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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운맛’ 속 나타난
땅끝마을 소년소녀들

글. 정석희(TV 칼럼니스트)

한동안 드라마 시장의 화두였던 ‘막장’. 막장 드라마는 빠른 전개와 자극적인 소재 탓에 연일 화제였지만, 이어지는 매운맛 세례에 피로감을 호소하는 시청자도 적지 않았다. 이런 시청자들에게 하나의 선택지가 되어준 착한 드라마, <라켓소년단>(SBS)을 들여다본다.

죽지 않고, 싸우지 않는, 평범한 아이들의 세상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만 드라마 속 자극적인 설정이 날로 선을 넘는다. 이젠 흔해진 사이코패스에 소시오패스, 드라마마다 난무하는 살인은 할 말을 잊게 만든다. 장르물이라면, 어른들끼리 복수니 모함이니 하며 죽고 죽이는 전개라면 그러려니 하겠다. 하지만 애꿎은 아이를 단지 극적인 전개를 위해 희생시키는 설정은 지나치지 않은가.

화제 만발인 <펜트하우스 1>(SBS)은 민설아(조수민 분)의 죽음으로, 시즌 2는 배로나(김현수 분)의 죽음으로 문을 열었다(물론 배로나는 살아 돌아오지만). 아무런 잘못 없는 십 대 청소년이 어른들의 야욕에 의해 극중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2018년 최고의 히트작 <스카이 캐슬>(JTBC)도 마찬가지였다. 이 드라마에서도 <펜트하우스>의 민설아처럼 어려운 가정 형편을 딛고 스스로 길을 열어온 김혜나(김보라 분)라는 십 대 청소년 하나가 추락사하며 역시 죽임을 ‘당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시작한 <더 로드: 1의 비극>(tvN)은 더 심각하다. 이번엔 무려 초등학생이 유괴되고 죽는다. 이 또한 어른들의 얽히고설킨 과거사가 살해 이유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인기 드라마들이 아이를 활용하는 방식이다. 답답한 노릇이지 뭔가.

그래도 해괴망측한 설정, 피로 칠갑을 한 것 같은 고구마 전개의 드라마들 가운데 숨통을 틔워줄 청량한 드라마가 나와 줬으니 천만다행이랄 밖에. 대한민국 땅끝마을이 배경인 청소년 배드민턴 선수들의 이야기 <라켓소년단>(SBS)이 그것이다. 모처럼 10대 청소년 중심의 이야기여서, 오랜만에 만나는 비수도권 배경의 드라마여서 반갑다.

승리 아닌 성장 그 자체를 다루다

사실 처음엔 ‘16세 야구 소년이 우여곡절 끝에 배드민턴 선수로 전향하는 이야기’라기에 뻔한 스포츠 성장 드라마려니 했다. 아이들끼리 경쟁하고 질투하고 티격태격하다가 피나는 노력과 각성 끝에 주인공이 최종 승자에 오르는 내용이리라 짐작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이 드라마는 주인공 윤해강(탕준상 분)의 승리로 마무리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여자 친구 한세윤(이재인 분)은 국가대표에 선발되지만 윤해강은 강적 강태선(강승윤 분)을 만나 고군분투 끝에 패하는 바람에 한세윤과 같은 길을 갈 수 없게 된다. 친구들이 눈치를 보다가 해강에게 ‘내년에는 어떻게 할 것이냐’ 묻는다. “열일곱 살 되는 거지. 내년에 고 1이 되는 거지.” 자존감 드높은 윤해강다운 답이다. 이기든 지든 그 모든 것이 삶의 일부분이 아닌가. 그뿐만 아니라 승자독식인 스포츠 세계에서 “져도 돼. 한세윤. 꼭 이번이 아니더라도. 앞으로도. 그동안 고생했다”라고 말해준 윤해강. 한세윤은 그 말 덕에 안정을 찾고 좋은 성적을 거뒀었다. 승리만이 성장이 아니라는 진리를 아이들이 일깨워주는 것이다. 등장인물 하나하나에게서 더 나아질 여지가, 가능성이 엿보인다는 점, 시대가 시대인 만큼 아이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긍정의 기운이 우리로 하여금 희망을 품게 한다.

이 드라마에는 아이들의 성장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어른도 함께 자라난다. 삶을 포기할 결심을 하고 땅끝마을까지 흘러 온 도시부부(정민성, 박효주 분)는 이웃들의 도움으로 살아갈 의미를 되찾고, 마을의 중심축인 홍 이장(우현 분)과 신 여사(백지원 분)는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며 미래를 약속했으니까. 무엇보다 아들 해강의 의중조차 파악 못 할 만치 철딱서니 없었던 윤현종(김상경 분) 코치가 알을 깨고 나오듯 한 걸음 한 걸음 성장하지 않았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민턴은 꼭 인생이랑 닮았다. 너희 땐 스매시처럼 모든 게 빨랐는데 지금은 헤어핀처럼 시간도 생각도 멈춘 것 같아. 오늘 하루가 너무 힘들고 숨 막히니까. 그렇지만 너희들 코치인 게 부끄럽지 않게 어른이라는 게 핑계가 안 되도록 남은 인생 한 경기 열심히 살게.” 아이들과 합심하여 기대 이상의 좋은 성적을 낸 윤 코치의 소회다.

<라켓소년단>에만 있는 이토록 청량한 성장기

흥미로운 건 <라켓소년단>의 아이들과 <펜트하우스 1>의 아이들이 같은 나이라는 사실이다. <라켓소년단>은 김강훈 군이 맡은 용태만 한 학년 아래이고 모두 중 3이다. <펜트하우스 1> 당시 모든 아이들이 청아예고 입학을 꿈꾸는 중 3이었지 않나. 같은 SBS 드라마, 같은 다섯 글자 제목, 같은 나이의 인물들. 그러나 거짓말처럼 딴 세상이라는 게 놀랍다. <펜트하우스>가 사람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악하다는 성악설을 기조로 한다면 <라켓소년단>은 반대로 맹자의 성선설이 바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드라마에는 성질 나쁜 사람도 등장한다. 사기꾼도 등장한다. 순간순간 갈등 상황도 벌어진다. 하지만 다 상식선에서 정리된다. <라켓소년단>은 <펜트하우스>처럼 개연성 없는 드라마가 아니니까.

<펜트하우스>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드라마들이 주인공의 라이벌이라는 이유 하나로 특정 인물을 악인으로 몰아가곤 한다. 주인공을 빛내기 위해 애꿎게 욕받이가 되는, 일평생 모차르트를 질투했던 살리에르처럼 끊임없이 덫을 놓고 온갖 술수를 부리는, 어찌 보면 애처로운 인물들이다. 하지만 <라켓소년단>에는 그런 식으로 희생되는 인물이 없다. 예를 들어 청소년 국가대표 합숙 장면에서 라이벌 세윤(이재인 분)을 이겨 보겠다고 나라(박윤영분)가 훈련 시간이 변경됐다고 거짓말한다. 나라가 아침 훈련 출석 1등을 기록해 감독님의 칭찬을 받고 뿌듯해하지만 실은 세윤이 나라보다 한발 앞서 새벽에 체육관에 다녀갔다는 반전이 숨어 있었다. <펜트하우스>라면 연습이 아닌 경기 시간을 속인다거나 음료수에 졸음 오는 약이라도 타서 큰 낭패를 보게 하지 않았을까?

이 드라마는 <슬기로운 감빵생활>(tvN)의 정보훈 작가가 썼다. <슬기로운 감빵생활>에서 잘 나가던 프로야구 선수 제혁(박해수 분)이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리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감방 신세를 져야 했던 것처럼, <라켓소년단>의 도시 소년 해강도 야구선수의 꿈을 키우다가 빚보증을 잘 못 서 오갈 데 없어진 아버지 윤현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꿈을 접고 땅끝마을로 왔다. 그리고 와이파이가 필요해 역시나 어쩔 수 없이 아버지가 맡은 중학교 배드민턴 팀에 합류하게 된다. 단체전에 나가려면 팀원이 하나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대세를 위한 선택, 희생으로 보였으나 시간이 흐르는 사이 자신이 배드민턴을 원한다는 걸, 뼛속까지 배드민턴 선수라는 걸 깨닫게 된다.

해강은 불만으로 가득 차 깐족거리고 배배 꼬여 있고, 게임 외에는 별생각 없는 아이로 나온다. 비슷한 설정의 여느 드라마였다면 자신의 꿈인 야구를 그만두게 만든 아버지와 대차게 한판 붙었을 것이다. 어쩌면 가출을 감행했을지도 모르고. 화풀이 삼아 주먹다짐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해강은 선선히 현실을 받아들인다. 겉으로만 센척하지 실은 속 깊은 우리 해강. 무심한 부모 대신 어린 동생 해인이를 살뜰히 챙기는가 하면 이웃집 오매 어르신(차미경 분)이 글을 못 읽는다는 걸 눈치채고 슬쩍 리모컨에 사용하기 쉽게 테이핑을 해드린다. 처음엔 와이파이가 필요해 오매 어르신 댁에 드나들었지만, 나중에는 쓸쓸하실까 봐 틈만 나면 그 댁에서 뒹굴뒹굴 놀며 보낸다. 한마디로 진국이다. 요즘 이런 애 있을까? 생각해보니 이 드라마 비현실적이다.

<펜트하우스>와 <라켓소년단>의 나이만 같을 뿐, 마치 딴 세상처럼 극과 극으로 다른 아이들. 둘 다 허구란 걸 잘 알지만, 어쩌면 <라켓소년단> 쪽이 더 판타지일 수도 있지만, 이 느리긴 해도 기분 좋은 성장기 덕에 지난한 2021년 여름을 잘 보낼 수 있었다. <라켓소년단>의 빈자리를 이제 누가 채워줄꼬.

필자 소개

  • 정석희
  • TV 안에서 지혜를 발견하는 일을 하는, 나는 ‘TV 권하는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