영화인들과 많은 교류를 해 온 코지마 히데오가 영화 제작 과정에서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낼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게임 제작과 영화 제작이 완전히 분리되는 것이 보통이었던 기존의 게임 원작 영화 제작 과정에서 새로운 협업 모델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코지마 프로덕션의 게임과 영화의 접목은 최근 게임에서 영화로 확장되는 방향뿐만 아니라 반대로 영화에서 게임으로 확장되는 방향성도 띠기 시작했다. 코지마 프로덕션은 주요 게임 시상식 중 하나인 ‘더 게임 어워드(The Game Awards) 2023’에서 신작 호러 게임 <OD> 제작을 발표했는데, 놀랍게도 미국의 영화감독 ‘조던 필(Jordan Peele)’이 제작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조던 필은 2017년 국내에서도 흥행한 공포 스릴러 영화 <겟 아웃(Get out)>으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2019년 제작한 <어스(Us)> 역시 <겟 아웃>과 같은 공포 스릴러 장르로, 제작비 2,000만 달러로 전 세계 흥행수익 2억 5,000만 달러 이상의 대성공을 거두며 조던 필은 공포 스릴러 장르 영화 제작에 뛰어난 역량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했다. 조던 필이 게임 제작에 참여한다는 사실이 공개되자, <OD>가 뛰어난 각본과 스토리를 지닌 게임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졌다.
<OD> 트레일러 주요 장면 출처 : Gamespot Trailers코지마 히데오는 <OD>가 게임과 영화의 경계선상에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게임과 관련하여 티저 트레일러 외에 아무런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상황에서, ‘<OD>는 어떤 게임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코지마 히데오는 ‘게임이자 영화이며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미디어’라고 답했다. 즉, 코지마 히데오는 <OD>를 통해 게임 또는 영화로 명확히 분류되는 기존의 이분법적 기준으로 분류하기 힘든 새로운 형태의 엔터테인먼트 콘텐츠 제작을 예고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실제로, <OD>의 티저 트레일러는 과거 시청자가 적어도 ‘이것은 게임’이라고 인지할 수 있었던 <데스 스트랜딩>의 트레일러와는 달리 실제 배우를 등장시켜 마치 영화 예고편을 보는 듯하다. 코지마 히데오는 영화와 같은 사실적인 트레일러를 만들기 위해 언리얼 (Unreal) 엔진의 실사형 인간 제작 툴 ‘메타휴먼 애니메이터(Meta Human Animator)’를 도입했고 실제 게임 역시 해당 엔진을 기반으로 제작될 것으로 예상된다. 코지마 히데오는 계속해서 게임을 보다 영화처럼 제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기라성 같은 제작사 및 제작자와 폭넓게 소통하고 있다.
코지마 히데오의 작업 방식은 게임이 단순한 놀이용 엔터테인먼트를 넘어 깊이 있는 스토리와 몰입도 높은 콘텐츠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과거, 영화가 처음 등장했을 때 연극보다 수준 낮은 오락거리로 치부되었지만, 이제는 예술성을 인정받는 것처럼, 코지마 히데오는 게임도 대중 사이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콘텐츠가 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게임에 대한 기존의 고정관념을 불식시키기 위해 모션 캡쳐와 고화질 그래픽과 같은 기술적 혁신을 적극 도입하는 한편, 창의적인 스토리텔링을 결합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코지마 히데오는 게임과 영화 양쪽 모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코지마 히데오의 노력을 가로막는 제한과 장해물이 존재한다. 무엇보다 코지마 히데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최신 기술을 집약한 퀄리티 높은 게임을 제작해야 하는데, 이때 자연히 게임 제작비가 많이 늘어날 수밖에 없으며 그로 인해 많은 예산을 투입할 수 있는 AAA급 제작사가 아닌 이상 코지마 히데오의 방식대로 게임을 제작하기에는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어려움이 있다. 과거, 코지마 히데오가 수십 년 동안 몸을 담았던 코나미에서 퇴사하게 된 이유 중 하나도 코나미가 코지마 히데오가 요구하는 제작 예산에 난색을 보인 부분도 있다.
코지마 히데오가 게임업계와 영화업계가 상호 협업할 수 있는 모델을 제시한 것은 사실이나 아직까지는 게임을 예술성을 띤 콘텐츠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완전히 형성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코지마 히데오가 게임의 예술적 가치를 인정하게 되는 계기를 다지게 한 인물 중 하나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한편, 코지마 히데오는 게임과 영화의 협업과 게임의 예술성 가치를 부각한 것 외에도 게임이 다른 미디어로 확장될 수 있는 유니버스형 콘텐츠가 될 수 있음도 보여주었다. 특히, 최근 발표한 <데스 스트랜딩>의 영화화와 <데스 스트랜딩>의 배경과 세계관을 영화에 맞게 재구성하고 재해석할 것이라는 코지마 히데오의 발언은 게임 스토리텔링의 확장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게임이 출시되고 나서 게임 IP를 기반으로 한 영화나 영화를 기반으로 한 게임은 많았지만, 게임의 영화화 혹은 영화의 게임화는 게임 세계와 영화 세계라는 확연히 구분되고 단절된 매체 사이의 이동을 의미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플레이어가 조작하는 영화’와 같은 <데스 스트랜딩>과 제작 초기부터 조던 필 감독이 참여하는
국내에서 게임은 폭력성을 유발하는 유해 콘텐츠라며 종종 비난의 타깃이 되고는 한다. 이러한 고정관념과 비판적인 인식이 게임이라는 미디어의 확장성을 저해하는 요소일 수 있다. 따라서, 게임 기획과 제작 단계부터 타 매체와의 크로스오버를 염두에 둔 유니버스를 구축해 나간다면 게임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바꾸는 한편, 국내 게임산업에 반등을 가져오는 새로운 활로가 되어줄 것으로 전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