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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게임핵 퇴치에 사활 건 게임업계

글로벌 게임산업 동향

멀티플레이 기반의 온라인 게임들은 일정한 맵과 규칙을 전제로
늘 새로운 이야기를 이용자 스스로 제작할 수 있게끔 지원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경기장이나 장기판에 가깝다.
물론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이야기가 늘 짜릿하거나 감동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용자 개개인은 고난을 딛고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통해 장기간의 성장 스토리를 쓰게 된다.
단, 온라인 게임이 이 같은 경기장으로서의 기능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려면
‘모든 플레이어가 서로 동등한 조건으로 시합에 참여’한다는 대전제가 충족돼야 한다.
그래서 소위 핵(hack)으로 통칭되는 각종 치트 프로그램들은 온라인 게임의 시장 수명에 치명적인 악재일 수밖에 없다.

1핵(hack)이 게임에 치명적인 이유

문화 상품이 상업적 흥행을 지속할 수 있는 기간은 얼마나 될까? 영화나 드라마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대개 1년 이내를 어림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듯하다. 작품성과 스케일을 모두 갖춘 블록버스터 명작이라도 극장에 걸리는 기간은 몇 개월에 불과하고, 아무리 재미있는 드라마라도 볼 사람 다 본 시점부터는 더이상 일상의 대화를 점령하지 못하는게 보통이다. <오징어게임>처럼 기록적인 흥행을 기록한 작품조차도 놀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나 ‘달고나’ 등 작품 속 아이템의 글로벌 열풍을 1년 이상 지속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게임 시장에는 수년 이상 대중적 인기를 구가하면서 지속적인 매출을 발생시키는 낸 장기 흥행작이 이미 여럿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라이엇게임즈(Riot Games)의 <리그 오브 레전드(League of Legends)>는 2009년 북미 출시 13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수백만 명의 글로벌 동시접속자를 거느린 채 해마다 조 단위 수익을 올리고 있다. <리그 오브 레전드> e스포츠 선수들이 축구나 야구 같은 전통 스포츠의 스타 플레이어 못지않은 연봉을 자랑하고 있는 것도 충성도 높은 방대한 규모의 팬층이 유지되고 있는 덕분이다.

이 같은 차이가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양쪽의 콘텐츠 속성이 근본적으로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영화나 드라마의 경우, 전개와 결말이 이미 정해진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일반 시청자 입장에선 굳이 수십 번씩 반복 시청하면서 장기간 즐길 이유가 없다. 반면 게임, 특히 멀티플레이 기반의 온라인 게임들은 일정한 맵과 규칙을 전제한 채 늘 새로운 이야기를 이용자들 스스로 제작할 수 있게끔 지원한다는 점에서 완결된 콘텐츠라기보다는 일종의 경기장이나 장기판에 가깝다. 물론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이야기가 늘 짜릿하거나 감동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용자 개개인은 고난을 딛고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통해 장기간의 성장 스토리까지 쓰게 된다.

단, 온라인 게임이 이 같은 경기장으로서의 기능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려면 ‘모든 이용자가 서로 동등한 조건으로 시합에 참여’한다는 대전제가 충족돼야 한다. 만약 이 공정성 원칙이 어떤 이유로든 훼손돼 어느 일방의 이용자가 특별히 유리한 조건을 누리게 된다면, 맞은편 이용자들은 자신의 모든 선택지가 필연적으로 차단되는 불공정성을 경기 내내 경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핵(hack)으로 통칭되는 각종 치트 프로그램들은 온라인 게임의 시장 수명에 치명적인 악재일 수밖에 없다. 위에서 말했듯이 게임이 매번 새로울 수 있는 것은 개개인의 역량과 팀워크 여하에 따라 언제든 의외의 결과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핵이 개입하는 순간, 이를 사용하지 않는 이용자들은 전개와 결말이 뻔히 보이는 재미없는 이야기의 객체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FPS 게임에서 에임핵(aimbot)을 이용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정면으로 맞붙는다면 후자가 승리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봐야 한다. 아무리 실력이 좋고 경험이 많은 이용자라 해도 ‘헤드샷’을 자동으로 날리는 마법에는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2다종다양한 상품으로 성업 중인 게임핵 업계

인기 온라인 게임들이 얼마나 많은 종류의 핵에 시달리고 있는지 확인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임에 직접 접속해보지 않더라도 간단히 유튜브(YouTube) 검색만 하면 각종 핵의 존재 사실과 기능에 관한 영상을 무수히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오늘날의 메인스트림 장르인 FPS와 관련해서는 ▲하늘을 날게 하는 슈퍼맨핵 ▲달리기 속도를 자동차만큼 빠르게 바꿔주는 스피드핵 ▲초인적인 식별력을 제공하는 ESP(Extra Sensory Perception)핵, ▲상대 이용자의 PC에 갑작스러운 랙을 유발하는 누크(nuke)핵 ▲특정 지점으로의 순간이동을 지원하는 텔레포트핵 등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어려울만큼 다양한 핵이 이미 존재한다. 쓰는 사람들은 즐거울지 몰라도,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게임의 즐거움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파괴될 수 있는 셈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게임핵 상당수가 상업적 목적으로 개발됐다는 점이다. 당연히 업데이트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고, 그렇게 ‘고도화’가 진행될수록 핵의 피탐지성은 더욱 낮아진다. 그런 소프트웨어를 돈 내고 쓰는 사람이 있다는 게 누군가에겐 비상식일 수도 있지만, 세간의 뉴스를 종합하면 게임핵은 분명 상당한 규모의 수요층을 거느리고 있고 제공 가격도 비싼 편이다. 일례로, 작년 1월에는 라이엇 게임즈와 번지(Bungie)가 카메론 산토스(Cameron Santos)라는 사람을 게임핵 제작 및 유통 혐의로 미국 캘리포니아 법원에 공동 제소한 일이 있었다. 산토스는 자신이 운영하는 웹사이트 게이터치터스(GatorCheats)를 통해 <발로란트 (Valorant)>와 <데스티니 가디언즈 2(Destiny Guardians 2)> 핵을 각각 월 90달러와 3개월 100달러에 구독제 판매한 것으로 전해진다. 제소 이후 산토스가 양사에 지불 확약한 합의금이 무려 200만 달러였던 것을 보면 게임핵 판매 수익이 결코 적지는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인기 슈팅게임에 ESP 핵이 적용된 화면 출처: ZEE5(2021.8.)

그리고 최근에는 신작 게임을 겨냥한 핵 개발 속도 역시 일반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단적으로 지난 9월 <콜오브듀티: 모던 워페어2(Call of Duty: Modern Warfare II)> 베타 테스트에 참여했던 이용자들은 정식 출시를 한 달여 앞둔 그 베타 버전 게임조차 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현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SNS를 통해 전파된 해당 게임 영상을 보면 핵 이용자는 최소한 두 종류의 핵을 사용한 것으로 판단되며, 게임 개발사 인피니티 워드(Infinity Ward)의 ‘실시간 대응’ 선언을 통해 이처럼 때 이른 핵 출현이 공식적으로도 사실임이 확인됐다. 퍼블리셔인 액티비전(Activision) 측의 안티치트 시스템인 리코쳇(Ricochet)이 당시 작동 중이었는지 여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 사례를 통해 핵 제작자들의 기민성이 어느 정도인지는 충분히 가늠할 수 있을 듯하다.

3게임업계, 이용자 불만 감수한 채 커널레벨 안티치트로 핵 단속 강화

게임사들은 갈수록 고도화되는 핵에 맞서 이른바 커널레벨 안티치트(kernel-level anti-cheat)를 속속 도입하고 있다. 일부 메이저 게임사들은 각자 고유의 커널레벨 안티치트1를 보유한 상태이며, 시장에는 에픽게임즈(Epic Games)의 ‘이지 안티치트(EasyAnti-Cheat)’, 이븐밸런스(Even Balance)의 ‘펑크버스터(PunkBuster)’ 같은 서드파티 툴도 이미 다수 존재한다. 게임 전문 온라인 매체 레벨(LEVVVEL)에 따르면, 2022년 9월 기준으로 커널레벨 안티치트가 적용된 게임 수는 321개이며, 그 중 절반 이상은 이지 안티치트나 펑크버스터를 채택한 것으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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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엇게임즈의‘뱅가드(Van- guard)’, 액티비전의 ‘리코쳇’, EA의 ‘EA 안티치트(EA AntiCheat)’, 블리자드(Bli-zzard)의 ‘디펜스 매트릭스(Defense Matrix)’ 등 대형 퍼블리셔는 고유의 안티치트 프로그램을 개발해 게임에 적용하고 있다.

커널레벨 안티치트 종류별 적용 게임 수 (단위: 개) 출처: LEVVVEL(2022.9.)

커널이란 각종 애플리케이션에 필요한 여러 가지 서비스를 제공하고 하드웨어 등의 리소스를 관리 역할을 담당하는 PC 운영체제의 핵심부를 지칭한다. 따라서 커널레벨 안티치트는 핵에 악용될 여지가 있는 장치 드라이버나 소프트웨어를 아예 차단할 수 있으며, 이처럼 높은 권한 수준에서 작동하는 안티치트는 이미 커널 수준까지 내려간 최신 핵들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하다는 게 해당 게임사들의 설명이다.

단, 일반 게임 이용자 입장에서 커널레벨 안티치트는 이론상의 이점보다 실질적인 부작용이 더 클수도 있는 요소다. 예를 들어 커널레벨에서 특정 드라이버의 작동을 차단시킨다면 이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프로그램들 역시, 적어도 안티치트가 활성화된 동안에는 실행이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만약 그런 프로그램이 PC의 성능 관리(오버클록, 냉각팬 제어 등)와 연관된 것이라면 안티치트 작동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시스템의 체감 성능이 저하되는 문제도 발생할 수 있다. 게다가 커널레벨 안티치트 드라이버 자체가 보안 취약성을 내재하고 있는 경우라면 그로 인해 PC시스템 전체가 위험해지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

물론 게임사들 스스로도 이런 우려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현재 다수의 게임사는 이용자 반발을 어느 정도 감수하더라도 커널레벨 안티치트 도입을 강행하겠다는 입장이며, 이는 핵과의 전쟁에서 일단 승리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그만큼 크다는 방증일 것이다.

PC 운영체제의 드라이버별 권한 구분 출처: Riot Games(2019.)

4서버 차원의 핵 무력화 조치 등 제 3의 방안 고려 필요

지난 9월, 크래프톤은 <펍지 모바일(PUBG Mobile)>과 관련해 한 가지 눈에 띄는 발표를 내놨다. 신규 안티치트 시스템인 ‘전쟁의 안개(Fog of War)’를 게임에 적용한 결과, 테스트 기간 동안 치트 행위를 50% 가량 줄이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이다. 이 시스템은 맵상에 존재하는 모든 건물과 지형을 스캔한 뒤 내부 계산을 통해 ‘이용자가 볼 수 있는 것’의 데이터만을 선별적으로 클라이언트에 전송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벽 뒤 에 존재하는 적의 데이터는 아예 전송되지 않으며 이렇게 데이터만 제한해도 월핵(wall-hack, 벽 투시력 제공) 같은 것은 사실상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다는게 회사 측의 설명이다. 이처럼 서버 차원에서 주요 핵의 작동 여지를 차단하는 기법은 개별 이용자의 시스템에 부담을 주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부정행위를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더 연구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끝으로, 핵에 당하는 불쾌한 경험으로부터 일반 게임 이용자들을 보호하려는 일부 게임사의 시도에도 어느 정도는 긍정적인 평가를 실어줄 수 있을 듯하다. 일례로 액티비전은 자사 리코쳇 시스템을 활용해 “핵 사용자의 지위를 가해자에서 놀림감으로 끌어 내리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핵을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주변의 플레이어들을 볼 수도 없고 제대로 공격할 수도 없게끔 벌칙을 부여하겠다는 구상인데, 이런 종류의 벌칙이 확산된다면 핵으로 인해 일반 게이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도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을 듯하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게임 내 부정행위 방지가 기술적 측면과 함께 게임 문화적 측면에서 접근할 때 더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핵으로 대변되는 게임 내 부정행위를 근절하는 것은 게임 이용자의 경험 보호에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과도한 것은 부족한 것 보다 못할 수 있다. 더 나은 방안 마련을 위한 게임사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참고자료

  1. Eurogamer - Call of Duty: Modern Warfare 2’s beta already beset by cheaters, 2022.9.24.
  2. Eurogamer - PUBG Mobile’s new anti-cheat system has “already seen a 50% decrease in cheating” during testing, 2022.9.24.
  3. LEVVVEL - Kernel–level anti–cheat software games, 2022.9.29.
  4. LEVVVEL - What kernel–level anti–cheat is and why you should care, 2021.11.17.
  5. The Washington Post - ‘Modern Warfare 2’ is good. I can’t believe there are already cheaters., 2022.9.30.
  6. Torrent Freak - Valorant & Destiny 2 Cheat Maker Agrees To Pay $2m Copyright Settlement, 2021. 4.1
  7. ZEE5 - Top PUBG mobile hacks you should be aware of, 2021.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