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제임스 캐머런은 일본 애니메이션 <총몽>에 매료되어 실사화를 목표로 판권을 사들였지만, 당시 기술로는 원작의 느낌을 구현할 수 없어 20년이 지나서야 영화 <알리타>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광고를 포함한 대부분의 영상 제작엔 두 개의 기본 축이 있다. 무엇을 만들 것인가’와 ‘어떻게 만들 것인가’ 즉, 제작할 소재(아이디어, 스토리)가 구성되면 이것을 어떻게 표현(시각효과, 제작 프로세스)할 것인가로 이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2022년을 기점으로 생성형 AI가 광고 현장에 본격적으로 투입되면서 소위 ‘AI 도입기’가 시작되었다. 이후 광고계는 광고주와 대행사, 제작사 가릴 것 없이 AI 광풍이 휘몰아치며 모든 관심은 ‘무엇을 만들 것인가’에서 ‘어떻게 만들 것인가’로 급격한 쏠림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생성형 AI를 중심으로 한 기술과 표현 기법이 새로운 ‘솔루션’으로 주목받으며 시대가 요구하는 ‘AI 능력’의 과시와 증명이 필요했다. 광고업계의 각 집단은 ‘AI 리더십 선점’을 향해 앞다투어 AI를 활용한 기술 구현에 집착했다. 심지어 광고의 내용보다도 ‘이 광고는 AI로 만들어진 광고입니다’라는 자막 한 줄에 더 힘을 주었던 시기였다.

이후 날이 갈수록 AI의 작업 편의성이 놀라운 속도로 개선되고 더 높은 품질을 생성하며 진입장벽이 허물어졌다. AI 활용은 더 이상 특수능력자들만의 성역이 아닌 누구나 양질의 이미지와 영상 제작이 가능하도록 변화하고 있었다. 이제 광고영상 제작자의 방향성은 기술의 진보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본질’로 회귀함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AI를 활용한 표현 퀄리티의 상향 평준화는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손쉽게 해결하는 대중화된 솔루션으로 자릴 잡아갔고, 이렇게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진 도구는 그 자체로 인한 차별적 가치보다 그것을 활용해 ‘무엇을 만들 것인가’가 끌어낸 최종 결과물로 종합적인 성과 평가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AI 결과물의 최종 퀄리티와 경쟁력을 가르는 것은 독창적인 ‘스토리텔링’이 될 수밖에 없으며 모든 영상 언어와 구성이 그러하겠지만 특히 마케팅 목표와 과제를 베이스로 메시지를 녹여내야 하는 광고캠페인 영상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AI 자동화, 콘텐츠 과잉, 기술의 상향 평준화로 소위 ‘방법의 시대’가 조기마감 함에 따라 AI 영상 제작에 관한 질문도 변화하고 있다. AI 출현과 도입기엔 “어떻게 더 빠르게, 더 싸게, 더 많이 만들까?”라는 질문들로 비용 효율, 실행력, 반복 가능성에 집중했다.
반면 기술이 상향 평준화된 본격적인 AI 창의의 시기엔 “무엇을 만들 것인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영상이 전달하고자 하는 목표나 효과를 얻기 위한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는 스토리텔링이 중요해지고 있다. 누구나 챗GPT(ChatGPT), 미드저니(Midjourney), 소라(Sora) 등의 도구를 쓸 수 있는 시대다. 이 도구들을 ‘얼마나 잘 다루느냐’보다, 이들을 통해 ‘무엇을 만들어내느냐’가 새로운 경쟁력이 되고, 이는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는 스토리텔링이 콘텐츠의 중심에 서게 되는 이유다.
짧은 기간 화려하게 조명되었던 AI 영상 제작 기술에 대한 관심은 광고영상 제작 분야가 ‘고도의 프롬프팅 기술과 AI 전문가들의 영역’으로 대체될 듯한 극단적 착시를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영상 언어와 구성을 통한 스토리텔링이 전체적인 퀄리티를 완성한다는 본질로의 깨달음과 회귀 흐름은 결과적으로 영상 창작자의 역할이 ‘도구의 사용자’에서 ‘의미와 내용의 표현가’로 제자리를 찾아 이동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따라서 점점 AI 영상 제작의 방향은 기술 경쟁이 아닌 내용 경쟁으로 가게 될 것이며 콘텐츠, 제품, 브랜드가 가져야 할 목적의 해결이나 목표 달성을 향한 스토리 전개와 구성, 혹은 AI를 이용해 소비자를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와 무엇을 자극할 것인가에 대한 입체적 고민이 녹아있는 스토리텔링이 핵심이 될 것이다.
AI를 활용한 영상 제작에 기대할 수 있는 대표적인 세 가지 효과가 있다. 불가능한 표현이 가능해지거나(가능성 확장), 고비용의 작업이 저렴해지거나(비용 감축), 오래 걸릴 작업이 빨라지거나(시간 단축). 이 세 가지가 동시에 작동되면 완벽하고, 이 중 한 가지만 작동되어도 AI 투입의 성과는 분명한 것이다. AI 제작 성과의 사례로 HSAD의 ‘OTR AI’팀이 진행했던 프로젝트 결과물 중 몇 가지를 소개해 본다.
KB금융그룹, <할머니 없는 할머니 토스트>¹⁾
AI 복원 기술을 통해 고인이 된 할머니를 영상에 등장시켜, 실제 스토리를 감동적으로 풀어낸 프로젝트다. 단 몇 장의 사진과 짧은 음성 자료를 활용해 얼굴과 목소리를 복원했다. 가족의 사연과 상봉의 과정을 하나의 호흡으로 풀어내며 AI 기술이 합주해 내는 따뜻한 온도를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내고자 했다. 이 프로젝트는 스토리텔링 구상 시점부터 AI 테스트와 함께 시작되었으며 애초에 AI 복원 기술 없이는 실현 불가능한 기획이었다.


KB금융그룹, <할머니 없는 할머니 토스트> 광고 중 갈무리
CU, <마음 보관>²⁾
결식아동 돕기 캠페인을 100% AI 기반으로 제작한 사례다. 대학생 공모전을 통해 도출된 아이디어를 감성적인 스토리텔링으로 구성하고, 모든 장면을 AI로 구현해 시간, 비용, 표현력 면에서 완성도 높은 결과를 도출했다. 스토리텔링은 기본적인 내용의 흐름뿐 아니라 구조, 톤과 분위기(tone & mood)와 더불어 전달력을 높이는 아이디어까지 포괄해 볼 수 있다. AI로 제작할 때 늘 경계되는 현상인 ‘불편한 골짜기’를 클레이 애니메이션으로 부드럽게 해결하고자 했던 의도 역시 스토리텔링의 일부이다.

CU, <마음 보관> 광고 중 갈무리
LG전자, <그램 프로>³⁾
LG전자의 ‘그램 프로’ 프로젝트는 AI 제작 방식을 통해 광고 소재의 다변화를 실현한 예다. 메인 광고 영상과는 별도로 다양한 플랫폼용 콘텐츠를 짧은 시간 내에 제작해야 했던 상황에서, 기존 제작 방식 대비 3D 콤바인 워크플로우를 적용한 AI 기반 제작 방식은 기획, 퀄리티, 제작 속도 모두에서 효과적인 성과를 거뒀다. 실무 영역의 스토리텔링 과정에는 ‘기간 내 제작 가능’ 부분의 고려도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AI 제작 방식은 물리적인 한계에서 훨씬 자유롭기에 스토리텔링에서도 높은 자유도를 가질 수 있다.

LG전자, <그램 프로> 광고 중 갈무리
이처럼 AI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고비용을 저비용으로, 긴 제작 기간을 단축시키는 효율적인 또 하나의 프로세스로 자리잡고 있으며, 이는 전통적인 광고 제작 방식과 뚜렷이 구분되는 지점이다.
기존의 제작 방식이 기획-촬영-편집-후반 작업으로 이어지는 일방적인 선형 구조였다면, AI 제작 방식은 아이디어 도출, 스토리텔링과 동시에 소스를 생성해 바로 검증하고 수정하는 병렬 방식의 다중 진행이 가능하다. 이 덕분에 결과물에 대한 빠른 예측이 가능하고, 기획안과 실제 구현물 사이의 격차가 줄어들며, 전체 제작 기간 역시 크게 단축된다.

[그림 1] AI 기반 제작 방식과 기존 제작 방식의 차이
이러한 작업 방식의 변화는 팀 구성과 조직의 구조에도 영향을 주게 될 것으로 본다. 기존에는 크고 전문화된 대규모 팀의 조직력으로 분업과 협업이 수행되었다면, AI 도구를 적극 활용하는 환경에서는 소규모 팀이나 개인 단위에서도 통합 작업이 가능하므로 효율적인 인원 분배와 동시 진행이 가능하도록 재편된 경량화 조직이 효율성 면에서 유리해진다.
이에 따라 진정한 수평적 협업이 가능해지고, 유연성과 민첩성을 갖춘 소규모 창작자들도 업계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AI는 이미 수많은 창작 영역에 진입했으며, 텍스트부터 이미지, 영상까지 다양한 생성이 가능하다. 이렇게 고도화 되어가는 AI 시대라면, 결국 아이디어와 스토리텔링도 자동화될 수 있는 것 아닌가?
질문은 단순하지만, 답은 복잡하다. 아이디어의 생성을 위해서는 다양하고 막대한 학습자료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기본적인 광고 화법과 구성부터 기초 아이디어 발상 패턴, 브랜드 가이드, 방향성, 필수 소구점, 소비자 인사이트, 브랜드 경험, 데이터, 트렌드, 심지어 어제 막 떠오른 밈까지…. 거기에 지금까지 제작된 모든 광고안의 학습이 진행된다면 과연 지금까지의 광고와 다른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이 빠르고 다양하게 생성될 것인가? 알파고는 인간과의 승부를 위해 학습한 바둑 ‘기보’가 있었지만, 광고 크리에이티브에 과연 ‘기보’란 게 존재할 수 있던가?
창의성과 공감력, 그리고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스토리텔링은 여전히 인간의 감각과 통찰에서 출발한다. 바둑의 기보처럼 정형화된 공식도, 확률상 적중하는 계산된 답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AI를 활용한 스토리텔링이 아예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되는 것’과 ‘좋은 것’은 엄연히 차이가 있지 않은가.
AI 기술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진보할 것이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이 모든 것을 대체할 수는 없다. 우리가 기술 위에 어떤 이야기를 쌓아 올릴 것인지, 그리고 그 이야기가 사회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는 여전히 인간의 몫일 것이다.
최근 폭발적인 AI 기술의 성장을 직접 활용하며 느끼는 솔직한 심정은 기술이 불러온 기대감만큼이나 씁쓸함도 못지않게 커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며칠 전 새로 등장한 놀라운 AI 툴을 테스트하다가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문득 AI에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AI 시대에 나의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러자 AI는 이런 답을 내게 보내왔다.“기술이 답해줄 수 없는 질문. 바로 그것이 당신의 다음을 결정할 겁니다.”
AI 시대, 광고 제작의 본질은 ‘기술’이 아니라 ‘의미’에 있고 그 의미를 완성하는 질문은 기술이 아닌 인간이 던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