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이머징마켓
서남아시아의 개발도상국 파키스탄이 글로벌 게임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파키스탄은 한반도의 3.6배 면적의 국토에 2021년 기준 2억 2,520만 명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는 데다
국민 평균연령도 20대 초반으로 매우 젊은 편이다. GDP는 2021년 기준 2,842억 달러로
국민 1인당 1,300달러를 밑도는 수준이지만, 게임 이용자와 생산자의 동반 확대가 이미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
파키스탄 게임 시장의 향후 성장 잠재력은 결코 낮잡아 볼 수준이 아니라는 게 관련 업계의 평가다.
작년 10월, 프랑스 게임사 게임로프트(Gameloft)가 파키스탄에서의 매출 확보를 위해 현지 광고 대행사 알트테크 디지털(Alt-Tech Digital)을 공식 파트너로 낙점했다. 게임로프트는 레이싱게임 시리즈 <아스팔트(Asphalt)> 등을 통해 세계 각국에서 인지도를 쌓아온 부분유료화(Free to Play, F2P) 모바일게임 분야의 글로벌 퍼블리셔이며, 이번 제휴를 통해 이제 막 성장하기 시작한 파키스탄의 게임 내 광고 시장을 남보다 일찍 선점할 계획이다.
그런데 파키스탄이 과연 게임업계의 신흥 시장으로서 주목할 만한 곳일까? 이와 관련해 게임로프트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유스마켓 중 하나’라는 설명을 내놓고 있다. 비록 지금까지 세계 게임시장에서 별다른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지만,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만 놓고 보자면 파키스탄은 선뜻 무시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실제로 파키스탄의 인구 구성은 게임업계 입장에서 상당히 매력적이다. 2억 명이 넘는 인구에 국민 평균연령은 22세에 불과하고, 게임과 비교적 거리가 먼 것으로 평가되는 65세 이상 고령층의 인구 비중은 전체의 4%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은 소득 수준이 낮은 편이라 고사양 PC 게임이나 콘솔게임의 보급 확산에는 한계가 있지만, 스마트폰만 있으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F2P 모바일 게임의 경우는 파키스탄에서도 상당히 많은 이용자를 확보할 가능성이 있다.
스마트폰 이용자 수로만 보자면 파키스탄은 이미 세계 상위권 국가에 속한다. 파키스탄 통신당국(Pakistan Telecommunication Authority)에 따르면 파키스탄의 이동통신 가입자 약 1억 8,000만 명 중에서 스마트폰 이용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2021년 기준 52%를 돌파해 2G폰 이용자를 이미 추월했다. 지난 2017년만 하더라도 그 비율이 4:6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불과 3년 만에 7,200만 명에서 9,300만 명으로 스마트폰 가입자가 급증한 셈이며, 인구구조상 그 대부분은 젊은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
물론 스마트폰의 대중화와 모바일 게임 대중화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시차가 있을 수 있다. 파키스탄의 경우, 게임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전통적으로 그리 좋은 편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게임을 남성의 전유물로 여기는 시각도 여전히 짙은 탓에 여성으로의 게임 확산은 더딜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타 국가들의 선례를 고려한다면 이 같은 사회적 분위기가 게임 확산에 장애물이 되지는 못할 전망이다. 사실, 게임을 비생산적이고 시시한 남자 아이들의 취미쯤으로 치부하는 시각이 존재하기는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이지만1, PC나 스마트폰의 대중화를 통해 게임 이용의 진입장벽이 일단 완화된 시점부터는 전통적 인식과 무관하게 게임 이용자 기반은 폭증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패턴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파키스탄의 게임 이용자 규모는 모바일 게임을 중심으로 이미 상당히 커졌다는 게 게임로프트의 전언이다. 작년 기준으로 파키스탄에서 게임로프트의 월간 실질이용자 수는 약 900만 명에 달하며, 일인 당 평균 게임 이용 시간은 일 41분에 이르고 있다. 여성 이용자의 비중은 25%로 아직은 작은 편이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게임을 남성의 전유물로 간주해온 사회적 통념에 균열을 내기에는 충분해 보인다.
아시아 국가들의 모바일게임 다운로드 증가분 출처: Sensor Tower(2021)한편, 모바일앱 관련 시장조사업체 센서타워(SensorTower)에 따르면 파키스탄의 모바일 게임 다운로드 수는 앱스토어와 구글플레이를 합해 2021년 1분기에만 2억 3,200만 건에 달했다. 이는 아시아 국가 중 7위에 해당하는 수치이고, 전년동기대비 증가분 기준으로는 인도, 인도네시아, 필리핀에 이어 4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지난 2월, 파키스탄 언론사 한 곳에서는 ‘우리 게임 업계의 연평균 매출 규모가 마침내 2,500만 달러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도했다. 한 나라 전체의 게임사를 모두 합한 매출 치고는 다소 초라해 보이는 액수이지만, 파키스탄 사람들 입장에선 이 뉴스에 눈길을 줄 이유가 충분하다. 사실, 이 나라의 게임업계는 2005년 이전에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고, 그 매출 규모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거의 제로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 로컬 개발사 세 곳이 출범한 지 20여 년이 흐른 현재, 파키스탄의 개발사 수는 일정 규모 이상의 메이저 업체만 따져도 60개 이상으로 증가했다. 소규모 스타트업까지 합하면 전체 로컬 개발사 수는 최소 수백 개에 달하고, 이들은 이미 약 1만 5,000명의 인력을 보유한 채 지속적으로 새 인재를 물색하고 있다. 최근 파키스탄 대학들이 게임 개발 및 디자인 분야의 전공 과정을 개설하기 시작한 것도 이런 인력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서다. 현재 파키스탄의 로컬 개발사들은 주로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게임을 제작하고 있으며, 실제로 이들이 내놓는 게임 상당수는 EA나 유비소프트 같은 메이저 퍼블리셔를 통해 출시되고 있다.
최근에는 글로벌 게임산업 주요 기업들의 파키스탄 게임업계 지원 행보도 이어지고 있다. 일례로 구글(Google)의 경우, 신생 모바일 게임 개발사들의 사업적 성숙을 가속화하기 위한 11주 과정의 ‘게이밍 그로우스 랩(Gaming Growth Lab)’ 프로그램을 발족해 54개 업체에 관련 교육과 컨설팅을 제공했고, 지난 6월에는 자사 중역들과 파키스탄 개발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식견과 정보를 공유하는 ‘싱크 게임(Think Games)’ 행사를 이틀간의 일정으로 개최했다.
픽셀 아트 게이밍 아카데미의 사디아 바시르 대표 출처: Forbes한편, 근래 들어서는 여성들의 활약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파키스탄 최초의 게임 개발자 아카데미 ‘픽셀 아트 게이밍 아카데미(Pixel Arts Gaming Academy)’를 설립한 사디아 바시르(Sadia Bashir)를 꼽을 수 있다. 이런 여성 선구자들의 등장은 파키스탄 게임업계의 인력 확충은 물론이고 콘텐츠 다양성 확대에도 긍정적인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아직은 여성들에게 게임업계 진출은 고사하고 대학 진학조차 허락하지 않는 가정이 많을 만큼 파키스탄 사회의 분위기는 보수적이지만,2 사디아 바시르 같은 선례가 많아진다면 게임 분야에 뜻을 둔 어린 여성들이 주변의 지지를 얻기가 전보다는 쉬워질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파키스탄은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여전히 짙은 국가 중 하나다. 여느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아케이드의 황금기였던 1990년대에는 개별 오락실 차원에서 <스트리트 파이터(Street Fighter)> 대회가 열리기도 했고 2000년대 들어서는 PC방이 인기를 끈 적도 있지만, 그 정도로는 게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뀌기 힘들었다. 전체 인구의 24% 가량이 빈곤선 아래에 놓여 있을 만큼 경제적 여건이 어려운 나라에서 비싼 콘솔이나 게임용 PC를 구매해 일상적으로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고,3 그렇게 게이머 풀이 제한된 상황에서는 게임에 대한 대중적 몰이해가 개선되기도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파키스탄 사람들의 게임에 대한 애정이 적다고 보기는 어렵다. 2019년 격투게임 글로벌 e스포츠 대회 EVO에서 파키스탄 프로게이머 아슬란 시디크(Arslan Siddique)가 <철권(Tekken)> 세계 최강자로 꼽히는 한국의 ‘무릎(Knee, 본명 배재민)’을 상대로 3:2 승리를 거두며 우승하기도 했다. 파키스탄의 격투게임 프로게이머들의 활양이 돋보이는 가운데, <도타 2(Dota 2)> 프로게이머 ‘시드 하산(Suma1L; Syed “SumaiL” Hassan)’ 선수는 2022년 8월 기준 누적 상금 약 388만 달러를 획득하며 전세계 프로게이머 누적상금순위 16위에 등극해 있다.
또한 작년 10월에는 UAE의 유명 e스포츠 기업 갤럭시 레이서(Galaxy Racer)의 파키스탄 지부 설립 계획이 보도됐는데, 그 구상이 실현된다면 머지않아 파키스탄 현지에서도 다양한 e스포츠 대회가 개최되면서 더 많은 스타들이 배출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갤럭시 레이서의 파크르-이-알람(Fakhr-e-Alam) 대표는 파키스탄 진출이 게임 또는 e스포츠 대회 홍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아직 개발되지 않은 투자 기회를 잡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플랫폼, 즉 판이 깔리면 파키스탄 게임시장은 빠르게 성장할 것이고, 이는 게임 개발 인력과 게임 스트리밍 방송 분야 등 관련 인력 수요도 증가할 것이라 전망했다.
파키스탄은 가히 게임산업의 신대륙이라 할 수 있다. 파키스탄 진출 게임사의 공통적인 과제는 게임에 대한 인식 개선이 첫 손에 꼽힌다. 국제적인 대회에서 활약하며 평균 소득을 아득히 뛰어넘는 상금을 획득하는 프로스포츠 선수들을 통해 인식 개선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게임 선진국들의 선례에 비춰볼 때, 이 같은 e스포츠의 성장은 게임 이용자 저변확대뿐만 아니라 게임에 대한 인식 개선 차원에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그리고 파키스탄의 젊은 인구 구성을 고려해보면 그 변화속도는 한국 등 여타 국가보다 훨씬 더 빠를지도 모를 일이다. 글로벌 게임사의 진출도 시작된 만큼, 기회는 더 빠르게 찾아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