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게임산업 동향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은 오래전부터 기업 운영의 중요 덕목 중 하나로 거론되기는 했으나, 최근 들어서는 ESG(지속가능한 경영)의 대두와 함께 선택적 사항이 아닌 필수 요소로까지 자리 잡아 가고 있다. 또한, 과거 기업의 사회 공헌을 기업이 계획하고 주도했다면 이제는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들이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이를 제품에 반영하도록 요구하는 경우도 늘어나는 모습이다.
이러한 추세에 발맞추듯 게임업계에서도 서구권 제작사, 퍼블리셔 그리고 관련 업체를 중심으로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움직임이 확대되고 있다. 작게는 수익금의 일부를 자선단체나 비영리단체와 나누는 고전적인 기부 행위부터,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진 업체들이 연대하여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형태도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게임업계가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움직임의 예시 중 하나로 비영리 단체 ‘플래닛 플레이(Planet Play)’를 들 수 있다. 플래닛 플레이는 케냐 삼림 벌목을 막기 위한 친환경 연료 보급, 우간다 불린디 침팬지 서식지 복원, 카자흐스탄 아랄 호수 사막화 방지, 뉴질랜드 담수원 미세 플라스틱 절감, 콩고 사와 밀림 조림 등 전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환경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진 다수의 게임 제작사와 파트너십을 맺고 있다.
플래닛 플레이는 별도의 온라인 마켓플레이스를 구축하여 파트너십을 맺은 제작사의 게임을 모아 홍보 및 판매하며, 게임 판매 수익금의 일부를 환경 프로젝트 재원으로 충당한다. 또한, 프로젝트에 투자한 금액과 투자를 통해 감축한 탄소량을 웹페이지에 게시하여 환경 문제에 관심을 지닌 게이머들의 참여 의식을 고취한다. 플래닛 플레이는 게임업계가 환경 이슈에 참여할 수 있는 모델을 제시한 사례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게임업계가 환경 문제 해결의 중심에 나설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또 다른 예시는 ‘UN환경계획(UNEP, United Nations Environment Programme)’의 일환인 ‘플레잉 포더 플래닛(Playing for the Planet)’ 프로젝트이다. 플레잉 포더 플래닛은 UN의 지원 하에 결성된 게임산업 관련 기업의 연합체로, 탄소 감축과 오염 방지, 환경 복구에 적극적으로 기여하기 위해 모였다. 현재 유비소프트(Ubisoft), 아마존 게임즈(Amazon Games), 구글(Google),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 유럽 게임 개발사 연합(EGDF, European Games Developer Federation) 등 세계 유수의 게임 개발사와 퍼블리셔, 관련 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플레잉 포더 플래닛은 게임산업이 오염 물질을 배출하지 않는다는 과거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게임 서비스를 위해 구축된 서버와 데이터센터가 소모하는 전력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기후 온난화 물질이 발생하며 이에 따라 게임산업이 탄소 감축에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플레잉 포더 플래닛은 게임산업이 배출하는 탄소량을 모니터링하는 한편, 매년 UN에 환경 영향 평가 보고서를 제출하고 게임산업이 재생 에너지로 생산한 전력을 사용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또한, 환경 문제 해결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그린 게임 잼(Green Game Jam)’ 컨퍼런스를 2020년부터 매년 개최하고 있다.
플래닛 플레이와 플레잉 포더 플래닛은 게이머들에게 환경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며, 환경 요소를 게임에 접목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플래닛 플레이는 지난 2023년 인기 래퍼 ‘팻조(Fat Joe)’와 함께 온라인 가상 세계 시뮬레이션 게임 <아바킨 라이프(Avakin Life)>에서 환경 이슈를 다룬 캠페인을 진행했다. 해당 캠페인이 진행된 주간, 구글 플레이에서 <아바킨 라이프> 다운로드 수는 전 주 대비 105%가량 증가했으며 캠페인과 관련된 일부 굿즈 판매량은 1,600% 증가했다. 그리고 플래닛 플레이는 캠페인으로 얻은 수익금을 환경 프로젝트와 사회 공헌에 사용했다. 이러한 활동은 플레잉 포더 플래닛 역시 마찬가지로, 플레잉 포더 플래닛에 참여한 게임 제작사는 자신들의 게임에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러티브를 넣거나 수익금의 일부를 탄소 감축 프로젝트에 투자하고 있다.
환경 요소를 게임에 가장 정교하고 광범위하게 적용한 게임으로는 해외 인디게임 제작사 ‘스트레인지 루프 게임즈(Strange Loop Games)’가 개발 중인 <에코(Eco)>가 있다. <에코>는 멀티플레이 위주의 3D 샌드박스 게임으로, 게임에 접속한 플레이어들은 30일 후에 충돌할 운석을 막아내야 한다는 공동의 최종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해 플레이어들은 주변 환경에서 자원을 채취하여 운석 충돌에 대비할 수 있는 수단을 만들고 관련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에코>의 가장 큰 특성이 여기서 나타나는데, 자원을 채취하고 기술을 개발할수록 인근의 동식물 개체가 줄어들거나 심할 경우 멸종한다. 또한, 토지와 물이 오염되기에 플레이어는 기술 개발과 자연 보호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 이에 더해, 플레이어는 운석 충돌에 대비하는 동안 음식물과 영양소를 섭취하며 생존해야 하는데, 이 역시 주변 환경이 파괴되면 음식물을 구하기가 더욱 어려워져 운석 충돌 전에 엔딩을 맞이할 수도 있다.
<에코>는 환경 보호와 관련하여 플레이어의 사회적 의사 결정도 요구한다.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해 개발을 제한하는 정책 등을 제안할 수 있으며, 입안된 정책은 커뮤니티 내에서 민주적인 투표로 실행 여부를 결정한다. 다시 말해, <에코>는 환경 보호가 어느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의 힘으로만 이룰 수는 없으며 사회 구성원이 서로 각자의 역할을 분담하여 힘을 모아야 한다는 사실도 플레이어에게 알려준다. <에코>의 제작진은 이러한 시스템을 통해 게임을 즐기는 플레이어에게 환경 문제를 인식시켜 실생활에서도 행동에 나설 것을 기대하고 있다.
<에코>는 지난 2018년 크라우드 펀딩 킥스타터(Kick Starter)를 통해 개발 자금을 모으며 제작에 착수했다. 자금 부족 등의 이유로 앞서 해보기 상태로 업데이트를 지속하고 있으나, 게임 자체는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2024년 말 혹은 2025년 초 정식 출시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출시와 함께 서버를 확대하면 환경 요소를 가장 정교하게 녹여낸 게임으로서 인정받을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게임을 누가 가장 빠른 시간에 클리어하는가를 다투는 ‘스피드런(Speed Run)’은 게이머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높은 콘텐츠 중 하나이다. 플레이어들은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해 최적의 루트를 개발하고, 한 치의 실수도 하지 않도록 수많은 연습을 한다. 창의성과 피지컬이 모두 뒷받침되어야 승리할 수 있는 스피드런은 해당 게임을 가장 잘 플레이하는 사람들이 총출동하는 이벤트이기도 하다.
이러한 스피드런 콘텐츠의 인기로 인해 스피드런 대회는 수익을 낳을 수 있는 이벤트로서 나날이 부상 중이다. 미국의 스피드런 대회 ‘AGDQ(Awesome Games Done Quick)’는 수년 전부터 여러 종류의 스피드런 게임을 일주일 동안 마라톤 형식으로 진행하는 이벤트를 열고 있다. 화제성이 높아지며 여러 기업이 스폰서로 참여 중이며, 대회는 매년 상당한 수준의 수익을 내고 있다.
2018~2024년 AGDQ 모금액 추이 출처 : Games Done QuickAGDQ는 이를 수익을 올릴 기회로만 삼지 않고, 대회를 통해 사회에 공헌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매년 대회를 통해 모금한 금액을 사회단체에 기부하는데, 지난 2023년에는 일주일 동안에만 250만 달러(약 35억 원) 이상을 모금하여 ‘암 예방 재단(Prevent Cancer Foundation)’에 전달했다.
AGDQ는 자칫 오락거리로 끝날 수 있는 게임 이벤트가 사회에 공헌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한편, AGDQ의 취지에 공감하는 수많은 게임 개발사가 자사가 개발한 게임이 대회 종목으로 선정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AGDQ는 대회에 참가한 게임의 홍보와 판매를 촉진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이처럼, AGDQ는 도움이 필요한 사회 구성원과 게임 개발사 모두에게 서로 이익이 될 수 있는 이벤트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한편, AGDQ는 대회의 화제성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깜짝 행사도 기획했다. 지난해에는 시바견 ‘피넛버터’가 주인의 지시를 따라 스피드런 게임을 클리어하는 묘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AGDQ는 앞으로도 스피드런 대회가 단순히 게이밍 스킬을 겨루는 이벤트가 아니라 여러 화제를 낳고 이를 통해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로 만들어 나가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게임업계가 사회적 이슈에 관심을 가지고 행동하게 된 시작점에는 2010년 설립된 ‘험블번들(Humble Bundle)’이 있다. 인디게임 개발자들이 세운 험블번들은 게임이나 콘텐츠를 디지털 콘텐츠의 패키지로 묶어 게이머들에게 저렴한 가격에 판매한다.
당초 게이머들에게 주목받지 못하고 사장되어 가는 인디게임 판매 활성화를 위해 설립된 험블번들이지만 파격적인 가격 정책으로 큰 주목을 받으며 이제는 메이저 게임 판매 플랫폼이 되었다. 험블번들의 주력 판매 콘텐츠는 여전히 게임이며, 게임을 중심으로 패키지 대부분을 구성한다.
험블번들은 인디게임 개발사를 돕기 위해 세워진 기업이념을 확장해 패키지 판매 수익을 각종 사회 문제 해결과 비영리 단체 지원에 사용하고 있다. 또한, 사회적으로 크게 화제가 된 이슈가 발생하면 해당 이슈 해결에만 사용하는 별도의 특별 패키지를 출시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던 지난 2020년에 ‘코로나 극복 험블번들(Humble Conquer COVID-19 Bundle)’을 내놓았다.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사망한 조지 플로이드 사망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정의로운 인종 의식을 위한 투쟁 번들(Humble Fight For Racial Justice Bundle)’을 기획했고,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우크라이나 지지 번들(Humble Stand with Ukraine)’을 출시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에볼라 등 여러 전염병 퇴치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질병의 이름을 딴 번들을 출시하기도 한다.
더불어, 험블번들은 게임 구매 시 구매자가 자신이 지불한 금액 중 얼마 정도를 어디에 기부할지 결정할 수 있다. 비영리 단체를 직접 지정할 수도 있으며, 금액 전액을 모두 단체에 기부해 험블번들은 아무런 수익도 얻을 수 없는 옵션도 가능하다. 이러한 ‘페이왓유원트 (Pay What You Want)’ 시스템으로 험블번들은 기부의 투명성을 높이고 구매자가 사회 문제에 참여했다는 고양심을 강화하기도 한다.
이처럼 다양한 패키지와 투명한 방식으로 험블번들은 설립 후 지금까지 여러 사회적 활동에 총 2,500만 달러(약 350억 원)를 지원했다. 험블번들이 강력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자 험블번들과 유사한 플랫폼도 생겨나고 있다. 험블번들은 게임이 저연령층이 즐기는, 사회 이슈에서 다소 멀리 떨어진 영역이 아니라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선하고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가장 두드러진 사례라고 평가할 수 있다.
게임 그 자체만 아니라 게임을 둘러싼 외적 가치에 주목하려는 경향은 국내 게이머들 사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2023년 말, 넥슨이 자사의 오랜 인기작 <메이플스토리>의 아이템 옵션 생성 확률을 소비자에게 불리하게 조작하여 부당 이득을 취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국내 주요 게임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넥슨에 대한 비판과 <메이플스토리> 불매 운동이 펼쳐졌다. 게이머들의 강력한 항의에 부딪힌 넥슨은 즉시 사과문을 게재하는 한편, 앞으로 운영 방안에 대해 게이머들과 더욱 투명하게 소통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비슷한 시기 게임사의 도덕성이 도마 위에 오른 또 다른 사건이 있다. 신생 게임 제작사 아이언메이스는 신작 MMORPG <다커 앤 다커(Darker and Darker)>를 출시했다. 그러나 넥슨의 전 직원이 설립한 아이언메이스가 넥슨의 개발 리소스를 불법적으로 취득하여 게임을 개발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에 일부 게이머들을 중심으로 비도덕적인 게임사의 제품인 <다커 앤 다커>를 소비해서는 안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메이플스토리> 이슈에 대해서는 넥슨을 비판한 게이머들은 <다커 앤 다커> 논란에서는 반대로 넥슨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다.
<메이플스토리> 확률 조작 사건과 <다커 앤 다커> 개발 소스 불법 유출 사건에 대한 게이머들의 반응은 게임 소비자들이 개발사의 도덕성을 기준으로 해당 문제에 접근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다시 말해, 이제 게임사들은 게임 본연의 재미와 구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책임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 될 수 있다.
한편, 올바른 사회적 가치를 지지하는 과정에서 긍정적인 사회적 파급 효과가 나타난 사례는 또 있다. 넥슨이 게임 이용자와의 갈등을 빚던 시기,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향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넥슨이 비상 대책에 나서고 어린이 재활병원 푸르메재단에 운영 기금 3억 원을 기부하자, 게이머들은 넥슨의 결정을 반기며 개인적인 기부에도 동참했다. 여러 게임 커뮤니티에 올라온 게이머들의 개인적 기부 금액만 대략적으로 합산해도 수억 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는 등 해당 사건은 게이머들이 자발적으로 선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게임업계의 선행은 개발사나 이를 둘러싼 게이머들에 한정되지 않는다. 또 다른 사례는 스타 플레이어 사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항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이자 오랜 기간 <리그 오브 레전드(League of Legends)> 게임의 강자로 이름을 알린 ‘페이커’ 이상혁 선수는 최근 유니세프(Unicef) 교육 지원 사업을 홍보하는 유니캐스터(Uni-Caster)로 선정되었다. 이상혁 선수는 2018년부터 유니세프의 아동 및 청소년에 대한 폭력 근절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으며, 자신의 유명세가 아동 폭력 방지 및 교육 사업 활성화에 도움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상혁 선수는 지금까지 여러 자선 단체에 수억 원을 전달하는 등 기부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게임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고 영향력이 커지면서 게임 개발사 또는 스타 플레이어가 사회에 미치는 여파도 확대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과거 스포츠 스타가 사회 공헌에 앞장섰던 자리에 프로게이머도 앞으로는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에 더해, 최근 국내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도덕과 윤리,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고려한 소비 행태가 강화되는 모습이다. 따라서, 게임 개발사의 입장에서도 게임 개발 및 기업 활동에 있어 사회적 영향력을 염두에 두어야 하며 산업의 건전한 성장을 위해 적극적인 사회적 행보가 필요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