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와 현실 사이
— 콘텐츠가 만든 도시의 신화
파리에 가본 적이 있는가? 흔히 세계에서 가장 낭만적인 도시로 꼽히지만, 실제로 가본 사람이라면 더럽고 냄새나고 혼잡한, 유난히 불친절해 보이는
도시라는 인상도 받았을지 모른다. 영화와 책 속 낭만적인 파리와 현실의 괴리가 너무 컸던 나머지, 일부 일본인 관광객은 정신적 충격을 겪었고 ‘파리
증후군(Paris Syndrome)’이라는 현상이 등장하기까지 했다.
요즘은 한류와 함께 다양한 콘텐츠가 점점 더 많은 외국인을 한국으로 이끈다. 나는 ‘국뽕’ 영상과 로맨틱한 K-드라마 속 이상화된 한국에 매료된
외국인이, 막상 서울 거리에서 꽃미남보다 아저씨가 훨씬 많은 현실 등 기대와 다른 면을 마주하고 비슷한 충격을 받지는 않을까 걱정하곤 한다. 그럼에도
K-콘텐츠가 한국을 ‘힙한’ 나라로 만든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
삐삐에서 알고리즘까지
— 30년이 바꾼 것과 바꾸지 못한 것
30년 전 서울에는 손으로 그린 영화 포스터가 있었고, 고속도로 정체 구간에는 차 사이를 누비는 간식 장수가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들어섰는가.
내가 처음 한국에 온 것은 벌써 30여 년 전이다. 당시 한국은 여전히 ‘은둔의 왕국(Hermit Kingdom)’으로 불렸고, 생활이 어떨지 알
정보도 거의 없었다. 도착한 첫 며칠간 나는 온갖 낯선 풍경과 마주했다. 삐삐를 쓰던 시절이었고, 영화관 앞에는 손으로 그린 포스터가 걸렸으며,
고속도로 정체 구간에서는 차 사이를 누비며 간식을 파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경험을 가족과 친구에게 전하고 싶어도, 아날로그 시대라 편지나 엽서,
인화한 사진밖에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디지털 시대의 정점에 산다. 누구나 고화질 사진을 수십 장씩 찍는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며, 완벽한 포즈가 나올 때까지 찍고 보정해
필터를 입혀 SNS에 올린다. 그 사진은 가족과 친구, 전 세계 이름 모를 팔로워에게 소비된다. 같은 기기로 어디를 어떻게 가서 무엇을 할지 즉시
검색하고, 여행 하이라이트를 실시간 라이브로 중계하며 팔로워와 소통할 수도 있다.
요컨대 우리는 콘텐츠의 생산과 소비가 삶 전체를 지배하는 시대에 산다. 그런 콘텐츠는 대체로 삶을 편리하게 만들지만, 한편으로는 거대한 알고리즘이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획일적 일상 속에서 즉흥성과 탐험의 감각이 사라진 듯해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한국에 온 30여 년 동안 일상은 엄청나게 변했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바로 한국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다.
© shutterstock
점유된 침묵
— 서울 지하철이라는 거대한 광섬유 케이블
콘텐츠를 소비하고 유행을 받아들이는 속도는 느긋한 영국에서 자란 내게 지금도 놀랍다. 영국에서는 공공장소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순간을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빈 시간은 전혀 다르게 취급된다.
한국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불편해하고, 모든 자투리 시간을 무언가로 채워야 한다고 여기는 듯하다. 대개 그 빈자리는 디지털 콘텐츠가
채운다.
내가 이를 가장 강하게 느낀 곳은 서울 지하철이었다. 출퇴근 시간 객차는 집단으로 동기화된 침묵의 콘텐츠 소비 공간 같았다. 모두 비슷한 각도로 고개를
숙인 채 엄지손가락으로 쉴 새 없이 화면을 넘겼다. 영국 사람들도 비슷하지만 결정적 차이가 있었다. 영국인이 밈이나 가십을 둠스크롤링할 때, 많은
한국인은 그 시간을 자기 계발에 썼다. 누군가는 40초짜리 뷰티 튜토리얼을, 누군가는 주식 팁 영상을 보았고, 청년은 빠르게 웹툰을 넘겼으며 옆자리
중년 남성은 정치 평론 영상을 연달아 보았다. 아무도 멍하니 있지 않았다. 그 공간에서 지루함 자체가 제거된 듯했다.
공공장소의 침묵에 감정적 거리감이 섞인 영국에서 온 내게, 한국의 침묵은 전혀 다른 종류였다. 사색의 침묵이 아니라 점유된 침묵이었다. 그 조용함
속에서는 엄청난 밀도의 자극이 끊임없이 흘렀다. 정보가 움직이고 이미지가 번쩍였으며, 피드는 새로고침이 되고 알림은 진동했으며 광고는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지하철은 더 이상 교통수단이 아니라, 사람들이 타고 내릴 때마다 접속하고 로그아웃하는 거대한 광섬유 케이블처럼 느껴졌다.
© shutterstock
삼각김밥 하나도 콘텐츠가 된다
— 도시 전체가 화면이 될 때
편의점, 카페, 택시, 엘리베이터, 대기실, 아파트 로비까지. 한국에서는 콘텐츠가 일상의 배경 자체에 완전히 녹아들어 있다. 이것이 인상적인 동시에
어딘가 낯선 이유는 무엇인가.
내게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이 빠른 소비문화가 도시의 일상 공간에 얼마나 깊숙이 녹아 있는가였다. 많은 나라에서 콘텐츠 소비는 여전히 분리된 행위에
가깝다. 집에서 TV를 보고, 출퇴근길에 메시지를 확인하고, 점심시간엔 휴대폰을 내려놓는 식이다. 하지만 한국은 그 경계가 거의 사라진 사회처럼
느껴진다.
심지어 편의점에 들르는 일조차 묘하게 콘텐츠가 된다. 계산대 위 화면에서는 광고가 끝없이 반복되고, 포장 식품은 연예인·K-팝과 협업하며,
QR코드는 고객을 온라인 이벤트와 한정판 캠페인, SNS 트렌드로 연결한다. 특정 색 포장 음식만 먹는 챌린지나, 아이돌이 예능에서 소개한 레시피를
따라 만드는 틱톡 영상을 찍는 사람도 보인다. 우유와 과자, 신문을 사는 영국 동네 가게가 여전히 기능적 공간인 데 반해, 한국에선 삼각김밥 하나 사는
일조차 거대한 디지털 생태계와 연결된 느낌을 준다.
한국 시스템에는 감탄할 만한 효율성이 있다. 사람들이 빠른 것을 기대하기에 실제로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인다. 정보는 거의 즉시 퍼지고, 새 앱은 몇
시간 만에 전국에서 쓰이며, 어떤 식당은 바이럴 영상 하나로 하루아침에 유명해진다. 결제는 일상에 완벽히 통합돼 있고 배달 음식은 놀랄 만큼 빨리
도착한다. 그 편리함은 과장하기 어려울 정도다.
외국인으로서 한국 사회의 적응력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다. 유행이 퍼지는 속도는 기술력만이 아니라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집단적 성향을 보여준다.
영국에서는 새 시스템이 등장하면 대개 의심과 몇 년간의 행정적 망설임이 따른다. 반면 한국인은 새 디지털 습관에 맞춰 일상을 재구성하는 데 놀랍도록
능숙하다. 마케팅 용어로 하면 한국인이 본능적 얼리어답터라면, 영국은 ‘후기 다수층(late majority)’에 가깝다.
일주일만 흐름을 안 보면 뒤처진 느낌이 들어
— 편리함과 피로감이
공존하는 사회
편리함과 피로감은 생각보다 가깝다. 삶을 효율적으로 만드는 시스템이 동시에, 끊임없이 최신 흐름을 좇아야 한다는 압박을 낳기 때문이다.
몇 년 살다 보니 이 환경의 또 다른 면도 보였다. 어느 날 저녁 술자리에서 한 한국인 친구가 내게 말했다.
“일주일만 흐름을 안 보면 뒤처진 느낌이 들어.”
처음엔 과장이라 여겼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말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유행은 엄청난 속도로 바뀌고 인터넷 신조어는 끊임없이 진화한다. 바이럴 영상은 눈
깜빡할 사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드라마는 여러 플랫폼에서 실시간 분석되며, 연예인 스캔들은 48시간 안에 폭발했다가 잊힌다. 문화적 대화 전체가
압축되고
가속된 순환 속에서 움직이는 느낌이다.
반면 영국 대중문화는 리듬이 느리다. 밈은 10~20년 전 레퍼런스로 만들어도 여전히 통하고, 축구 이야기는 며칠씩 이어지며, 사람들은 70~80년대
시트콤을 반복해 본다. 하지만 한국 문화는 대단히 현재지향적이다. 콘텐츠는 강렬하게 타오르다 금세 사라지고, 지난달 유행조차 벌써 촌스러워진다.
외국인끼리는 어떤 음식 유행을 기억하는지, 처음 왔을 때 어디가 ‘핫플’이었는지만 들어도 상대가 언제 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영국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 shutterstock
꼰대의 변론
— 혹은 지루함이 사라진 세계에 대하여
물론 이것은 아날로그 시대에 자란 사람의 푸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루함을 견디는 능력과 무언가를 진짜로 기억하는 능력 사이에는 생각보다 깊은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
나는 카탈로그와 여행 가이드북, 고작 세 개뿐인 TV 채널, 아침·저녁 뉴스에 의존하며 자랐다.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즉시 불러오는 콘텐츠를 그 시절엔
제한된 방식으로만 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가끔은 내가 콘텐츠 범람을 지나치게 비판하는 ‘꼰대’가 되어가는 건 아닌지 의심하기도 한다.
꼰대로 보일까 싶어 아이들에게 생각을 물은 적이 있다. 휴대폰에 정신이 팔려 몇 번이나 다시 불러야 했지만, 아이들은 현대 기술과 콘텐츠 소비 덕분에
삶을 훨씬 효율적으로 살 수 있다고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예전이라면 멍하니 흘려보냈을 시간까지 활용해 더 많은 일을 한다는 것이다. 긴 영상을
하이라이트만 추린 쇼츠로, 그마저 1.5배속으로 보면서 말이다.
콘텐츠 혁명의 혜택은 젊은 세대만의 것이 아니다. 예전엔 어머니가 내가 너무 멀리 살아 정서적 거리감이 든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하지만 요즘은 내
SNS를 팔로우하며 삶을 거의 실시간으로 따라오신다. 글을 올리면 대개 2분 안에 ‘좋아요’가 눌린다. 한국 여행 유튜브를 여러 개 구독해 다음 여행을
계획하고, AI 번역으로 눈에 띄는 한국 콘텐츠는 무엇이든 즉시 영어로 보신다. 거의 스토킹 수준이지만, 13시간 비행 거리를 훌쩍 좁혀 주는 것도
사실이다.
© shutterstock
효율성이라는 도덕
— 7분 만에 소비되는 세계
많은 영상이 겉보기엔 정상 속도 같지만, 실제로는 촬영 단계부터 1.2배속으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시간 경과’ 자막과 ‘점프컷’ 몇 개를
더하면 몇 시간 분량이 깔끔한 10분짜리로 압축된다. 게다가 대부분 그마저 1.5배속으로 보기에 실제 시청 시간은 7~8분으로 줄어든다.
결국 우리는 효율성이 실용을 넘어 도덕적 가치처럼 받아들여지는 압박 속에 사는 듯하다. 핵심만 빠르게 압축해 전달받고 넘어갈 수 있는데 굳이 시간을
오래 쓸 필요가 있느냐는 논리다.
하지만 나는 끝없는 즉각적 만족에 경계심을 느낀다. 어떤 것들은 천천히 스며들고 숙성되어 내면에 자리 잡을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야 매번 검색하지
않아도 정보가 기억에 남고, 경험도 금세 사라지는 순간이 아니라 진짜 ‘추억’으로 남는다.
또한 우리는 점점 화면에 붙들린 채 모든 경험을 혼자 소비하고 있다. 혼자 밥을 먹으며 먹방을 보는 모습에는 묘한 아이러니가 있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처럼, 서로 감상을 이야기하고 해석을 나눌 때 즐거움도 더 커지는 것은 아닐까.
수도원 같은 카페
— 반 박자 늦은 외국인
서울의 카페에서는 수백 명이 같은 공간에 있어도 정신은 제각기 흩어져 있다. 카페는 더 이상 사교의 공간이 아니라 개인 콘텐츠 소비를 위한 임시 도킹
스테이션처럼 보인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오락 분야에만 머물지 않는다. 한국의 카페는 분위기부터 영국과 사뭇 다르다. 런던의 펍이나 카페에서는 사람들이 주로 대화하러 모이고,
어느 정도의 소음 자체가 공간의 일부다. 하지만 서울의 카페에서는 많은 이가 각자의 디지털 세계에 갇혀 있는 듯하다. 가득 차 있어도 놀랄 만큼
조용하다. 노트북 화면이 빛나고 이어폰은 늘 꽂혀 있으며 태블릿에서는 드라마나 강의가 재생된다. 어딘가 수도원 같은 분위기마저 감돈다.
한국의 디지털 생태계는 서구와 비교하면 놀랄 만큼 독자적으로 작동한다. 내비게이션, 메신저, 은행, 쇼핑, 배달까지 복잡하고 독립적인 국내 네트워크가
있다. 수출과 엔터테인먼트, 기술에서는 세계와 긴밀히 연결돼 있지만, 국내적으로는 오히려 폐쇄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온라인 유머는 지나치게 로컬한
맥락에 기대고, 유행은 촘촘히 연결된 커뮤니티 안에서 엄청난 속도로 퍼진다. 외국인은 배제되진 않아도 늘 반 박자 뒤처져 숨 가쁘게 따라간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 shutterstock
도파민 디톡스
— 혹은 멍때리기 대회의 역설
그 불편함을 극복하기 위해 ‘멍때리기 대회’까지 만들어냈다는 사실이, 어쩌면 가장 솔직한 자기 고백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환경에는 분명한 활력이 있다. 한국은 내가 경험한 도시 문화 중 가장 역동적인 곳에 속한다. 새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실험되고 기업은 빠르게
적응하며 창의적 시도가 넘친다. 서울 거리를 걷다 보면 미래 도시의 프로토타입을 보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점점 이런 끊임없는 주의력 최적화 속에서 무엇이 사라지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영국에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문화가 남아 있다. 사람들은 공원에 앉아 비둘기를 멍하니 바라보고, 별 의미 없는 날씨
이야기를 하며 천천히 맥주를 마신다. 지루함을 꽤 잘 견딘다. 반면 한국은 정신적 공백 자체를 불편해하는 듯하고, 기다림은 즉시 디지털 콘텐츠로 채워야
할 문제로 인식된다.
엘리베이터에도 화면이 있고, 택시 머리받침에서는 광고가, 아파트 우편함 근처에서는 안내 영상이 재생된다. 병원 대기실조차 콘텐츠 피드를 끊임없이 틀어
둔다. 도시 전체가 우리의 주의를 두고 경쟁하는 느낌이다.
어떤 날 저녁, 서울의 끝없는 자극을 지나 집에 오면 힘든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피곤하다. 비슷한 피로감을 호소하는 한국 친구도 많다.
그래서인지 휴대폰이 제한되는 템플스테이를 찾거나, 48시간 동안 디지털과 단절된 채 모의 감옥에 들어가는 ‘내 안의 감옥’ 프로그램으로 ‘도파민
디톡스’를 한다는 이야기도 흔하다. 활기찬 현대성 아래, 끊임없는 자극이 심리적 비용을 치르게 한다는 인식이 점점 퍼지는 듯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시스템 안에 머문다. 시스템이 너무나 잘 작동하기 때문이다. 편리함은 중독성이 있다. 초고속 배달은 무서울 만큼 빠르게 일상이
되고, 즉각적 엔터테인먼트는 효율적으로 느껴지며, 알고리즘 추천은 번거로움을 줄여 준다. 한국 사회는 불편을 제거하는 기술을 다른 나라가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브라이튼의 오후 vs 서울의 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외국인들이 한국에 그토록 매료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한국에서의 삶은 마치 미래에 사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늘을 나는 자동차 같은
SF적 미래가 아니라, 인간의 주의력 자체가 디지털 인프라에 완전히 통합된 미래다.
나는 가끔 영국에 잠시 돌아갔을 때 그 차이를 가장 강하게 느낀다. 런던은 갑자기 훨씬 느리고 느슨하며 덜 조직된 도시처럼 느껴진다. 기차가 연착돼도
승객들은 한숨만 쉰다. 가게는 놀랄 만큼 일찍 문을 닫고, 원하면 디지털과 거의 상호작용하지 않은 채 오후를 보낼 수도 있다. 한국 생활에 익숙해지면
처음엔 불편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상하게도 사치처럼 느껴진다.
몇 달 전 영국에서 나는 브라이튼 근처 작은 카페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는 노인들을 바라본 적이 있다. 아무도 서두르지 않았다. 아무도 커피 사진을
찍지 않았다. 생산성이나 최적화에 집착하는 사람도 없었다. 30분 동안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참 좋았다.
하지만 또 다른 날, 휴대폰 신호가 터지지 않는 지역을 지나자 마치 세상과 단절된 듯 불안하고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서울로 돌아오자 익숙한 가속감이 곧바로 되살아났다. 알림이 울리고 배달 앱이 진동했으며 지하철 광고 화면이 번쩍였다.
이틀도 지나지
않아 나는
완전히 다시 적응해 있었다. 환승을 빨리 하려 몇 번째 칸에 탈지 검색하고, 도착해 갈 맛집을 찾아보며, 정차역마다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확인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한국의 가장 큰 강점이자 가장 큰 위험인지도 모른다. 시스템이 너무 효율적이어서 거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환경은 자연스럽게 인간의
행동을 바꾸고, 끊임없는 자극을 정상처럼 느끼게 만든다.
© shutterstock
주의력이 인프라가 된 사회
— 미래의 프로토타입
한국이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이런 변화가 흥분과 피로를 동시에 만든다는 사실이다. 연결성을 높이는 동시에 고립감을 키우고, 편리함을 주는 동시에
집중력을 소모한다.
외국인으로서 나는 어느 한쪽만 낭만화하고 싶지는 않다. 영국의 느린 속도는 때로 비효율과 정체, 단순한 안일함을 뜻하기도 한다. 반대로 한국의 속도감은
엄청난 창의성과 편리함을 낳는다. 어느 쪽도 완벽히 우월하지 않으며, 둘 다 분명한 대가를 치른다.
다만 나는 한국이 많은 도시 사회가 향할 미래를 미리 보여주는 건 아닐지 생각한다. 일상과 끊임없는 콘텐츠 소비의 결합은 이제 되돌리기 어려워 보인다.
젊은 세대는 디지털 환경을 물리적 환경만큼 자연스럽게 살아간다. 주의력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인프라가 된 셈이다.
소통은 빨라지지만 주의력은 짧아지고, 완벽하게 큐레이션 된 경험을 얻는 대신 모험과 우연성, 진정성은 줄어든다. 한국에서의 삶은 미디어 환경이 인간의
감정 리듬을 얼마나 깊이 바꾸는지 더욱 의식하게 했다. 기다리고 쉬고 대화하고 출퇴근하는 방식은 물론 사고하는 방식까지도, 모든 공백이 정보로 채워질
때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변해 간다.
늦은 밤 서울 지하철 안에서 나는 종종 어두운 창문에 희미하게 비친 수십 개의 얼굴들을 바라본다. 모두 연결되어 있다. 모두 소비하고 있다. 모두 거의
침묵 속에서 보이지 않는 정보의 흐름을 따라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그 모습은 묘하게 아름답다. 그리고 약간은 무섭기도 하다.
가끔 나는 한국이 단지 우리보다 먼저 지루함을 제거하는 법을 배운 것은 아닐지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 과정에서 또 무엇이 함께 사라지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폴 카버(Paul Carver)
영국 출신으로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을 졸업했고, 현재 한국에서 방송인, 유튜버, 프리랜서 번역가 등 다양한 활동 중이다. 2016년부터 2021년 1월까지 서울특별시청에서 외국인다문화담당관, 글로벌센터운영팀장으로 근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