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N

짧은 화제는 어떻게 긴 행동이 되는가

글. 김헌식 | 문화평론가
올드미디어 혹은 레거시 미디어 시대에는 특정 시간에 콘텐츠를 대기하듯 봐야 했고, 이 때문에 ‘본방 사수’라는 말이 트레이드마크처럼 언급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특정 시간대를 사수하며 콘텐츠를 향유하기보다는, 발견-체류-화제-경험이라는 점에서 몰아보기 정주행 콘텐츠 소비 양태마저 넘어서고 있다. 짧은 클립과 숏폼, 밈 콘텐츠를 통한 SNS 공유와 단톡방 등 커뮤니티의 소통이 결국 본 콘텐츠를 ‘디깅(Digging)’하는 행위로 이어지는 모습은 이미 우리의 일상이다. 나아가 대면 관람에서 현장 방문, N차 소비 현상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이처럼 개인화 시대에도 공통의 화제가 되는 콘텐츠 소비와 향유의 구조를 살피기 위해서는 이론적 개념을 함께 살피는 것도 중요하다.

화제가 취향이 되기까지

우선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처음 등장한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라는 개념을 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대표 저작 『천 개의 고원』에서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와 ‘재영토화(reterritorialization)’ 개념에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했다. 비판 이론에서 탈영토화는 ‘영토’라고 불리는 기존 관계가 변형되거나 달라지는 과정을 가리킨다. 달라지고 바뀐 요소들이 새로운 영토를 구성하는데, 이것이 바로 재영토화 과정이다. 질 들뢰즈와 가타리는 탈영토화와 재영토화가 동시에 일어난다고 봤다.

문화적으로는 동일한 인물이나 존재, 현상, 대상에 대해서 새롭게 재인식하고 체험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문화로 흡수하고 새롭게 창출하게 된다. 이런 개념을 확장해 존 톰린슨(John Tomlinson)은 미디어화는 탈영토화의 주요 원천으로 작용하여 이주, 관광, 쇼핑, 경제 비즈니스 등 다른 탈영토화 원천을 자극하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고 봤다. 이러한 점은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이를 콘텐츠 소비 맥락에 적용하면 두 가지 관점이 도출된다. 첫째, 기존의 콘텐츠와 다른 방식으로 대상이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둘째, 새로운 자기의 취향과 관심사로 연결해 체화하고 그것을 다시 다른 이들과 공유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된다. 따라서 누군가의 소유가 아닌, 모두의 공유지가 되는 노마디즘이 새롭게 구현된다. 그렇다면 이전의 미디어 콘텐츠가 아니라 디지털 콘텐츠 환경에서는 이러한 개념이 어떻게 탈바꿈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 헨리 젠킨스(Henry Jenkins)의 『컨버전스 컬처』도 주목해 볼 수 있다. ‘컨버전스(convergence)’는 ‘한곳으로 모임(집합), 집중성, 통합’을 말한다. 사전적 의미로 컨버전스(convergence)는 ‘수렴’을 의미하기에 흔히 미디어 컨버전스는 다양한 미디어의 기능들이 하나의 기기에 융합되는 기술적 과정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런 개념을 헨리 젠킨스는 ‘블랙박스의 오류’라고 지적했다. 그는 하나의 만능 기기로 통합된다는 주장은 환상이며 미디어 기기는 계속 다변화되지만, 문화와 콘텐츠는 다양한 기기를 통해 접할 수 있다는 것인데, 즉 문화 콘텐츠로 융합된다고 본다. 문화 콘텐츠는 미디어 기기를 통해서 경계와 차이를 넘나들며 소비되거나 향유되는데, 텔레비전 시대가 되어도 라디오는 없어지지 않았듯이 스마트폰이나 OTT가 나와도 여전히 TV, 노트북 그리고 PC가 공존한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그리고 틱톡이 인기 있는 콘텐츠 유통 플랫폼이 되어도 여전히 극장과 서점은 존재하고 연동된다. 아울러 가상공간과 물리적 공간은 서로 공진화한다.

젠킨스는 TV‧신문‧라디오 등 올드 미디어와 인터넷‧스마트폰 등 뉴 미디어가 공존하면서 일어나는 콘텐츠 생산-소비 양식의 변화를 지적하면서, 콘텐츠가 다양한 채널과 플랫폼에서 유통·수용되는 여러 형태와 양상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실제로 텔레비전 드라마는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TV를 통해 자신의 상황과 처지에 맞게 즐길 수 있다. 이용자들은 온라인 커뮤니티나 SNS를 통해 드라마 정보를 얻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결말을 예측하거나 방향성을 제기하는데, 드라마 제작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개념이 바로 ‘참여 문화’다.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콘텐츠를 변형·가공해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은, 스스로 콘텐츠를 만들 역량과 제작 도구를 갖추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수동적으로 콘텐츠를 소비하거나 일방향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으로 규정되는 개념과 다르다. 게오르그 짐멜이 말하는 트리클 다운이나 트리클 업과는 다른 ‘트리클 어크로스 1 (Trickle-across)’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숏폼, 짧은 클립, 밈, 요약-해석과 분석 콘텐츠의 SNS 공유의 선순환 구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각자 자신이 본 콘텐츠로 숏폼이나 짧은 클립을 만들고 그것을 유튜브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틱톡에 공유한다. 이것이 끊임없이 파생 콘텐츠를 만들어 밈 현상을 일으키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콘텐츠를 짧게 요약하거나 그 요약에 자신의 견해나 해석을 덧입힌다. 그것에 바탕을 두고 다시 업그레이드하는 사례들이 얼마든지 생기면서 공명 현상을 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화제가 되는 콘텐츠를 직접 본방 사수하거나 전편을 제대로 접하는 행위로 이어지고, 만족할 만한 내용일수록 다시 재강화 현상을 일으켜 팬덤을 더 확장시킬 수 있다.

스크린 밖으로 나온 콘텐츠들

다음으로, 온라인 화제가 극장 관람, 팝업 방문, 굿즈 소비로 이어지는 흐름에 대해서 살펴볼 차례이다. 이는 가상공간과 디지털 공간의 문화콘텐츠 이용이 물리적 공간의 실제 행위와 대면 경험으로 확장되는 흐름이다. 관련하여 사례를 몇 가지 영역으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케이팝이 세계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무료 뮤직비디오였다. 스마트 모바일 환경이 되면서 무료로 제공되는 뮤직비디오는 인터넷에서 익명의 군중에게 케이팝을 접하게 만들었다. 이를 통해 음악과의 시각적 조우이자, 음악 콘텐츠 소비와의 연결이 시작된 것이다. 본래 들으려고 한 것이 아닌데 우연히 접했다가 사로잡힐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뮤직비디오가 마음에 들면 해당 그룹의 다른 곡을 찾아 듣게 되고 앨범을 구매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 과정에서 팬 커뮤니티가 자체적으로 올리는 각종 사진과 영상은 유입 효과를 더욱 높인다.

무엇보다 신보보다 구보 앨범을 찾아 듣는 디깅 행위를 보이게 되면 새로운 코어 팬덤이 된 것이다. 구보 판매 증가는 새로운 팬덤의 유입으로 해석하는 이유다. 앨범이나 노래의 역주행은 그래서 빈번해졌다. 좋은 콘텐츠는 언젠가 인정받을 수 있다는 재발견의 희망이 더 강해진 것이다. 트와이스처럼 10년이 훌쩍 넘은 그룹이 다시금 북미에서 큰 인기를 끄는 맥락인데 팬이 된 이후에 팬미팅은 물론 응원봉을 들고 콘서트 현장을 직접 방문하거나 굿즈를 구매하게 된다.

K-팝 뮤직비디오를 통한 음악 소비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SNS의 짧은 콘텐츠와 챌린지 영상으로 확장됐다. 직접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고 그것을 공유해 다른 이들의 도전을 이끄는 커버 콘텐츠가 팬덤의 외연을 확장했다. 노래 자체를 가공해서 새로운 음악 형태를 만들어내기도 했는데 바로 ‘스페드 업(Sped Up)’ 버전이다. 더 빠른 리듬을 향한 음악의 진화라고도 불리는 스페드 업은 특정 곡의 BPM(분당 비트 수)을 원곡보다 130~150% 정도로 높여 새로운 사운드를 만들어낸다. 이런 변화는 틱톡(TikTok)에서 자발적으로 시작되었고 이에 생각지 못하게 신인 걸그룹 피프티 피프티의 ‘큐피드(Cupid)’가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단 4개월 만에 빌보드 핫100에 진입해 17위에 랭크되고 25주간 차트에 머무는 전례 없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이에 다른 가수나 그룹들은 아예 처음부터 스페드 업 버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요컨대, 재밌게 SNS 쇼츠 등을 보거나 같이 따라 했다가 코어 팬덤이 되기에 이르렀다.

드라마나 영화의 시청이나 관람도 마찬가지였다. 드라마나 영화의 요약‧분석 영상은 처음에 맛보기 역할이 컸다. 두 가지 관점인데 하나는 후회 감정을 줄이기 위한 목적이었다. 시간과 비용을 들였는데 자신이 원하는 콘텐츠가 아니라면 후회감이 밀려들 수밖에 없다. 짧은 영상을 통해 자신의 취향에 대한 부합 여부를 파악할 수 있으니 문화콘텐츠의 리트머스 시험지 같았다. 자신에게 맞는 콘텐츠의 느낌인지 맛보고 직접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콘텐츠 제작 주체가 전문가가 아니라 일반 시청자 수준이라는 점이 더 주목 요인이었다. 물론 이전에는 아는 체 하기 위한 현시(顯示)용으로 짧은 콘텐츠를 선택할 수 있었다. 드라마와 영화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이를 통해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기 위한 용도로 활용했지만, 이런 행위가 반복될수록 원본에 대한 시청 욕구는 자극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정말 재밌으면서 여운 있는 콘텐츠는 요약본으로 충족할 수 없는 디테일이 있기 때문이다. 차마 스포일러 때문에 공개할 수 없는 대목을 밝히지 않는 것은 이제 콘텐츠 매너가 되었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런 흐름 속에서 국내 드라마 역시 대본집 출간은 물론 굿즈 상품 론칭까지 자연스러운 확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본집에는 원본 확인만이 아니라 제외된 부분을 더 풍부하게 감상하려는 욕구나 소장욕이 반영되어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단순 요약·분석본보다는 현장감을 느낄 수 있는 콘텐츠가 더욱 참여 동기를 크게 했고 그곳이 극장이었다.

©살목지 스틸컷/출처: 네이버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출처: 네이버 영화
©파묘 스틸컷/출처: 네이버 영화

코로나19 이후 급감한 극장 관객은 극장 공간의 무용성을 확인하는 듯싶었다. 하지만 가상공간과 물리적 공간의 공진화는 극장의 유효함을 보여주었는데 이러한 징조는 영화 <서울의 봄>을 거쳐 <파묘> 그리고 <왕과 사는 남자>, 나아가 <살목지>가 보여주었다. 영화 <서울의 봄>의 경우, ‘심박수 챌린지’가 공정 세대(공정하지 않은 것에 분노를 느끼는 20~30대를 지칭)의 영화관 방문 동기를 불러일으켰다.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심박동이 요동친다는 쇼츠 콘텐츠들은 궁금증을 유발했고, 실제로 극장에서 이를 측정해 다시 SNS에 공유하며 화제가 됐다. <파묘>에서는 “숭헌 것이 나온다.”는 게시물이 공유되었다. 과연 그 ‘숭헌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는데 OTT에 영화가 공개될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따라서 극장 상영할 때 봐야 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 대해서는 세조의 왕릉인 광릉 홈페이지에 각종 악플이 달리는가 하면 그것을 재가공한 콘텐츠가 공유되기 시작했다. 아울러 단종 관련 유적지인 청령포를 직접 방문하는 인파를 담은 영상이나 짤이 퍼졌고 단종 책들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다 아는 단종 이야기를 영화에서 어떻게 그렸길래 이렇게 사람들이 반응하는지 궁금해졌기에 특히 Z세대의 참여가 눈에 띄었다. 영화 <살목지>의 경우에는 야간에 실제 호수를 방문하는 영상이나 내비게이션 상황 콘텐츠가 회자되면서 영화 관람과 현장 방문을 더욱 부채질한 면이 있었다. 다만 <왕과 사는 남자>는 지역공동체에 긍정적인 선순환을 줬다면, 영화 <살목지>는 <곡성>이나 <치악산>에 이어 해당 지역 주민들에게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되도록 긍정의 선순환을 이루는 콘텐츠 모델에 주목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화제성의 이면을 경계하며

이렇게 주의해야 할 점도 있는 것이다. 다크 패턴(Dark pattern)과 과도한 도파밍(Dofarming) 그리고 브레인 롯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다크 패턴(Dark pattern)은 이용자들이 원래 의도하지 않았던 소비를 일으키는 것이다. 실제 콘텐츠 내용이 아니라 이런 화제성이나 참여감 자극을 통한 부화뇌동형 비즈니스 모델은 지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락인 효과를 통해서 도파밍(도파민+파밍)을 끊임없이 하게 만드는 콘텐츠 양산은 ‘뇌 썩음(brain rot)’ 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 질 낮은 콘텐츠를 통해 정신적·지적 역량을 훼손하는 것은 지속가능성에 역행할 수밖에 없다. 이타마르 시몬슨이 말했듯 갈수록 일시적인 선택이 아닌 절대가치의 콘텐츠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필자 소개

김헌식

문화평론가·문화정보콘텐츠학 박사. 1999년 <인터넷 한겨레> 하니 리포터에서 사회문화 트렌드 분석을 시작했고, 2001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사회문화 현상과 미디어 콘텐츠를 분석하며 제1회 오름상을 받았다. SBS 시청자 평가원,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을 역임했으며, 2024년부터 중원대학교 특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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