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게임산업 동향
1974년 일본 시즈오카에서 태어난 미야자키 히데타카는 어린 시절부터 많은 시간을 도서관에서 책과 함께 보낸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상상력을 더해가며 읽는 방식을 선호했다. 플레이어 스스로 환경에 부딪히도록 하며 상상력과 도전 정신을 자극하는 미야자키의 게임들은 그의 어린 시절 경험과도 무관하지 않으며, 이후 개발한 게임들 속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요소이다.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을 포함해, 일본의 명문 사립대학인 게이오대학의 사회과학부를 마치고 세계적 IT 기업인 오라클(Oracle)에 입사할 때까지만 해도 미야자키의 삶은 게임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다 친구에게 추천받은 게임이었던 <이코(Ico)>를 우연히 플레이한 뒤 게임 개발자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고, 서른의 나이에 직장을 그만두고 소규모 게임 개발사였던 프롬 소프트웨어(From Software)에 말단 코더로 입사하게 된다. 이는 ‘평생직장’의 개념이 뚜렷했던 당시 일본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미야자키 히데타카 출처 : The Gamer프롬 소프트웨어에 입사한 미야자키는 당시 회사의 주력 시리즈였던 <아머드 코어 (Armored Core)>의 기획에 참여했다. 이후 곧장 시리즈 차기작의 디렉터를 맡았고, 그 뒤에 참여했던 <데몬즈 소울(Demon’s Souls)> 프로젝트에서 특유의 색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 게임업계에 뛰어들 때부터 제작을 원했던 판타지 게임이었고, 당시 회사에서 큰 기대를 걸지 않았던 프로젝트였기에 오히려 부담없이 게임을 제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2009년 발매된 <데몬즈 소울>은 발매 초기 부족했던 마케팅과 높은 난이도로 인해 별다른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하드코어한 난이도 속에서도 높은 자유도, 도전 정신을 불러일으키는 독창적 게임 디자인으로 매니아층이 점차 형성되었다. 입소문과 연이은 호평에 힘입어 첫 주차에 불과 2만 장에 불과했던 <데몬즈 소울>은 최종 100만 장을 판매하며 그의 첫 성공작으로 자리잡았다
<데몬즈 소울>의 성공 이후, 이를 더욱 발전시킨 후속작 <다크 소울(Dark Souls)>을 통해 미야자키는 확실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다. 신작 <다크 소울>은 전작보다 빠른 속도로 팔려 나갔고, 3편까지 발매되며 ‘소울’시리즈의 핵심이 되었다. 도전적인 난이도와 특유의 분위기, 탄탄한 세계관과 게임성으로 세계적인 호응을 얻었다.
<다크 소울>의 성공으로 프롬 소프트웨어는 비로소 게임 제작사로서 본격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2014년 일본의 거대 미디어 기업체 가도카와(Kadokawa)에 인수되었다. 이 시점 미야자키는 인수된 프롬 소프트웨어의 새로운 사장으로 부임한다.
이후 발매한 소울 시리즈로 분류되는 <블러드본(Bloodborne)>, <세키로(Sekiro: Shadows Die Twice)>, <엘든 링(Elden Ring)>으로 그는 ‘골든 조이스틱 어워즈(Golden Joystick Awards) 평생 공로상’, ‘일본 게임 대상 경제산업대신상’ 등을 수상했다. <엘든 링>이 발매된 이듬해, 그는 타임지 선정 ‘2023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게임 제작자로는 역대 두 번째로 선정되기도 했다.
<데몬즈 소울>과 <다크 소울>의 성공으로 이 타이틀들은 게임산업의 새로운 장르로서 자리 잡는다. 소울 시리즈의 성공은 수많은 게임 제작사에 크고 작은 영향을 주었고, 많은 제작사들은 자신들의 게임에 도전적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다. 소울 시리즈와 유사한 게임을 뜻하는 ‘소울라이크(Soulslike)’ 장르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갖는다.
소울라이크 게임의 핵심은 도전과 보상의 순환 구조에 있다. 플레이어가 반복해서 실패를 경험하도록 유도하지만,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얻는 성취감을 강력한 보상으로 제시한다. 특히, 각 스테이지와 보스전은 어렵고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어 플레이어에게 죽음을 수차례 경험하고, 다시 도전할 것을 유도한다.
반복된 실패를 통해 적의 패턴을 분석하고 최적의 공략법을 찾아 끝내 성공하는 과정에서 성취감은 극대화되며, 이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도전과 성장의 가치를 경험하게 된다. 능동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하고 반복적으로 도전해야만 클리어할 수 있다는 점이 소울라이크 장르의 큰 특징이라 볼 수 있다.
컬트적 유행으로 자리 잡은 ‘YOU DIED’ 문구 출처 : IBTimes UK, Dark Souls Shop소울라이크 게임은 그간 게임들이 취했던 전통적인 내러티브 전달 방식과는 차별화된 구조를 지닌다. 스토리가 플레이어에게 직접적으로 제시되지 않는 대신, 플레이어는 게임 속 환경을 탐색하고 다양한 단서를 수집하며 숱한 시행착오와 함께 서사를 구성해 나간다. 이러한 방식 속에서 플레이어는 단순히 제시된 스토리를 따라가는 수동적 존재가 아닌, 사건을 조합하고 해석해 길을 개척하는 능동적 존재가 된다.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엄밀한 레벨 디자인이다. 선형적이지 않은 스토리 상에서 플레이어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하기도 하나, 정교하게 설계된 레벨 디자인은 플레이어에게 스토리 진행의 갈피를 제공한다. 이러한 정교한 레벨 디자인은 게임의 난이도와 긴장감을 조율하는 핵심 요소로 작용하며, 몰입을 저해하지 않는 선에서 플레이어가 전략적으로 환경을 이해하고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다.
어려운 책을 읽으며 이야기를 스스로 해석해 나갔던 미야자키의 어릴 적 경험은 도전적인 게임 플레이 방식뿐 아니라 탄탄하고 매력적인 세계관 구축에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그의 작품 대부분에 일관적으로 등장하는 다크 판타지적 세계관과 고딕 호러 등 장르적 요소는 게임을 더 매력적으로 만들었고, 탄탄한 세계관과 게임 내 환경 조성으로 유저들을 게임에 더욱 몰입하도록 이끌었다. 환경 속 상호작용을 통해 스토리를 전개해 나가는 그의 게임 디자인이 성공한 것은 이러한 완성도 높은 게임 내 환경 조성 덕분이기도 했다.
가장 많은 인력과 자원이 투입되었던 <엘든 링>에서는 오랜 팬이었던 <왕좌의 게임> 원작 소설의 작가인 조지 R. R. 마틴과의 협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미야자키는 그에게 게임의 초기 세계관과 신화 창조를 의뢰했고, 이를 조지 R. R. 마틴이 흔쾌히 수락해 초기 게임 제작에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협업으로 제작된 <엘든 링>은 발매 이후 게임성뿐만 아니라 세계관의 압도적 스케일과 높은 완성도로도 많은 주목과 호평을 받았다.
미야자키의 게임은 높은 난이도와 불친절한 진행 방식으로 유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의 선택을 받아 왔다. 단순히 소수의 하드코어 게임을 즐기는 매니아층만이 찾는 게임이 아니라, 다양한 유저층을 섭렵하고 대중적 장르가 된 데에는 게임이 제공하는 도전의 성격이 비교적 정직하다는 것이 주효했다.
물론 직접적인 설명이 적고 함정이나 마주치는 적 하나하나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사실은 플레이어에게 적지 않은 피로를 유발한다. 그러나 함정이나 공격의 패턴은 랜덤하게 변하지 않으며 일정한 규칙성을 가지고 있어 플레이어가 반복 학습을 통해 공략법을 터득할 수 있도록 한다. 특유의 ‘체크포인트’ 시스템으로 인해 죽음의 페널티 역시 다른 RPG 장르 게임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지 않아 플레이어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특징이다. 이러한 게임 디자인 속에서 플레이어는 반복되는 실패에도 성공을 향해 점점 다가간다는 확신을 느낄 수 있게 된다.
한 번 처치한 적은 다시 생성되지 않는다는 것도 장르의 독특한 특징이다. 소울라이크 게임의 상징과도 같은 난이도 높은 보스전의 경우 패턴이 명확하게 한정되어 있어 패턴을 파악하고 조작을 익히면 반복을 통해 클리어가 가능하다. 높은 난이도와 보스의 완성도 높은 디자인은 성공했을 때의 성취감을 배가시키고 플레이어로 하여금 도전을 포기하지 않도록 유도한다.
결국 게임의 난이도는 어렵고 불친절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과정이 불합리하거나 무자비하게 구성되지는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공정한 규칙을 제시하고, 어려운 난이도만큼 높은 성취감을 함께 제시한다. 이러한 공정성과 합리성을 내포한 게임 설계 철학 덕분에 미야자키의 게임은 단순히 소수의 매니아층을 위한 게임으로 남는 것이 아닌 한 시대를 풍미한 대중적 장르가 될 수 있었다.
미야자키가 만든 장르의 성공은 자신만의 것을 높은 기준을 두고 추구하는 일종의 장인 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데몬즈 소울>과 <다크 소울>을 세상에 처음 내놓던 당시에도 중세 판타지 기반 RPG는 이미 구식의 장르로 여겨지고 있었다. 미야자키는 시류에 편승하는 것이 아닌 가장 좋아하고 자신 있는 분야를 누구보다 깊게 파고드는 길을 택했다.
게임의 난이도 측면에서도 현대 게임 시장에서 많은 개발사들이 더욱 대중적인 게임을 만들기 위해 난이도를 낮추거나 플레이어의 편의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가운데, 미야자키는 시류에 반하는 길을 택했다고 볼 수 있다. 불친절하지만 정교한 도전 과제를 제시하며 플레이어로 하여금 직접 게임의 규칙을 깨닫고 환경을 이해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은 당시 주류 게임 디자인의 관점에서 파격적인 접근이었다.
이러한 장인 정신은 단순히 높은 난이도 설정에 그치는 등 자신만의 기준을 고집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게임의 모든 요소 전반에 적절히 스며들어 있다는 점에서 특히 가치가 있다. 디테일에 집중하고, 정해진 스토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닌 부족한 설명 속에서 주체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방식은 기존 게임 개발사들에게 내러티브 전달 방식의 패러다임의 변화를 유도하기도 했다. 점점 더 많은 개발사들이 소울라이크 장르의 영향을 받아, 플레이어의 능동적 참여를 강조하는 설계 철학을 시도하고 있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간 미야자키의 행보는 유행이나 당대의 성공 공식을 따라가는 것에 매몰될 필요는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오히려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분야에서 깊이를 더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정의하는 것이 더 큰 파급력을 발휘할 수 있다. 트렌드에 부합하지 않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유저에 대한 믿음과 함께 자신만의 색채와 철학을 가지고 일관적으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미야자키는 당대 최고의 게임 제작자가 될 수 있었다.
지난해 출시된 엘든 링의 처음이자 마지막 확장팩으로 공언된 <엘든 링: 황금나무의 그림자(Elden Ring: Shadow of Erdtree)>는 본편 엔딩 이후 진출 가능한 새로운 지역과 더불어 기존과는 달라진 방식의 보스전 등을 제공했다. 달라진 보스전 방식에 호불호가 갈리기도 했으나, <다크 소울> 부터 유사한 방식으로 오랜 기간 유지되어 온 보스전 방식에 변화를 주고자 하는 노력이 엿보였다는 긍정적 반응도 다수 존재했다.
미야자키는 팬들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엘든 링>같이 이미 성공한 IP에 기대기보다는 소울라이크 장르를 벗어난 새로운 게임의 개발을 모색하고 있음을 밝혔다. 최근에는 전통적인 JRPG 스타일 게임에도 관심이 있음을 시사하기도 했다. 더불어 다양한 장르의 게임 프로젝트에 동시다발적으로 관여하고 있음을 밝히며, 후배 게임 제작자에게도 기회를 주고자 노력하고 있음을 전했다.
소울라이크의 창시자 미야자키 히데타카의 도전은 하나의 장르를 개척한 뒤에도 멈추지 않고 있다. 그간 10여 개의 게임을 제작하며 뚜렷한 실패작을 남기지 않았다는 점도 앞으로의 행보를 더욱 주목하게 만든다. 기존 장르의 답습이 아닌 새로운 도전을 앞둔 미야자키의 행보에 세계 게이머들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엘든 링: 황금 나무의 그림자> 출처 : Xbox Wi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