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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이라는 새로운 키워드

<골 때리는 그녀들>과 스포츠 예능

글. 김교석(TV 칼럼니스트)

최근 방송가에는 전에 없던 스포츠 예능 바람이 불고 있다. 그러나 모든 스포츠 예능이 좋은 성과를 내고 있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성공하는 스포츠 예능에는 다른 프로그램과 비교되는 특별함이 있는 걸까? 무엇이 시청자를 웃고 울게 하는 걸까?

진정성이 사람을 흔든다

이번 도쿄 올림픽의 최고 화제는 김연경 선수의 ‘라스트 댄스’였다. 한일전 승리 이전까지 여자배구 국가대표팀에 대한 관심과 기대는 그 어느 때보다 낮았다. 베테랑 반열에 오른 김연경과 그의 오랜 국가대표 동료 김희진, 김수지, 양효진 선수 등의 황금기가 지난 시점에서 치르는 올림픽인 데다 부상과 인성 논란, 은퇴 등으로 지난 10년을 통틀어 가장 빈약한 선수단으로 나선 터라 메달은커녕 결과 자체에 회의적이었다. 담금질을 위해 올림픽 개최 한달 전 참가한 <2021 FIVB VNL 여자 발리볼 네이션스 리그>에서는 16개 참가국 중 15위에 그치는 졸전을 펼쳤고, 한일전조차 야구와 축구에 밀려 공중파 중계가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출전국 중 최약체로 분류되었던 우리 여자 배구 국가대표팀은 김연경의 투혼과 리더십으로 도미니카공화국, 일본, 터키 등 객관적 전력상 몇 수 앞서는 강호들을 상대로 대역전의 서사시를 써내려 가며 4강전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후 경기들은 거짓말처럼 셧아웃(무득점) 패배를 당하며 메달 없이 올림픽을 마감했지만, 선수들은 열렬한 환호와 박수를 받으며 금의환향했다.

그 중심에는 주장이자 에이스인 김연경이 있었다. 그는 온갖 불리한 조건과 짓눌리는 책임감에도 뜨거운 포효와 쿨한 태도를 잃지 않고 언제나 가장 앞장서서 팀을 이끌었다. 마지막 불꽃마저 불사르는 정열적인 춤사위는 감동을 넘어 이 덥고 심란한 여름을 버텨내게 해줄 청량한 ‘멋’으로 다가왔다. 그의 몸짓과 표정, 욕설에 깃든 간절함과 순수한 승리욕은 팀원뿐 아니라 경기를 지켜보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감화될 수밖에 없는 진정성이 있었다. 그의 라스트 댄스에는 배경 설명이 필요 없었다. 김연경이 국내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리더이자 가장 이상적인 리더라 평가받는 이유다.

스포츠의 본질 녹여낸 예능

그런데 낯설지 않다. 모든 불순물과 장식이 제거되고, 순수한 갈망과 몰입만 남은 짜릿한 스포츠의 재미와 감동은 최근 예능에서도 경험한 바 있다. 공교롭게도 이 또한 여성들의 ‘라스트 댄스’다. <골 때리는 그녀들(이하 <골때녀>)>(SBS)은 모델, 배우, 코미디언, 운동선수 출신(및 운동선수의 아내), 외국인 셀럽, <불타는 청춘>(SBS)의 여성 출연자들이 각각 팀을 꾸려 생전 안 하던 축구를 하는 이야기다. 여자 방송인들이 팀을 만들어 풋살 리그를 개최한다니 얼핏 보면 90년대 명절 특집 프로그램 같지만 <골때녀>는 2021년 등장한 예능 중 가장 색다른 지점에서 예상치 못한 화제를 만들어내는 중이다.

냉담하게 바라보면 <불타는 청춘>이 돌아오기 전까지 벌이는 이벤트성 기획일 뿐인데 출연자들은 ‘방송을 떠나서’ 진심으로 경기에 임한다. 부상 투혼을 불사할 뿐 아니라, 연습을 못해서 울고, 불의의 부상을 입어서 운다. 연습 장면은 방송에서 기껏해야 5분도 채 안 나가는데 다리 전체가 피멍으로 물들어 올 정도로 열정을 쏟아붓고, 출연자들의 SNS 피드는 축구 관련 게시글로 가득하다.

스포츠 예능 사상 가장 기술적 완성도가 떨어지는 경기가 펼쳐지지만, 출연자 한 명 한 명이 보여주는 집중력과 승부에 몰입하는 진정성은 세계 최정상급 팀들 간의 격돌에서나 느낄 수 있는 긴장감과 짜릿함을 자아낸다. “진지하게 하니까 재밌는 거예요”라는 이영표의 한마디는 <골때녀>의 핵심이다. 동기부여에 대한 설명, 성장 과정을 보여주는 예능 장치들을 거절하고 순도 100%의 승부 그 자체에 집중해 볼거리를 창출한다. 그냥 축구를 잘하고, 이기고 싶다는 간절함이 곧 이 예능이 선사하는 재미다. 우승과 승패가 걸린 경기가 있으니 나가서 뛰고 이기는 게 전부다. 훈련장에서 쏟은 땀과 경기에 몰입하는 열정, 패배 후 분해서 흘리는 눈물을 스포츠 만화 식의 성장 서사로 활용하지 않는다. 그저 토너먼트가 가지는 단판 승부의 쫄깃함과 간절함을 배가시키는 데 초점을 맞춘다. 대부분의 스포츠 예능이 실력과 팀워크가 올라감에 따라 예능 차원의 재미가 감소하기 마련인데(<뭉쳐야 찬다>(JTBC)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단판 승부에 집중하면서 커지는 긴장감으로 경기 수준은 높아지고, 그럴수록 볼거리도 늘어나는 선순환을 이뤄낸다. 스포츠가 가진 승부의 세계를 예능에 잘 접목한 사례다.

이처럼 성장 서사나 의미부여를 걷어내고 승부에 집중하는 설정은 기존 스포츠 예능에서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접근이다. 그래서 비슷한 시기 선보인 MBC의 웹 예능 <마녀들>처럼 스포츠와 여성이 예능에서 만났을 때 나타나는, 출연자들을 귀엽고 대견하게 내려 보는 시선이 없다. 예쁘게 보이기 위한 꾸미기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출연자들이 보여주는 진정성은 해설진도 시청자에게도 연예인 ‘누구’가 아니라 유니폼을 입은 순간만큼은 ‘선수’로 바라보게 만든다.

<골때녀>의 심상치 않은 인기는 ‘진정성’의 시대가 왔음을 알리는 킥오프다. 최근 불고 있는 골프 예능 붐이나 <뭉쳐야 찬다> 시리즈, <노는언니>(E채널) 시리즈처럼 각자의 세계관을 구축한 스포츠 예능이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르는 이유 또한 바로 이 진정성에 있다. 물론 팬데믹 시대에 비교적 통제 가능한 촬영 환경, 한정된 공간에서 매번 다른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는 제작상의 이점이나 트렌드도 눈여겨봐야 하지만, 스포츠 예능은 리얼 버라이어티 시대 이래로 예능이 꾸준히 천착해온 ‘리얼’에 대한 탐험을 이어간다는 측면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수식의 본 주인이기 때문이다.

‘진짜’를 보고 싶은 시청자의 욕구 채워줄까

그러나 모든 스포츠 예능이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2015년 쿡방과 스타 셰프가 방송가를 점령했던 것처럼 올여름부터 채널마다 쏟아지기 시작한 골프 콘텐츠가 그 시절의 분위기를 재현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골프 예능은 승부에 초점을 맞춘 <골프왕>(TV조선) 정도를 제외하고 대부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골프 예능이 기대했던 분위기와 달리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는 가장 큰 이유는 승부가 직관적이지 않고, 예능 장치라 할 수 있는 토크의 비중이 무척 크기 때문이다. 골프라는 종목 자체의 특성이기도 하고, 성공한 유튜브 골프 예능의 문법을 그대로 차용했기에 벌어지는 난맥상이기도 하다. 친분 있는 연예인들끼리 즐기는 골프로는 기획 의도에 적혀 있는 진정성을 이끌어낼 수 없다.

리얼 버라이어티 시대 이후 예능은 언제나 ‘진짜’를 추구했다. 리얼 버라이어티는 방송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며 무대 위에서 펼쳐지던 쇼 버라이어티의 몰락을 가져왔고, 관찰 예능은 누군가의 실제 일상과 삶의 공간에 들어가 사람을 더욱 핍진하게 보여줌으로써 캐릭터 쇼를 기반으로 한 리얼 버라이어티 시대를 종식했다. 그리고 팬데믹이 한창인 지금, 2010년대 예능을 지배한 관찰 예능은 이제 한계 수위에 도달했다. 관찰 예능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나 혼자 산다>(MBC)는 시청자 이탈로 점점 외로워지는 중이다.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사실상의 일일드라마나 시트콤에 더욱 가까워진 가족 예능 이외에 뚜렷한 인지도나 화제성을 이어가는 관련 콘텐츠는 없다.

진짜라고 말하지만 진정성이 담보되지 않는 관찰 예능이 점점 더 늘어나면서 최초의 장르적 특성이 희미해지고 스튜디오 토크쇼를 가미한 제작 방식의 한 가지로 새롭게 정의되는 추세다. 보여주기식 일상에 대한 높아진 피로도는 대중이 원하는 리얼리티의 성격을 바꿨다. 진정성을 바탕으로 정서적 몰입을 이끌어내는 스포츠 예능과 연애 예능이 최근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점점 더 ‘진짜’를 찾기 어려워진 관찰 예능에 대한 반작용이다.

일상을 노출하며 큰 사랑을 얻었던 관찰 예능의 시효는 점점 끝에 가까워지고 있다. 진정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끌어내는 데 있어 원팀으로 승부를 보는 스포츠 예능 만한 콘텐츠가 없다. <골때녀>로 인해 스포츠 예능은 예능이 가장 친숙하고 영향력 있는 대중 장르로 확장된 2000년대 중반 이후 꾸준히 이어가고 있는 ‘진짜’를 향한 탐험의 바통을 새로이 받아 들 주자로 급부상했다. 그 과정에서 바통을 떨어뜨릴지, 다음 주자에게 얼마나 빨리 넘길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스포츠 예능은 다음 패러다임을 움켜쥘 예비 주자 중 가장 확실한 준비 동작을 취하고 있다.

필자 소개

  • 김교석
  • TV 칼럼니스트. 전 <필름2.0>기자. 책 『아무튼, 계속』, 『오늘도 계속 삽니다』 저자.
    한국방송대상, 서울드라마어워즈 심사위원, 백상예술대상 심사위원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