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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를 ‘보는’ 시대의 종말

글. 차우진 | 엔터문화연구소 대표
콘텐츠라는 단어가 너무 자주 쓰여 거의 빈말이 되었다. 그러나 단어가 가벼워지는 동안, 그것이 가리키는 사물의 무게는 오히려 커진 것 같다. 2026년의 어느 날을 사는 한 사람의 하루를 들여다보면 콘텐츠는 출근길의 숏폼이고, 점심 자리의 화제이고, 퇴근 후의 OTT이고, 주말의 팝업 스토어이며, 잠들기 전의 뉴스레터다. 콘텐츠가 이렇게 많은 시간을 차지한 적이 없었다.

적어도 10년 전의 콘텐츠는 ‘보러 가는’ 거였다. 영화를 보러 가고, 음반을 사러 가고, 케이블 드라마를 기다렸다. 우리의 시간은 콘텐츠를 따라갔다. 지금은 반대다. 콘텐츠가 시간을 따라온다. 정확히 말하면 콘텐츠가 시간을 설계하는 쪽에 가깝다. 이런 전환은 ‘디지털 이동’이란 말로는 요약되지 않는다. 콘텐츠가 일상의 인프라가 되었다는 뜻에 가깝다.

콘텐츠 소비의 4단계

발견되고, 체류하고, 화제가 되고, 경험을 제공한다. 2026년의 콘텐츠 소비는 이 네 단어(혹은 4단계)로 요약된다.

발견은 추천 알고리즘의 결과다. 주로 SNS 피드에서 일어난다. 숏폼은 그중 하나일 뿐이다. 사용자가 무엇을 볼지 결정하는 게 아니다. 선택하도록 강요당한다. 무엇이 발견될지 모르는 채로, 알고리즘에 노출된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길이가 아니라 진입 속도다. 처음 3초 안에 시선을 잡지 못하면 그 콘텐츠는 존재하지 않는다. 콘텐츠도, 사용자도 주체가 아니다. 알고리즘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다음 단계는 체류다. 한 번 클릭한 사용자는 같은 플랫폼 안에서 다음 콘텐츠로, 또 다음 콘텐츠로 미끄러진다. 넷플릭스는 자동 재생을 발명했고, 인스타그램과 틱톡은 무한 스크롤을 정교화했다. 체류는 사용자의 자율 선택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알고리즘이 설계한 결과다.

화제의 순간은 콘텐츠가 플랫폼 바깥으로 빠져나올 때 생긴다. SNS의 짧은 캡처, 친구 카톡방의 링크, 점심 자리의 짧은 대화에서 콘텐츠는 비로소 두 번째 생을 얻는다. 이 단계에서 콘텐츠는 더 이상 ‘본 것’이 아니라 ‘대화의 주제’가 된다.

경험은 마지막 단계다. 화제가 된 콘텐츠는 오프라인의 어떤 자리로 이동한다. 사용자도 따라간다. 팝업 스토어, 굿즈샵, 페스티벌, 컬래버레이션 메뉴, 전시 등등. 디지털에서 본 것을 손에 쥐고, 사람들과 나란히 줄을 서고, 사진을 찍고, 그 이미지가 다시 디지털 세계로 돌아가는 순환 구조가 완성된다. 성수동의 골목길이 매주 다른 IP의 임시 거점으로 바뀌고, ‘더현대 서울’의 지하 1층이 콘텐츠의 단기 전시장으로 운영되는 풍경은 콘텐츠 산업의 구조가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보여준다. 콘텐츠를 끝까지 따라간 사용자가 가닿는 곳은 결국 오프라인이다.

이러한 단계 구조는 따로 떨어진 독립적인 구조가 아니다. 짧은 순간, 길어야 하루 안에 거의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다. 출근길에 숏폼으로 어느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본 사람이, 점심에 동료와 그 드라마의 캐스팅 얘기를 하고, 저녁에는 OTT로 본편을 본다. 그리고 주말에 그 작품의 팝업을 찾는다. 발견에서 경험까지 채 일주일도 걸리지 않는, 빠르면 하루 안에 작동하는 자동화 구조에 가깝다.

흥미로운 점은 이 동선의 시작점이 콘텐츠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시작점은 시간이다. 사용자에게 남은 자투리 시간이 있어야 발견이 일어난다. 2026년 한국 콘텐츠 산업의 가장 치열한 경쟁자는 바로 ‘잠’과 ‘식사’와 ‘쇼핑’이다. 콘텐츠는 시간 점유율(time share) 경쟁이다.

© 민음사TV 유튜브 캡처 화면

출판은 이 역설 구조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 환경이 만든 가장 역설적인 풍경은 출판이다. 종이책은 오랫동안 ‘오프라인 콘텐츠’의 대표였다. 그런데 2026년의 출판사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지 않으면 신간을 알리기 어렵다. 민음사의 공식 채널 ‘민음사TV’의 구독자 수는 5월 22일 기준 47만 4천 명이다. ‘탕비실배 요리대회’와 ‘세계문학전집 월드컵’ 같은 기획은 책 자체보다 먼저 화제가 되고, 그 화제가 책의 판매를 끌어올린다.

『시사저널』 보도 1 에 따르면 민음사의 마케팅팀 부장 조아란과 해외 문학 편집자 김민경은 지난 5월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해 ‘출판인 셀럽화’의 첫 사례를 만들었다고 한다. 책이 영상이 되고, 영상이 다시 책으로 돌아오는 구조다. 출판시장 통계에 따르면 민음사의 2024년 매출은 약 206억 원으로 전년 대비 23.4% 증가했다. 2 영업이익은 약 42억 원으로 전년 대비 72.8% 늘었다. 이 숫자가 가리키는 것은 책의 부활이라기보다, ‘책 둘레의 콘텐츠 설계’가 이익으로 환산되는 구조의 등장이다.

‘채널예스’도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작가 인터뷰라는 전통적 포맷을 영상으로 옮기는 데서 시작해, JTBC와 협업한 유튜브 콘텐츠 ‘서탐대실’로 영역을 넓혔다. 출판 매체가 방송사와 손을 잡는 풍경은 5년 전만 해도 어색했다. 지금은 자연스럽다.

이걸 단순히 ‘출판의 디지털 전환’이라고 하면 곤란하다. 핵심은 다른 데 있다. 아날로그 사업자조차 발견·체류·화제 단계 안으로 들어가야 사용자를 마지막 경험(책 구매와 독서)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영화도, 공연도, 전시도 마찬가지다. 오프라인의 마지막 한 장면을 위해 모두가 온라인의 앞 세 단계에 자원을 쏟는다.

매끄러움의 그늘

그러나 여기에 그늘이 있다. 이러한 구조는 사용자에게 풍요로움을 주는 것 같지만, 동시에 사용자의 시간과 주의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침해하는 시스템이기도 하다. 체류 시간이 핵심 지표가 된 플랫폼은 멈추기 어려운 인터페이스를 설계한다. 무한 스크롤과 자동 재생이 사용자를 붙잡는다. 발견에서 경험까지의 동선이 매끄러워질수록 사용자가 ‘동선을 빠져나오는’ 경로는 사라진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동선이 더 매끄러워질 때마다 사용자가 자기 시간을 지키고 유지하는 게 더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이런 환경에서 우리는 늘 피로하다. 도파민에 찌든 뇌가 쉴 틈도 없이 스크롤을 따라가는 동안, 이런 질문도 생긴다.

무한 스크롤의 세계에서 창작자는 첫 3초의 진입 경쟁에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그다음 단계까지 이어지는, 생명력을 가진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화제성과 잔존력은 같은 개념이 아니다. 발견 단계에 강한 작품과 경험 단계까지 살아남는 작품은 애초부터 다른 설계를 요구한다.

또한 플랫폼의 관점에서는, 체류 시간을 무한히 늘리는 설계와 사용자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설계 사이의 어떤 균형이 가능할까. 과연 그럴 의지가 있을까, 혹은 그러한 의지를 약화시키는 구조가 있을까.

마케팅의 관점에서 도달 수치만큼이나 화제성이 사용자 경험으로 이어지는 전환이 중요해졌다. SNS의 1,000만 뷰가 오프라인의 100명을 끌어내지 못한다면, 그 조회 수는 어떤 가치를 가지는 걸까. ‘유명하다’라는 것이 가치를 담보하던 시대는 진즉에 끝났다.

이런 환경에서 정책기관은 오히려 시간 점유를 위한 경쟁 자체를 콘텐츠 산업의 기본 조건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그러한 경쟁이 사용자의 시간 주권을 침해한다는 점을 어떻게 측정하고, 대안을 마련할지 고민할 때도 되었다. 콘텐츠 산업의 성장 지표는 매출과 시청 시간만이 아니다. 사용자가 의식적으로 콘텐츠를 끝낼 수 있는 환경 또한 산업의 지속가능성에 포함된다. 해외에서는 ‘주의 경제’와 ‘디지털 웰빙’이 이미 정책 의제로 다뤄지고 있다. 한국 콘텐츠 정책은 바로 그 자리에서 다음 챕터를 시작할 가능성이 크다.

콘텐츠는 더는 작품이 아니다. 하루를 운영하는 인프라다. 인프라는 일상의 기반이다. 잘 구축되면 일상을 풍요롭게 하고, 잘못 설계되면 일상을 잠식한다. 어쩌면 2026년 콘텐츠 산업의 지속가능성은 ‘사용자가 얼마나 오래 머무르느냐’보다는 ‘사용자가 언제 떠날 수 있는지’에 따라 결정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문화 산업은 언제나 모순적이고 예측 불가능했다. 콘텐츠의 미래, 혹은 내일의 엔터 산업도 마찬가지다.

필자 소개

차우진

엔터문화연구소 대표. 엔터테인먼트 산업 전문 칼럼니스트로 <차우진의 엔터문화연구소> 뉴스레터를 운영하고 있다. 주로 엔터테크 비즈니스 컨설팅과 정부 자문을 병행하며 케이팝, 팬덤, 콘텐츠 비즈니스, AI와 엔터테인먼트의 교차점을 주된 주제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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