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와 원인, 영향

디지털 피로는 스마트폰, 컴퓨터, 태블릿 등 디지털 기기의 과도한 사용으로 인해 정신적, 신체적 피로를 느끼는 상태를 뜻한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십 개의 알림과 메시지를 확인하며 끊임없이 정보를 처리해야 한다. 이러한 정보 과부하는 뇌에 지속적인 자극을 주어 피로감을 가중시키며, 집중력 저하와 정신적 탈진을 초래한다. 특히 업무 외 시간에도 연결이 강요되는 상황은 개인이 완전히 휴식할 수 있는 시간을 빼앗으며, 디지털 피로가 만성화되는 원인이 된다.

이러한 피로는 단순히 정신적인 문제에 그치지 않고, 신체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장시간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면 눈의 피로와 수면 장애를 유발하며, 신체 활동이 줄어들어 비만과 같은 건강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또한, 지속적인 연결 상태에서 발생하는 심리적 압박감은 불안과 우울증을 악화시키며, 개인의 삶의 만족도를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결과적으로 디지털 피로는 일상생활의 전반적인 행복감과 생산성을 저하시켜 개인의 삶의 질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디지털 피로(Digital Fatigue)

출처 : Linkedin

연구의 배경과 목표

최근 영국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Imperial College London)과 오스트리아 그라츠 대학교(University of Graz)의 연구진은 디지털 피로를 겪는 현대인들이 오픈월드 게임을 통해 심리적 안정을 찾을 수 있는지를 분석한 연구를 발표했다. 이 연구는 디지털 기기의 과도한 사용으로 발생하는 디지털 피로와 스트레스, 번아웃이 어떻게 게임 플레이를 통해 완화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기존 연구들은 비디오 게임이 정신 건강에 미치는 일반적인 영향을 다뤄왔지만, 이번 연구는 특히 오픈월드 게임 장르에 집중하여 그 효과를 심층적으로 분석했다.

연구의 주요 목표는 오픈월드 게임이 제공하는 자유와 몰입감이 디지털 피로 해소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파악하는 것이었다. 연구진은 이러한 게임들이 플레이어들에게 스트레스 해소와 정신적 안정에 기여할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했다. 특히, 오픈월드 게임이 다른 게임 장르에 비해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유저간 경쟁적 요소가 적고 자율적으로 탐험하며 상호작용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기 때문에 더 큰 심리적 혜택을 줄 수 있다는 가설을 세웠다.

연구의 방법과 진행 과정

연구는 정량적 조사와 정성적 분석을 결합한 혼합 연구 방법을 사용하여 진행되었다. 연구진은 먼저 609명의 대학원생에게 오픈월드 게임을 플레이하게 한 뒤 설문 조사를 실시하여 정량적 데이터를 수집했다. 이 설문에서는 참가자들이 게임을 통해 느낀 감정 변화, 스트레스 완화 정도, 게임 플레이 빈도 등을 측정했다. 특히, 게임 속에서 느낀 자율성과 몰입 경험이 현실 세계에서의 피로 해소에 미친 영향을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이어서 32명의 참가자를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가 진행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참가자들은 오픈월드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느낀 몰입감과 자율적 탐험 경험에 대해 설명했다. 인터뷰는 게임이 심리적 안정과 인지적 도피를 제공하는 방식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정량적 결과를 보완하고 분석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진행되었다.

연구 결과

연구진은 각 참가자가 선택한 오픈월드 게임을 기준으로, 게임 플레이가 현실의 압박감 완화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7점 척도로 평가하여 정량적 데이터를 확보했다. 정량적 분석 결과,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오픈월드 게임 플레이 후 긴장 완화 및 정신적 웰빙 지표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참가자들은 설문 조사에서 게임이 일상적인 스트레스 해소와 감정적 안정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음을 보고했으며, 게임 속 자율적 탐험과 비선형적 진행이 스트레스 요인으로부터의 인지적 도피를 가능하게 한다고 답변했다.

수집된 데이터는 매개 분석을 통해 더욱 심층적으로 분석되었다. 연구진은 인지적 도피가 플레이어의 긴장을 완화하는 데 유의미한 도움이 된다는 점을 확인했으며(β=0.15, P<.001), 이 과정에서의 긴장 완화 상태가 전반적인 정신적 웰빙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β=0.12, P=.002). 이에 따라, 오픈월드 게임에서의 인지적 도피가 제공하는 긴장 완화가 잠재적으로는 정신적 웰빙에 도움이 된다는 결과를 도출했다.

인터뷰를 통한 정성적 분석에서도 유사한 패턴이 발견되었다. 인터뷰 참가자들은 게임 플레이 중 현실에서 느끼는 압박감이 줄어들고, 게임 속 몰입 경험이 긍정적 감정을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고 언급했다. 연구진은 이러한 매개 분석의 결과와 인터뷰 데이터를 통해 게임이 플레이어들에게 심리적 휴식을 제공하며, 이는 현실 세계에서의 스트레스 관리와 번아웃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오픈월드 게임의 정신의학적 순기능

연구는 오픈월드 게임이 긴장 완화와 디지털 피로 회복, 나아가 정신적 웰빙에 도움을 줄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오픈월드 게임이 이러한 정신의학적 순기능을 갖추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다음은 오픈월드 게임이 다른 게임 장르와 구분되는 주요 특징 세 가지다.

① 자유로운 탐험과 비선형적 전개

오픈월드 게임의 가장 큰 특징은 플레이어가 게임 내 세계를 자유롭게 탐험하며 플레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장르는 전통적인 게임처럼 정해진 경로를 따르지 않고, 플레이어가 자신의 속도와 방식에 맞춰 게임을 진행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러한 비선형적 구조는 플레이어에게 자율성과 몰입감을 제공하며, 게임 속에서의 선택이 플레이 경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한다.

연구에서 자주 언급되었던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는 시작과 결말은 존재하지만, 그 과정 속 진행 순서는 플레이어에게 맡기는 방식을 취한다. 비선형적 전개와 자유로운 탐험이라는 오픈월드의 특징을 뚜렷하게 구현하며 현재까지 3천만 장 이상 판매된 오픈월드 장르의 대표작이다.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출처 : GQ

② 현실적인 상호작용과 환경 변화

또한, 오픈월드 게임은 게임 속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데 중점을 둔다. 플레이어는 게임 내 사물과 환경에 다양한 방식으로 개입할 수 있으며, 이러한 상호작용은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게임 세계에 변화를 일으킨다. 예를 들어, 날씨 변화, 낮과 밤의 주기, 캐릭터의 행동에 따라 디테일하게 반응하는 NPC 등은 게임 속 세계를 더욱 현실감 있게 만든다. 이러한 요소들은 플레이어에게 게임 속 세계가 살아 있는 공간이라는 느낌을 주며, 게임의 몰입감을 극대화시킨다.

③ 경쟁적 요소의 최소화

오픈월드 게임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플레이어 간의 경쟁 요소가 적어 정신적 긴장을 유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많은 게임이 순위 경쟁이나 PvP 시스템을 게임의 핵심 요소로 삼아 경쟁으로 인한 몰입을 유도하는 반면, 오픈월드 게임은 개인적 탐험과 성취에 초점을 맞춘다. 플레이어는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나 경쟁 없이 자신만의 속도로 게임 세계를 탐험하며, 현실 세계에서 느끼는 압박감에서 벗어나 심리적 휴식을 경험할 수 있다. 경쟁에서 파생되는 긴장과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롭다는 오픈월드의 특성은 디지털 피로를 극복하기 위한 첫 단계인 긴장 상태의 완화를 위해 필수적이다.

보조 치료 수단으로서의 게임

이렇듯 디지털 피로 해소에 오픈월드 게임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 외에도, 비디오 게임과 이용자의 정신 건강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그간 꾸준히 지속되어 왔다. 최근에는 게임이 주는 심리적 이점과 높은 접근성이 각광을 받고 있으며, 상담 치료의 보조 치료 수단으로서의 활용 사례 또한 소개되고 있다.

최근 미국에서는 정신 건강 관리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 부족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으며, 성인의 55%와 아동의 49%가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한적인 의료보험으로 인한 경제적 접근성 문제와 교외 지역 인구가 가진 물리적 한계가 이러한 현상의 가장 큰 원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따라서 경제적·물리적 장벽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비디오 게임이 전통적인 상담 치료의 보조 수단이자 대안적 접근법으로 주목받고 있으며, 새로운 치료 도구로서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에서 개발한 게임형 치료 프로그램 는 청소년 우울증 치료에 효과를 보인 사례다. 이 게임은 ‘부정적 자동 사고(GNATs)’를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는 과정을 게임 속 미션으로 구성해, 현실에서도 우울증 관리 기술을 익히도록 돕는다. 연구 결과, 를 사용한 청소년 중 44%가 우울증에서 회복했으며, 이는 기존 상담 치료 그룹의 회복률인 26%보다 현저히 높은 수치였다. 게임의 높은 접근성과 능동적 참여 유도라는 특성이 치료 과정에서 높은 효과를 보인 것이다.

게임형 치료 프로그램

출처 : Google Play

청소년의 우울증 치료를 위해 제작되어 효과를 보였던 외에도 전통적인 상담 치료를 보완하는 게임은 다수 존재한다. 는 가상현실(VR)을 활용한 노출 치료(Exposure Theraphy) 프로그램으로, 플레이어가 단계적으로 가장 두려워하는 환경을 가상 환경에서 체험하도록 한다. 서던캘리포니아대학(USC) 연구팀의 실험에서는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을 대상으로 해당 프로그램을 사용한 결과, PTSD 증상이 유의미하게 감소한 것이 보고되기도 했다.

자연스러운 몰입, 그리고 낮은 문턱이 가진 잠재력

과도할 정도로 높아진 디지털 접근성이 디지털 피로를 유발하기도 하고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가 지나치게 많아진 요즘, 게임은 스스로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있다. 지금의 게임은 과거 그 어떤 시대보다도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가고 있으며, 또 다른 세계로 인식하고 몰입할 수 있을만큼 현실과 가까워졌다. 오늘날 게임은 피로와 스트레스가 범람하는 현실의 정신적 탈출구가 되기도 하며, 보조 치료 수단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앞서 소개된 사례들은 게임이 가진 긍정적 특성이 현대인의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나타낸다. 게임이 가진 긍정적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기 위해서는 게임이 가진 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정신적으로 피로한 현대인에게 오락이라는 게임 본연의 목적과 기능을 놓치지 않고 정신 건강상의 이점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이를 접목시키기 위한 다방면의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