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제작 1.0: 판권 수출에서 플라잉 PD까지

공동제작의 시초는 이른바 완제품 수출이었다. 1990년~2000년대까지 단순 방영 판권을 수출하거나 포맷‧리메이크 라이선스 계약이 대부분이었다. 중국에 <질투>·<사랑이 뭐길래>(MBC) 등의 판권이 판매되면서 해외 시장의 길이 열렸고, <별은 내 가슴에>(MBC)가 수출돼 화제를 모았다.1) 2000년대 들어 일본과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겨울연가>(KBS)가 한류 열풍을 일으켰다. <대장금>(MBC)도 2003년 대만 수출을 시작으로 중동‧유럽‧호주 등지로 뻗어갔다. 미디어 지형이 복잡해지기 전이라 방송사들은 국내 흥행작을 중심으로 해외 시장의 판로를 개척하는 데 중점을 뒀다. 콘텐츠 유통망을 넓혀가는 방식이었다.

판권·포맷 수출이 늘자, 예능 공동제작이 등장했다. <나는 가수다>(MBC)를 시작으로 예능 한류가 급물살을 탔다. <나는 가수다>가 중국 현지에서 리메이크될 당시 플라잉PD라는 제작 방식이 주목받았다. 플라잉PD는 국내 제작진이 현지에 직접 파견돼 프로그램의 노하우를 전수하거나 자문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런닝맨>‧(SBS), <1박 2일>(KBS), <아빠! 어디가?>(MBC) 등은 PD와 작가들이 현지에 파견돼 프로그램의 완성도를 높였다. <슈퍼맨이 돌아왔다>‧<불후의 명곡>(KBS) 등의 판권도 잇달아 수출됐다. 콘텐츠의 협업 범위가 넓어진 만큼 각국의 문화적‧정서적 차이를 파악하는 게 관건이었다.

드라마 공동제작도 시도됐다. 다만 공동제작 드라마라는 이름 아래 공동출자나 공동작업 없이 한국 인기 연예인의 출연만으로 이뤄진 경우가 많았다. 한국과 중국 CCTV가 공동제작한 다큐 드라마 <임진왜란 1592>(KBS)의 경우엔 제작비를 50대 502)을 내며 합작을 시도하기도 했다. 판권 수출 규모도 커졌다. 2014년 <별에서 온 그대>(SBS)는 한류 열풍을 달궜고, <태양의 후예>(KBS)가 회당 23만 달러(한화 약 3억 원)3),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SBS)가 회당 40만 달러(한화 약 4억 원)에 판매되며 최고가를 경신했다. 해외 콘텐츠 시장의 가능성을 확인했지만, 사드 배치 이후 한한령(限韓令·한류 제한령)으로 공동제작에 제동이 걸렸다.

공동제작 2.0: 기획‧제작‧캐스팅‧마케팅까지 새로운 공식

넷플릭스가 지난 2016년 국내에 상륙하면서 판도가 바뀌었다. 방송사 중심 체제에서 벗어나 글로벌‧토종 OTT가 치열하게 경쟁했다. 넷플릭스가 150억 원에 불과했던 콘텐츠 투자를 약 8,000억 원(2022년)4)까지 늘리며 독주 체제를 굳혔다. 과열된 경쟁으로 제작비는 급등했다. 방송사의 연간 광고 매출(약 8,354억 원)5)은 10년 전과 비교해 반토막 났다. 방송사, 제작사, 플랫폼 모두 수익 개선이 절실해진 가운데 공동제작은 기획 단계부터 글로벌 협업 방식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최근 시도된 공동제작 방식은 변화의 흐름을 보여준다. 그간 판권을 판매하거나 노하우를 전하던 때와 달리 아예 처음부터 세계 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CJ ENM은 지난 6월 아마존 프라임에서 일본판 <내 남편과 결혼해줘>를 공개했다. 리메이크권 수출에 그치지 않고, 제작‧캐스팅‧현지화 작업에 국내 제작진이 참여했다. <더 글로리>를 맡았던 안길호 PD가 연출을, <1리터의 눈물>의 작가 오시마 사토미가 각본을 썼다. 한국판을 맡았던 스튜디오드래곤 손자영 PD와 CJ ENM 이상화 PD가 책임프로듀서로 참여했다. 일본 TBS와 공동제작한 <첫사랑 DOGs>도 현재 일본에서 방영6) 중이며, tvN에도 편성됐다. CJ ENM은 지난 2023년 미국 제작사 스카이댄스와 <운명을 읽는 기계>(2023)를 함께 제작했고, 지난 7월엔 중동 법인을 설립하는 등 공동제작의 저변을 넓히는 데 시동을 걸고 있다.

중앙그룹 계열 SLL은 일본 TV아사히와 드라마 <마물>을 공동제작했다. 지난 4월 공개된 <마물>은 SLL와 일본 방송사가 함께 만든 첫 작품이다. <옥씨부인전>의 진혁 PD가 연출을 맡았다. 일본 WOWOW가 판권 구매에 적극적이었던 드라마 <괴물>(JTBC)도 지난 7월 리메이크 방송됐다. 해외의 국내 작품을 향한 관심은 K-콘텐츠에 대한 잠재적 수요를 엿볼 수 있다. 이에 SLL은 자체 지식재산권(IP)을 활용해 미국‧일본 등지에 제작형 수출을 확대한다는 전략을 밝혔다. 지난 5월엔 대만 콘텐츠진흥원과 드라마·영화 공동 개발 업무협약을 맺었다.

국내 제작사의 공동제작 움직임도 가시화되고 있다. 디즈니플러스 시리즈 <무빙>을 만든 제작사 미스터로맨스는 프랑스 스튜디오 카날과 <암흑가의 세 사람>을 OTT 드라마 시리즈7)를 선보일 예정이다. SBS 자회사인 스튜디오S도 일본의 NTT도코모와 요시모토흥업의 합작법인과 함께 <스토브리그>(SBS)를 리메이크하는 동시에 글로벌 비즈니스 사업에 협력한다고 밝혔다. 제작사 빅인스퀘어와 스튜디오플로우는 웹툰 <개인적인 택시>를 미드폼 드라마로 제작한다. 이번 작품은 일본 후지TV와 공동제작 계약8)을 체결해 아시아‧북미‧유럽 시장을 향한 프로젝트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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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판 <내 남편과 결혼해줘>, 일본 드라마 <첫사랑 DOGs>, 일본 드라마 <마물>

(출처: CJENM, SLL)

공동제작의 빛과 그림자

이처럼 공동제작의 출발점이 달라졌다. 콘텐츠 제작 과정에 인력과 자본도 함께 투여되는 흐름이다. 과거엔 방송사 중심으로 해외 판로 개척이 주요했다면,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복수의 제작사나 투자자들이 제작비와 업무를 분담하고, 콘텐츠를 기획 개발‧제작 유통 ‧마케팅까지 참여해 권리를 나누는 시스템으로 재편되고 있다. 공동제작한 작품이 흥행한다면 내수시장의 한계를 딛고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다. 물론 드라마나 예능 등 장르의 속성에 따라 차이가 존재할 테지만, K-팝처럼 IP 다각화를 통한 지속적인 수익을 창출하는 기반으로 삼을 수도 있다.

반면 고려할 지점도 많아졌다. 판권을 판매하거나 제작 노하우를 전하는 소극적 방식을 넘어 아예 처음부터 기획‧제작‧마케팅 등 다양한 주체들이 협업하는 만큼 그 과정은 훨씬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글로벌 공동제작이 주목받을수록 국내 창작 생태계에 대한 점검이 요구되는 배경이다. 현재 국내 공동제작 펀드 지원, 세제지원, 저작권 보호를 위한 법적 토대 마련 등이 당면 과제로 꼽히고 있다. 제작 과정에서는 수익 배분, IP의 귀속 문제를 사전에 촘촘하게 설계하고, 계약 조항을 검토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얽히는 만큼 콘텐츠 제작 인력 구성, 촬영 및 후반 작업, 최종 결과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반영해야 한다.

돌발 변수도 있다. 아무리 사전 기획 단계가 철저하더라도 창작 산업의 특성상 시나리오나 제작 방식을 수정‧조율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각국의 문화적 차이 혹은 서로 다른 제작 시스템은 불협화음을 가져올 수 있다. 현재 공동제작은 중국‧일본을 비롯해 동남아시아가 주요 타깃이지만, 북미‧유럽 시장으로 확장할수록 현지 사정을 고려하며 글로벌 파트너와 발을 잘 맞춰나가야 한다. 작품을 완성한 후엔 투자금을 회수하는 과정이나 흥행에 실패한 경우 손해배상에 따른 소송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공동제작, 창작 생태계에 던진 과제

공동제작은 급변한 미디어 환경 속에서 생존 전략으로 기능해 왔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콘텐츠 생태계의 근간은 여전히 창작이라는 사실이다. 수백억 원이 투입된 대작도 흥행을 담보하지 못하고, 저예산 작품이 의외의 성과를 내는 경우도 많다. 검증된 웹툰·웹소설 원작이 대세지만, 대중은 끊임없이 신선한 이야기를 갈망한다. 따라서 공동제작 2.0은 자본과 제작에 머물 게 아니라, 창작 생태계에 어떤 방식으로 반영할지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공동제작은 서로 다른 국가와 문화권이 협업하는 구조이기에 자연스럽게 분업과 전문화를 요구한다. 이 지점에서 창작 시스템의 고도화가 필요하다. 넷플릭스가 공격적인 투자와 함께 국가별·장르별 포트폴리오를 확장해 온 것처럼 글로벌 시장에서 협업하려면 창작자의 역할도 세분화된 전문성을 전제로 해야 한다. 한국은 여전히 원톱 작가 체제가 강하지만 중국과 영미권은 프로듀서와 작가들이 팀을 이뤄 집단 창작을 하는 방식이 보편적이다. 공동제작의 확산은 장르·캐릭터·대본 등 창작자의 전문화가 필요하다.9)

사후적 IP 활용 전략도 필수다. 콘텐츠의 생명력은 끝나지 않는다. K팝이 콘서트·굿즈·게임으로 수익을 확장했듯 공동제작 콘텐츠도 지속 가능한 수익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팬덤의 반응을 기획 단계에서부터 반영하지 않으면 해외자본 의존도만 높아지고, 국내 제작사의 자생력은 약화될 수 있다. K-방송영상콘텐츠가 주목받는 지금, 국제 공동제작은 단순한 수익 모델이 아니다. 중소 제작사부터 대형 스튜디오, 창작자까지 합리적 역할 분담을 이뤄낼 때 새로운 도약의 해법이 될 수 있다.

방연주

방연주
(대중문화평론가)

대중문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디지털 미디어와 방송영상 콘텐츠의 변화를 분석하고, 대중문화 현상에 대한 비평을 제시하고 있다. 현재 <PD저널>, <우리문화> 등 다양한 매체에 기고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