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T 플랫폼의 치열한 격전지가 된 스포츠 콘텐츠

2024년 1월, 넷플릭스가 미국 프로레슬링 RAW의 10년 중계권을 50억 달러(약 6조 5천억 원)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에 확보했다는 소식은 업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는 넷플릭스의 2022년 연간 콘텐츠 투자액인 16.7억 달러를 훌쩍 뛰어넘는, 단일 스포츠 중계권 확보를 위해 연간 제작비의 3배를 투자한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중계권을 포함한 스포츠 콘텐츠는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플랫폼들의 가장 뜨거운 격전지로 부상했다.
국내에서는 쿠팡플레이가 이러한 흐름을 선도했다. 2020년 시장에 진입한 쿠팡플레이는 손흥민 선수가 활약하는 영국 프리미어리그 클럽 토트넘 홋스퍼를 초청해 팀 K리그와의 친선 경기 등을 진행, 단독 생중계하며 빠르게 가입자를 확보하고 이후 K리그, 스페인 라리가, 호주 프로농구(NBL), 미국 프로풋볼리그(NFL)는 물론, 2024년 MLB 월드투어 서울 시리즈와 F1 그랑프리 국내 첫 현장 중계까지 영역을 넓히며 스포츠 팬들에게 강력한 브랜드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2023년에만 1,259경기를 2,808시간 동안 중계하는 등 막대한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경쟁 플랫폼도 손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티빙은 독일 분데스리가를 비롯해 다양한 축구 리그는 물론, 테니스, 격투기 등을 독점 중계한 경험을 바탕으로 2024년부터 한국 프로야구(KBO) 중계권을 3년 총액 1,350억 원을 투자해 확보, 스포츠 콘텐츠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처럼 주요 OTT 플랫폼들은 생존과 콘텐츠 시장 패권 장악을 위해 스포츠 중계권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으며, 이는 전통적 방송 채널 중심이었던 스포츠 중계 시장의 역학 관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있다.

경기, 그 너머의 스토리: OTT플랫폼의 스포츠 다큐멘터리

단순한 경기 중계를 넘어, 이제 스포츠는 가장 매력적인 ‘이야기 산업’으로 진화하고 있다. OTT 플랫폼들은 다양한 스포츠 다큐멘터리 시리즈와 영화를 통해 이러한 변화를 주도하고 있으며, 과거에는 주류가 아닌 비인기 장르나 팬덤 콘텐츠로 여겨졌던 스포츠 다큐멘터리의 위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특히, 글로벌 OTT 플랫폼들은 과감한 투자와 혁신적인 제작 방식으로 전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키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넷플릭스는 F1의 숨겨진 이면을 감각적으로 담아낸 시리즈 <F1, 본능의 질주(Formula 1:Drive to Survive)>를 통해 F1 문외한까지 팬으로 만들었다. 또한, 축구 슈퍼스타의 삶을 면밀하게 조명한 <베컴(Beckham)>, 마이클 조던과 시카고 불스 왕조를 다룬 기념비적인 시리즈 <더 라스트 댄스(The Last Dance)>는 스포츠 영웅 서사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이 외에도 러시아의 국가 주도 도핑 스캔들을 파헤친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상 수상작 <이카루스(Icarus)>, 영국 축구 클럽의 치열한 강등기(?)를 담은 <죽어도 선덜랜드(Sunderland 'Til I Die)>, 미국 대학 치어리딩 팀의 아름다운 경쟁과 성장을 담은 <치어:승리를 외쳐라(Cheer)>, 미식축구 유망주들의 마지막 기회를 그린 <라스트 찬스 대학(Last Chance U)> 시리즈 등 스포츠 소재의 다큐멘터리만이 담아낼 수 있는 깊이 있는 스토리텔링으로 전 세계적인 호평을 받았다. 최근에는 테니스 스타들을 다룬 <브레이크 포인트 (Break Point)>나 골프의 세계를 치열하게 파고든 <풀 스윙 (Full Swing)> 같은 시리즈도 인기를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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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 본능의 질주>, <죽어도 선덜랜드>

(출처: 넷플릭스)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는 특정 팀의 한 시즌을 밀착 취재하는 <올 오어 낫씽(All or Nothing)> 시리즈를 통해 다양한 프로 스포츠팀(NFL, MLB, 프리미어리그, 세리에A, NHL 등)과 세계 각국의 축구 국가대표팀, 럭비팀 등의 내밀한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하며 팬들에게 새로운 재미와 감동을 선사했다. 디즈니플러스에서 만날 수 있는 <프리 솔로(Free Solo)>는 암벽등반가 알렉스 호놀드의 경이로운 도전을 숨 막히는 영상미로 표현하며 인간 한계에 관한 탐구를 보여주었고, 배우 라이언 레이놀즈와 롭 맥엘헨리가 웨일스의 축구팀을 인수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웰컴 투 렉섬(Welcome to Wrexham)> 시리즈 역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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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오어 낫씽 토트넘 홋스퍼>, <프리 솔로>

(출처: 프라임 비디오, 디즈니플러스)

국내 OTT 플랫폼들도 한국 스포츠만의 매력을 담은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제작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쿠팡플레이는 2022 카타르 월드컵 여정의 생생한 뒷이야기를 담아낸 <국대: 로드 투 카타르>로 호평받으며 국내 스포츠 다큐멘터리의 성장 가능성을 입증했다. 왓챠는 프로야구단 한화 이글스의 한 시즌을 밀착 취재한 <한화이글스: 클럽하우스>를 통해 팬들에게 깊은 공감과 그라운드 이면을 강렬하게 담아내며 신선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이러한 스포츠 콘텐츠 성공의 핵심에는 ‘스토리텔링의 힘’이 있다. 선수들의 삶과 땀, 눈물,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감동적인 순간들을 깊이 있게 파고드는 것. 최첨단 촬영 기술과 편집, 영화 같은 구성은 스포츠 본연의 드라마를 극대화하며 시청자의 심장을 뛰게 했다. 잘 만들어진 스포츠 다큐멘터리는 국경과 언어를 넘어 강력한 문화적 파급력을 지닌다는 것을 이들 작품이 증명한 것이다.

K-스포츠 예능, 신드롬이 되다

국내에서는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이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았다. 은퇴한 레전드 야구선수들이 다시 모여 야구 그 이상의 도전을 담은 JTBC <최강야구>, 여성 연예인들의 진정성 있는 축구 도전기 SBS <골 때리는 그녀들>, 다양한 분야 유명인들의 조기 축구팀 성장기 JTBC <뭉쳐야 찬다> 시리즈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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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때리는 그녀들>, <뭉쳐야 찬다>

(출처: SBS, JTBC)

이들 프로그램의 인기 비결은 명확하다. 첫째, 스포츠가 지닌 각본 없는 드라마와 예측 불가능한 승부가 주는 본질적인 재미이다. 둘째, 출연자들의 진정성 있는 노력과 성장이 시청자들에게 큰 감동과 공감을 선사한다. 셋째, 스포츠를 매개로 세대를 아우르고 건강한 재미를 제공하며, 과거 스포츠의 주 소비층이 아니었던 여성이나 젊은 세대까지 팬으로 끌어들이며 저변을 확대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시청률을 넘어 스포츠 산업 전체에 긍정적인 활력을 불어넣는 선순환 구조를 만든다.

스포츠 콘텐츠의 미래, 네 가지 성장 엔진

앞으로 스포츠 콘텐츠 산업은 어떤 모습으로 발전할까? 몇 가지 핵심 성장 동력을 예측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로 선수 중심 내러티브 강화. 선수들은 단순 경기 참여자를 넘어, 소셜 미디어, 개인 채널, 방송 출연 등을 통해 자신만의 스토리를 가진 콘텐츠 크리에이터로 진화하며 강력한 팬덤을 구축할 것이다. 둘째로 데이터와 기술의 융합. 인공지능(AI), 증강현실(AR), 가상현실(VR) 등 첨단 기술은 정교한 경기 예측, 몰입감 높은 시청 경험, 맞춤형 콘텐츠 추천 등 개인화된 서비스를 고도화할 것으로 예상한다. 세 번째로 틈새시장 공략과 콘텐츠 다변화. 인기 프로스포츠 외에도 여성 스포츠, 장애인 스포츠, 비인기 종목, 아마추어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의 매력적인 스토리들이 발굴되어 대중과 만날 기회가 확대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글로벌 확장성과 K-콘텐츠 시너지. K-팝, K-드라마에 이어 K-스포츠 콘텐츠 역시 글로벌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국내 선수들의 해외 활약과 한국 특유의 감성 및 제작 역량이 결합된다면 새로운 한류 콘텐츠로 성장할 가능성이 충분할 것으로 예상한다.
물론 밝은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콘텐츠 범람으로 인한 질적 저하, 과도한 중계권료 경쟁으로 인한 제작비 상승, 선수들의 사생활 침해 및 지나친 상업화에 대한 우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작자들은 양적 팽창보다는 콘텐츠의 질적 향상과 스포츠 본연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시청자들의 높은 안목을 만족시킬 수 있는, 독창적이고 진정성 있는 스토리텔링만이 지속적인 성공을 담보할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그라운드의 이야기

스포츠는 유일하게 AI 시대에도 인간만이 공유할 수 있는 열정과 도전, 좌절과 환희가 가장 극적으로 응축된 분야이다. 기술의 발전과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이러한 드라마를 더욱 다채롭고 흥미롭게 전달할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스포츠 다큐멘터리가 주는 깊은 감동과 스포츠 예능이 선사하는 유쾌한 웃음은 이미 우리 일상의 큰 즐거움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대한민국 스포츠 콘텐츠 산업은 이러한 성공을 발판 삼아, 더욱 새롭고 매력적인 이야기들로 전 세계 팬들을 사로잡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성장해 나갈 것이라 기대한다. 그라운드 안팎에서 펼쳐질,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스토리들은 이제 막 새로운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조은성

조은성
(다큐멘터리 감독)

1995년 극영화 <내일로 흐르는 강> 조감독과 EBS 교육방송 영화 전문 프로그램 ‘시네마 천국’ 구성작가를 거쳐 2012년 KBSn 특집 다큐멘터리 <인천, 야구의 추억>을 연출했다. 이후 재일동포 스포츠 다큐멘터리 영화 <울보 권투부>와 <60만번의 트라이>, <그라운드의 이방인> 프로듀서로 활동했다. 주요 작품으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무현, 두 도시 이야기>, <시민 노무현>, <나는 조선사람입니다>, <고양이 집사>, <꿈꾸는 고양이> 제작과 프로듀서를 담당했으며 故최동원 야구선수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1984, 최동원>의 감독으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