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게임이 없다’ — 게임슬롭의 등장과 콘텐츠 인플레이션 시대의 위기
집필: EC21R&C 김종우 선임연구원
슬롭의 시대, 게임 스토어프론트에 드리운 콘텐츠 인플레이션의 그림자
‘슬롭’ 시대의 도래와 게임슬롭의 구조적 정의
2025년 말, 미국의 대표적인 영어 사전 출판사 메리엄-웹스터(Merriam-Webster)는 슬롭(Slop)을 올해의 단어(Word of the Year)로 선정했다. 슬롭은 대개 인공지능으로 대량 생산되는 저품질 디지털 콘텐츠를 뜻했다. 품질이 아니라 생산량이 기본값이 된 콘텐츠 환경을 꿰뚫는 표현이었고, 게임산업에서 벌어지는 현상과도 정교하게 맞물렸다. 게임슬롭은 영어권에서 통용되는 AI 쇼블웨어(Shovelware, 양산형 저품질 타이틀) 개념을 게임산업의 맥락으로 확장한 용어로, 생성형 AI의 비용 절감 효과와 스토어프론트의 콘텐츠 인플레이션이 결합하면서 소비자가 게임을 찾고 고르고 믿고 사기 어려워지는 구조적 상태를 뜻했다.
스팀 플랫폼 특성상 출시 초기 리뷰가 장기 성패를 결정하는 구조도 인디 개발사들에게 압박 요소가 되고 있다. 디지털 유통 플랫폼의 알고리즘은 초기 평점과 리뷰 점수를 기반으로 게임의 노출도를 결정하기 때문에, 출시 첫 주 내에 발생하는 기술적 결함은 게임의 생존 가능성 자체를 위협한다. 이러한 환경 변화는 인디 게임 개발에서 창작적 실험보다 기술적 안정성을 우선시해야 하는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오고 있다.
특히 PC 시장에서 가장 큰 유통 채널인 스팀의 경우, 출시 규모 자체가 이미 선택 불가능에 가까운 수준으로 커졌고, 생성형 AI 활용 공시도 급증하면서 “살 게임이 없다”는 체감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체감은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다. 발견 가능성(Discover-ability)·신뢰(Trust)·노동(Labor)이 복합적으로 얽힌 산업적 리스크가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었다. 게임슬롭 문제는 곧 플랫폼 경제의 작동 방식, 소비자의 선택 환경, 그리고 창작 노동의 지속 가능성에 동시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적 위기로 부상했다.
스팀 연간 출시 2만 종 돌파와 ‘발견’되지 않는 타이틀의 대량 누적
게임슬롭의 실체는 숫자에서 확인됐다. 스팀DB 집계에 따르면, 스팀의 연간 출시작 수는 2025년에 21,553개로 급증했으며, 2026년에도 4월 8일 시점에 이미 6,389개가 출시로 집계될 정도로 초고속 유입이 지속되고 있었다. 연간 2만 개라는 수치는 단순한 성장 지표가 아니라, 플레이어와 인디 개발자 모두에게 분류, 검색·추천의 부담이 시스템 한계를 넘는 상태를 의미했다.
2025년 출시작 중 스팀DB가 포착한 19,112개 표본을 기준으로, 그중 9,327개가 리뷰 10개 미만이었으며 2,229개는 리뷰가 단 한 건도 없었다. 출시는 되지만 검증 가능한 평판이나 추천 시스템에서 노출 기회를 얻지 못하는 타이틀이 대량으로 쌓이는 구조였다. 이러한 환경에서 플레이어의 선택 행동은 양극화되었다. 한편으로는 이미 검증된 작품만 구매하는 공격적 필터링이 강화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스토어 내 탐색보다 커뮤니티·영상 플랫폼 등 외부 신뢰 채널로 이동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스팀 AI 공시 타이틀 비중, 2024년 약 12%에서 2026년 초 약 31%로 급등
출시작 폭증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여기에 생성형 AI라는 변수가 더해지면서 상황은 한층 복잡해졌다. 스팀에서 생성형 AI 사용이 얼마나 보편화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추적 가능한 데이터는 스팀DB의 AI 사용 공시(AI Content Disclosed; 이하 AI 공시) 태그 통계였다. 해당 태그 기준으로 보면 AI 공시 타이틀의 비중은 빠르게 상승했다. 2024년에는 전체 출시 18,578개 중 2,183개(약 11.8%)에 불과했으나, 2025년에는 21,553개 중 4,725개(약 21.9%)로 증가했다. 그리고 2026년 4월 8일 시점에는 6,389개 출시작 중 1,969개(약 30.8%)가 AI 공시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는 신규 출시작 3개 중 1개꼴로 AI 공시 태그가 붙는 국면에 이미 진입했음을 의미했다.
한편, 총량 관점에서도 상승은 뚜렷했다. 2025년 12월 기준으로 스팀 라이브러리의 약 8%에 해당하는 10,258개 게임이 생성형 AI 사용을 공시하고 있다는 분석이 보도되었다. 또한 2025년 중반(7월)에는 7,818개 타이틀이 AI 사용을 공시했으며, 사용처는 시각 에셋·오디오·텍스트·마케팅 자산 등으로 분산되었다. 이러한 추세를 종합하면, 2024~2026년 사이 스팀의 AI 공시는 소수의 실험에서 신규 출시 생태계 전반의 기본 변수로 이동한 것이 확인되었다.
대응 정책의 역설과 플랫폼·생태계 ·노동 영역의 구조적 변화
스팀 AI 공시 제도의 설계 구조와 2026년 정책 수정의 배경
AI 게임이 쏟아지자 플랫폼도 손을 놓고 있을 수 없었다. 밸브(Valve)는 스팀 입점 심사의 핵심 절차인 콘텐츠 서베이(Content Survey)에 생성형 AI 콘텐츠 섹션을 새로 추가하며 대응에 나섰다. 공시 체계는 크게 두 범주로 설계됐다. 개발 과정에서 AI 도구로 만든 사전 생성(Pre-Generated) 콘텐츠와, 게임 실행 중 AI가 실시간으로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실시간 생성(Live-Generated) 콘텐츠였다. 특히 실시간 생성의 경우 불법 콘텐츠를 생성하지 않도록 어떤 가드레일을 두는지를 추가로 요구한다는 점에서, 단순 표기를 넘어 리스크 관리 논리까지 결합된 설계였다.
그러나 생성형 AI가 거의 모든 제작 도구 체계에 스며든 상황에서 무엇을 공시해야 하는가를 둘러싼 혼란이 커졌다. 2024년 초, 밸브(Valve)가 AI 기술을 사용하는 게임을 다루는 방식을 변경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히며 공시·심사 체계를 강화한 배경도 이 리스크 관리 프레임에 있었다. 이후 2026년 1월, Valve는 개발자 공시 양식을 조정해 플레이어가 실제로 소비하는 AI 생성물 중심으로 공시 범위를 명확화했고, 개발 효율을 위한 내부 도구(코딩 보조 등)는 공시 대상이 아니라는 선을 그었다. 이는 공시의 과잉 포착 문제에 대한 최소한의 현실 적응이 시작되었음을 시사했다.
AI 공시 태그의 무차별 적용이 만드는 ‘투명성’과 ‘낙인’의 동시 작동
Valve가 공시 제도를 다듬는 사이,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고개를 들었다. 투명성을 위해 도입한 AI 공시 태그가 오히려 낙인처럼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인은 태그 분류의 정밀도에 있었다. 스팀DB는 AI 공시 태그가 게임 자체에 AI가 포함되든, 마케팅 자산에만 AI가 쓰였든 상관없이 스토어 페이지에 공시 문구가 존재하면 자동으로 적용된다고 설명했다. 코어 게임 콘텐츠는 인간이 만들고 캡슐 이미지 일부에만 AI를 활용한 케이스도 동일한 태그 아래 묶일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소비자 입장에서는 AI 슬롭과 제한적·보조적 사용을 구분하기 어려운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런 구분 불가능 구조는 양쪽 모두에 흔적을 남겼다. 개발자 쪽에서는 스팀 공시 문구에 “사람이 검수, 수정했다”, “극히 일부만 사용했다” 같은 방어적 표현을 덧붙이며 낙인을 희석하려는 움직임이 늘었다. 게이머 쪽에서는 반대 방향의 수요가 나타났다. AI 태그가 붙은 게임을 더 확실히 걸러내고 싶은 소비자들이 브라우저 확장 프로그램(스토어 페이지 접속 시 AI 공시 여부를 팝업으로 띄워주는 도구)을 설치하기 시작했고, 해당 확장 프로그램은 주요 매체에서 소개되기도 했다. 결국 투명성 강화는 미공시·허위공시를 억제하는 순기능과 동시에, 정당한 도구 활용까지 저품질로 일반화하는 역기능을 만들어냈다.
콘텐츠 인플레이션과 AI 공시가 결합된 인디게임의 이중 마찰 비용
이러한 낙인 효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쪽은 인디 개발자들이었다. 전통적으로 인디 생태계의 성장 논리는 저비용 제작에서 다변화된 실험, 스토어프론트에서의 발견, 장기 매출로 이어지는 선순환 루프였다. 그러나 출시 물량이 폭증하면서 스토어프론트에 노출되는 것 자체가 극도로 어려워졌다. 전직 스팀랩스 관련 개발자는 스토어프론트가 본질적으로 하단 퍼널1)에 불과하며, 플레이어는 대체로 영상이나 커뮤니티 등 다른 곳에서 게임을 알게 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결국 콘텐츠 인플레이션이 심화될수록 인디의 생존은 좋은 게임을 만드는 능력뿐 아니라 외부에서 관심을 끌어오는 능력에 더 크게 좌우되었다.
여기에 AI 공시라는 꼬리표까지 붙으면 인디는 이중의 마찰 비용을 치렀다. 우선, AI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를 차별화 수단으로 적극 광고해야 했다. 실제로 2025년 말에는 인디 개발자들이 AI 프리(AI-Free) 또는 생성형 AI 미사용을 선언하는 마케팅 문구·씰(seal)을 공유하고, 이를 스토어 페이지·웹사이트 등에 부착하는 흐름이 크게 조명되었다. 또한, AI를 제한적으로 사용한 개발자는 어디까지가 허용 가능한 사용인지를 해명해야 하는 부담과 반발 위험을 떠안았다. 그 결과 게임슬롭의 본질은 저품질 게임의 범람 자체가 아니었다. 좋은 게임조차 발견되기 어려워지는, 비용 구조의 문제였다.
업계 내 생성형 AI 부정 인식 급등과 AI 음성 대체를 둘러싼 노동 분쟁 확산
게임슬롭을 둘러싼 갈등은 플랫폼과 인디 생태계를 넘어 정치·윤리·노동 영역으로까지 번지기 시작했다. 그 조짐은 개발자 집단의 정서 변화에서 먼저 감지됐다. GDC의 State of the Game Industry 2026 설문에 따르면, 생성형 AI가 게임산업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답한 비율이 52%에 달했으며, 이는 2025년(30%)과 2024년(18%) 대비 큰 폭의 상승이었다. 특히 시각·테크니컬 아트, 내러티브·디자인, 프로그래밍 직군에서 부정 응답이 높게 나타났다. 같은 설문에서 실제 사용은 연구나 브레인스토밍 등 비창작적 업무에 편중되어 있었고, 플레이어 대면 기능에 쓰는 비율은 낮았다. 업계는 사용은 늘지만 정당성·신뢰·고용 영향에 대한 불안은 더 커지는 양가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쌓여가던 불안은 구체적 사건을 계기로 폭발했다. 2025년 5월, 에픽게임즈(Epic Games)의 〈포트나이트 (Fortnite)〉는 플레이어가 다스 베이더와 대화할 수 있는 대화형 AI 기능을 공개했다. 그러나 출시 직후 플레이어가 AI 베이더로 하여금 욕설과 비속어를 사용하도록 유도하는 클립이 확산되었고, 에픽게임즈는 필터와 가드레일을 강화하는 패치를 진행했다. 창작 노동의 관점에서 보면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같은 달 SAG-AFTRA는 해당 제작사가 인간 연기자를 AI로 대체하는 방식이 단체교섭 의무를 침해한다는 취지로 부당노동행위(Unfair Labor Practice; ULP)를 제소했다. 해당 제소는 SAG-AFTRA가 2024년 7월 개시하여 2025년 6월 중단한 비디오게임 파업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며, AI 대체가 품질 문제를 넘어 창작 노동의 교섭력과 디지털 복제 권리 문제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줬다.
새로운 품질 기준의 모색과 한국 게임 산업의 대응 방향
플랫폼 품질 관리 강화와 ‘휴먼 크래프티드’ 품질 인증 수단의 부상
위기의 한편에서는 새로운 해법도 등장하고 있었다. 콘텐츠 인플레이션 시대의 핵심 과제는 큐레이션 강화와 선택권 보장의 균형이었다. 소니(Sony)가 2026년 1월 플레이스테이션 스토어(PlayStation Store)에서 단일 퍼블리셔인 씨게임즈(ThiGames)의 타이틀 1,196개 이상을 대거 삭제한 사례는, 플랫폼이 양산형 쇼블웨어에 대해 강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스팀 같은 개방형 플랫폼에서는 삭제 및 정리가 곧바로 적용되기 어렵다는 현실도 드러냈다. 입점 구조, 심사 비용, 표현의 자유 등 개방형 플랫폼 고유의 제약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한편, 휴먼 크래프티드(Human-Crafted; 사람이 만든) 표식이 새로운 품질 인증처럼 기능하기 시작했다. 앞서 살펴본 인디 개발자들의 AI-Free 씰 부착 흐름은 개인 차원의 자구책에 가까웠지만, 움직임은 곧 업계 전반으로 번졌다. 일부 퍼블리셔와 스튜디오는 한발 더 나아가 AI 생성 에셋을 계약상 금지하거나, 절대 사용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비전을 공개적으로 내세우며 브랜드 신뢰 자체를 품질 자산으로 전환하는 대응을 보였다. 개별 개발자의 방어적 선언에서 출발한 흐름이 퍼블리셔의 사업 전략으로까지 격상된 셈이었다.
기술 도입 자체가 아닌, 품질, 신뢰, 노동을 동시에 담보하는 표준의 필요성
그렇다면 한국 게임산업은 무엇부터 풀어가야 할까. 핵심은 기술 도입 자체를 막느냐 허용하느냐의 이분법이 아니다. 품질, 신뢰, 노동을 동시에 담보하는 표준을 세울 수 있느냐가 진짜 과제다. 영미권 사례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비교적 뚜렷하다. 공시 범위를 플레이어가 실제로 소비하는 결과물 중심으로 좁히고, 마케팅 자산과 게임 내 자산을 구분해 태그의 정밀도를 높이며, 양산형 스팸 퍼블리셔는 플랫폼 차원에서 강하게 걸러내는 것이다.
여기에 한국 고유의 과제도 더해진다. 성우, 아티스트, 시나리오 작가 등 창작 노동의 디지털 복제와 AI 대체에 관한 권리를 계약 및 교섭 절차 안에서 명문화하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숙제가 됐다. SAG-AFTRA의 파업과 부당노동행위 제소는 글로벌 시장에서 활동하는 한국 게임 개발사에도 직접 영향을 미칠 선례다. 인디 생태계를 위한 큐레이션 강화와 발견 가능성 지원 역시 빠질 수 없다. 결국 게임슬롭이 던지는 질문은 하나로 모인다. 플랫폼에 게임이 넘쳐나는 시대에 플레이어가 다시 “살 게임이 있다”고 느끼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그 답은 기술이 아니라 제도와 신뢰에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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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C Gamer, "'I fking hate gen AI art' — Hooded Horse chief says 'if we're publishing the game, no fking AI assets'", 2025.11., https://www.pcgamer.com/software/ai/i-f-king-hate-gen-ai-art-hooded-horse-chief-says-if-were-publishing-the-game-no-f-king-ai-assets/
- Game Developer, "Valve tweaks and clarifies AI disclosure rules for Steam", 2026.01., https://www.gamedeveloper.com/business/valve-tweaks-and-clarifies-ai-disclosure-rules-for-ste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