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티파이와 빌보드를 점령한 가상 아티스트

K-팝 그룹 최초다. 사자 보이즈(Saja Boys)의 ‘유어 아이돌(Your Idol)’이 7월 4일 스포티파이 ‘데일리 톱 송’ 미국 차트 1위를 차지했다. 방탄소년단도 블랙핑크도 그룹으로는 단 한 번도 이룩하지 못한 성과다. 닷새 후, 이들의 라이벌인 또 다른 K-팝 그룹 헌트릭스(HUNTR/X)가 ‘골든(Golden)’으로 해당 차트 1위에 오르며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사자보이즈와 헌트릭스는 현재 가장 주목받는 K-팝 그룹이지만, 동시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아티스트다. 그들은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 속 아이돌 그룹이다.

지난 6월 20일,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된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열기가 뜨겁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K-팝 슈퍼스타인 동시에 세상을 지키는 수호자인 3인조 걸그룹 헌트릭스가 인간의 영혼을 빼앗아 먹는 악귀 귀마로부터 인류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공개 4일 만에 41개국에서 영화 부문 1위를 기록했으며, 공개 4주 차인 7월 2주에도 넷플릭스 ‘글로벌 Top 10 Movies’ 차트 1위를 사수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음악적 성과는 더 놀랍다. OST 앨범 공개 3주 만인 7월 19일 주차 기준, ‘빌보드 글로벌 200’ 차트 1위와 ‘빌보드 200 앨범’ 차트 2위를 동시에 기록했다. 이는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엔칸토: 마법의 세계(Encanto)> 이후 3년 만에 가장 높은 스트리밍 주간 성적을 기록한 OST 앨범 기록이다. 가상 아티스트가 이런 기록을 세운 것 또한 최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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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7월 4일 스포티파이 미국 차트

(출처: 스포티파이)

K-콘텐츠가 아니지만, K-콘텐츠라는 역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K-팝 아이돌 그룹 사자보이즈와 헌트릭스처럼,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K-콘텐츠가 아니지만, K-콘텐츠다.

이 작품은 미국에 본사를 둔 글로벌 기업 소니 픽처스 애니메이션이 제작을 맡아 넷플릭스가 전 세계에 배급했다. 그리고 글로벌 자본과 제작 시스템 안에서 다수의 한국계 제작진과 아티스트들이 참여했다. 한국계 캐나다인 매기 강이 공동 감독을 맡았고 주요 배역의 성우진 역시 이병헌, 김윤진, 다니엘 대 킴, 안효섭 등을 비롯한 한국인 또는 한국계다. 매기 강 감독에 따르면 작품 속 음악 역시 진짜 K-팝다워야 했기에 한국의 더블랙레이블(THEBLACKLABEL) 프로듀서들과 협업했으며 안무가 리정과 그룹 트와이스(TWICE)가 참여하기도 했다.

제작진만이 아니다. 인터뷰에 따르면 매기 강 감독은 이 작품이 최대한 모든 면에서 한국다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작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영어 대사를 사용하지만, 한국인이 말하는 듯한 입 모양을 구현했으며 표정과 행동, 의상, 배경, 소품 등 모든 부분에서 한국적 분위기를 나타내기 위해 공을 들였다. 헌트릭스 멤버 의상의 장신구로 사용된 노리개부터 라멘이 아닌 라면, 수저 밑에 깔린 냅킨 같은 사소한 부분까지도 신경을 썼다. 이전의 성공적인 K-콘텐츠들이 한국적 시스템 속에서 제작되어 글로벌 시장으로 진출했다면,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 성공적으로 녹아내린 한국 문화와 이를 담아낸 콘텐츠에 한국인뿐 아니라 전 세계가 열광하고 있다. ‘K-컬처를 테마로 한 글로컬 콘텐츠’라는 새로운 형태의 K-콘텐츠가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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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분위기를 나타낸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한 장면

(출처: 넷플릭스)

글로벌 콘텐츠와 차별화되는 글로컬 콘텐츠로서의 전략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한국의 전통 문화와 현대 문화가 한데 어우러져 글로벌 시장에서 폭넓은 공감을 이끌어낸 성공적인 글로컬 콘텐츠다. 글로컬(glocal) 콘텐츠는 글로벌(global)과 로컬(local)의 합성어로 글자 그대로 세계성과 지역성을 동시에 갖춘 콘텐츠를 일컫는다. 국내에서는 2000년대 중반 문화콘텐츠학의 부상과 함께 주목받기 시작한 개념으로 학계를 중심으로 널리 사용됐다. 글로벌 콘텐츠가 문화적 보편성을 바탕으로 전 세계인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 코드로 제작된 결과물이라면, 글로컬 콘텐츠는 세계화를 지향하지만, 고유의 문화적 특성을 적극 반영한다. 글로컬 콘텐츠는 태생적으로 두 개의 이율배반적인 축, 보편성과 차별성이라는 이질적 가치를 조율하려는 시도인데 그 간극이 콘텐츠의 창조성과 확산 가능성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제목에서부터 K-팝이라는 특정 지역의 문화를 전면에 내세운다. 사람들의 영혼을 빼앗아 가기 위해 등장한 저승사자 보이그룹과 악령으로부터 세상을 지키는 수호자이기도 한 K-팝 걸그룹의 대결이라는 전통과 현대 문화의 충돌은 낯설고 이질적이다. 그러나 검은 갓과 도포를 무대의상으로 선택한 아이돌에게 열광하는 팬들처럼 전 세계 시청자들은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보여주는 문화적 차이와 혼종성을 새롭고 신선하게 받아들이며 이 한국식 오컬트 판타지에 빠져들었다.

스토리텔링 측면에서도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글로컬적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약점과 결핍이 만들어내는 욕망과 죄의식을 서사 추동의 근간으로 삼아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화합하는 과정을 담아낸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스토리텔링은 다양한 문화권의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얻고 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개인적 성장을 통해 주인공이 외부의 적을 물리치고 이기면서 영웅으로 거듭나는 전형적 성장 서사와 차별화된다. 주변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주인공이 자아를 회복하고 감정의 공유를 통해 관계의 단절을 극복하는 과정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글로벌적 보편성을 지닌 성장 서사의 틀에 다분히 한국적 정서를 반영했다고 할 수 있다. K-팝 스타지만 본질적으로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케이팝 데몬 헌터스> 속 인물들을 보면서 시청자는 단순한 관람자를 넘어 ‘우리와 닮은 이야기’에 빠져들게 되고 적극적인 팬으로 거듭나며 이야기의 참여자가 된다.

팬덤에 의한, 팬덤을 위한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팬덤에 의한 이야기다. 스토리 전개상 K-팝 그룹의 공연과 악령들과의 전투가 주를 이루기에 짧고 인상적인 장면들과 화려한 액션 시퀀스, 뮤직비디오와 다양한 공연 장면 등의 풍부한 볼거리가 가득하다. 이들은 밈이나 쇼츠, 틱톡 등으로 활발하게 공유되기에 적합하다. 그뿐 아니라, 작품 속에 나타난 한국 문화에 대한 해설이나 언어별 더빙과 노래 비교, 다양한 리액션 영상까지 무수한 연관 콘텐츠들이 쏟아지고 있다. 작품 속 안무를 따라 하는 댄스 챌린지는 실제 K-팝 아이돌 그룹들 사이에서도 큰 인기다. 나아가 애니메이션 내에서 설명되지 않는 서사의 빈칸들은 팬덤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2차 창작으로 이어진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팬덤을 위한 이야기다. 세계관 속 헌터들은 어둠을 몰아내는 목소리의 힘으로 용기와 희망을 노래하고, 사람들의 영혼에 불을 지피고, 그들을 하나로 묶고, 그 유대감으로, 악령으로부터 세상을 지킬 방패인 혼문을 만든다. 팬들의 환호와 함성, 그리고 공감은 악령에 맞서 싸울 힘의 근원이자 헌터들이 수호해야 할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길지 않은 기간에 열렬한 팬덤을 구축할 수 있었던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와 같은 팬덤에 대한 긍정적 시각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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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트릭스의 공연 장면

(출처: 넷플릭스)

팬덤은 더 이상 비이성적인 소비 주체가 아니다. 문화인류학자인 그랜트 맥크레켄(Grant McCracken)은 ‘소비자(consumers)’라는 용어 대신 콘텐츠를 받아들여 재창조하고 확산시키는 주체인 ‘멀티플라이어(multiplier)’라는 개념을 제안한 바 있다. 멀티플라이어들은 문화를 구성하는 대상을 자신들의 맥락과 뉘앙스로 재구성해 더 가치 있게 만들고, 타인을 참여시켜 집단적 가치를 구성하고 전파한다. 소비자가 ‘의미 창조의 종결자’라면 멀티플라이어는 창작자의 작업을 바탕으로 더 큰 문화적 과정으로 나아간다. 헨리 젠킨스는 『Spreadable media』에서 이러한 행동에 의해 나타나는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가치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K-팝과 K-팝 아이돌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고 있지만 숨겨진 진짜 주인공은 바로 이 이야기를 즐기고 있을 팬과 팬덤임을 잊지 않고 있다. 팬덤이 가진 가능성을 존중하고 팬들이 활발하게 참여하고 의미를 생성할 수 있는 판을 마련해 두었다. 이에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99분짜리 한 편의 작품으로 종결되지 않고, 현재진형형의 콘텐츠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경계를 허물며 나아가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글로벌 콘텐츠 생태계 안에서 K-컬처 자체가 원천 소스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한국의 문화 요소와 창작 역량이 글로벌 제작 시스템 안에서 적절하게 활용될 때 어떤 성과가 도출될 수 있는지 성공적으로 입증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열풍에 대한 국내 언론 보도와 한국 팬들의 자부심 어린 반응은 글로벌 OTT 플랫폼이 일상화된 지금 콘텐츠의 정체성을 이루는 핵심 요인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흥미롭게도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한국에서 제작되지 않았지만, 분명히 K-콘텐츠로 인식되고 있다. 이는 오늘날 콘텐츠의 정체성이 자본을 댄 나라나 제작사의 국적, 혹은 사용 언어에 의해 결정되지 않음을 시사한다. 무엇보다도 문화적 정체성과 영향력이 콘텐츠의 핵심 요소로 작동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글로벌 플랫폼 시대에 콘텐츠의 국적이 어떻게 재구성되는지를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잘 보여준다.

보편성과 차별성, 현대와 전통, 가상과 실제, 스타와 팬, 제작자와 시청자, 국가와 언어...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무수한 경계를 허물며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K’라는 일종의 문화적 기표 역시 고정된 경계 안에 머무르지 않고 있다. 글로벌 콘텐츠 시대에 K-콘텐츠는 ‘한국에서 만든 것’을 넘어, 한국적 감수성과 문화 자산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창작의 가능성 그 자체로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하나의 성공 사례를 넘어 다가오는 콘텐츠 산업의 새로운 환경에서 우리가 준비해야 할 전략과 방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나침반이다. 글로벌 콘텐츠 산업 생태계에서 지속 가능한 K-컬처와 K-콘텐츠의 정체성을 깊이 고민할 시점이다.

윤현정

윤현정
(강남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조교수)

디지털미디어를 전공했다. 현재 강남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에서 가르치고 연구한다. 디지털 환경에서 나타나는 콘텐츠들의 원리와 그 사용자들의 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