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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 Picture

가상과 현실을 융합시키는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의 힘

글. 이진(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새로운 기술의 등장은 접하는 이의 경이를 동반한다.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움직이는 사진이자, 최초의 영화인 〈열차의 도착〉을 처음 본 파리 사람들은 1분 남짓한 영화를 보면서 열차가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줄 알고 혼비백산했다. 인간의 오감을 기반으로 경험을 시뮬레이션하는 VR의 경우, 스탠리 G. 웨인바움(Stanley Grauman Weinbaum)의 SF 소설 〈피그말리온의 안경(Pygmalion’s Spectacles)〉에서 그 개념이 제시되었고, 이후 등장한 VR 디바이스를 통해서 영화, 게임 등 다양한 매체에서 제작이 시도되었다.

스토리텔링의 지속가능성

새로운 기술이 동반하는 경험에 대한 경이는 새로움의 유효기간이 지나가면 그 빛이 바랜다. 영화는 움직이는 사진이라는 기술적 새로움을 넘어 창작자가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고 담아낼 수 있는 대표적인 영상 매체로 자리 잡았고, VR과 같은 실감형 기술은 아직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하며 그 길을 찾고 있다. 결국 기술은 기술 자체가 주는 놀라움보다는 의미 있는 경험으로 이어질 때 지속가능성을 얻는다. 기술의 목적이 기술 자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바로 기술과 콘텐츠의 결합에서 스토리텔링이 소구되는 이유이다. 스토리텔링은 어떤 것을 경험하도록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창작자를 위한 나침반이자 디지털 미디어 환경을 기반으로한 집단제작 시스템에서 콘텐츠를 제작할 때 다양한 분야 간 협업을 위해 필수적인 설계도이다.

트랜스미디어(Trans media) 콘텐츠에서 스토리텔링이 방법론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 또한 동일한 맥락의 연장선이다.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서 트랜스미디어는 콘텐츠 제작 주체와 향유자를 아우르는 주요한 개념이 되었다. 미디어 제작 주체들은 콘텐츠 IP 활용 전략과 수익의 극대화를 위해 트랜스미디어가 가진 힘에 주목하고 있으며, 사용자들은 N스크린1)과 개인미디어의 보편화와 함께 자연스럽게 복수의 미디어 플랫폼을 넘나들며 콘텐츠를 소비한다. 헨리 젠킨스(Henry Jenkins)가 하나의 세계를 공유하는 이야기를 복수의 미디어를 통해 전달하는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의 개념을 제시한 이래, 트랜스미디어는 OSMU(One Source Multi Use)를 포괄하는 새로운 콘텐츠 창작 방법론으로 부상하고 있다. 트랜스미디어 콘텐츠 프로듀서 미셸 레일핵(Michel Reihac)은 트랜스미디어를 ‘전략이나 기술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마음의 상태(More a State of Mind than a Technique)’로 간주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트랜스미디어는 단순히 복수의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는 이야기가 양적으로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제작자와 향유자, 콘텐츠 간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지는 스토리월드를 궁극적인 지향점으로 하기 때문이다.

‘마블의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나 〈해리포터(Harry Potter)〉 시리즈와 같이 성공적이라고 평가받는 대부분의 트랜스미디어 프로젝트에서 시도하는 전형적인 방식은 새로운 캐릭터를 덧붙이거나 스토리월드를 시공간적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확장과 변형의 방식은 원작 IP를 기반으로 비교적 안정적으로 세계의 확장을 꾀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장점이다. 그런데 최근,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영상 콘텐츠를 넘어 게임이나 아이돌과 같은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새로운 트랜스미디어적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접근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바로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캐릭터이다.

현실과 가상을 넘나드는 K-Pop 스타들

아이돌 그룹 K/DA는 2018년 11월 싱글 앨범 ‘POP/STARS’의 발매와 함께 인천 문학 주경기장에서 열린 〈2018 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챔피언십 결승전〉 개막식에서 데뷔 무대를 가졌다. 공연을 관람한 4,000만 명의 관객은 열광했고, 유튜브에 공개된 뮤직비디오의 조회수는 2020년 11월 현재 3.9억 뷰를 넘겼다. 현존하는 가장 성공적인 가상 아이돌의 탄생이다.

K/DA의 제작사는 ‘리그 오브 레전드’를 개발 및 서비스하는 라이엇게임즈다. K/DA의 멤버는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의 세계관에 존재하는 캐릭터들로 구성되어 있다. 리그 오브 레전드의 세계관은 룬테라 대륙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 외에 출시되는 캐릭터 스킨을 중심으로 평행세계의 형태를 취한다. K/DA는 ‘또 다른 유니버스’로 분류되는 평행세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리그 오브 레전드의 e스포츠 개막식 무대에서 모션캡쳐와 증강현실을 활용해 K/DA의 홀로그램 영상을 구성하고, 실제 목소리를 녹음했던 미국의 팝가수와 한국의 아이돌 그룹 멤버가 직접 등장해 함께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와 동시에 음원, 뮤직비디오, 프로필, 멤버들의 사생활이 담긴 잡지 형식의 인터뷰가 유튜브, 음원 플랫폼, 웹페이지를 통해 공개됐다. K/DA 제작진들은 기존 게임 세계관에 기반한 캐릭터들의 정체성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케이팝 스타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고심했다고 밝힌바 있다. 게임의 판타지 세계관에서 설정된 캐릭터의 배경 스토리와 전투 스타일은 K/DA라는 아이돌 그룹으로서의 멤버 포지션과 개성으로 이어진다.

개막식 무대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공간에서 자신이 플레이하는 게임의 캐릭터가 홀로그램, 모션캡쳐 같은 기술을 매개로 한 걸그룹의 형태로 벌이는 퍼포먼스에 플레이어가 열광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다. 기존에 이와 같은 가상 아이돌이 시도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K/DA만큼 가상과 현실의 교차 혹은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데 성공한 사례는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심지어 K/DA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리그 오브 레전드를 플레이하지 않았던 사람이 플레이를 시작하기도 했다. K/DA는 싱글 발매 후 2년이 지난 2020년 11월, 첫 정규 앨범 ‘ALL OUT’을 발표하며 컴백했다. 타이틀곡 ‘MORE’는 빌보드 월드 디지털 송 세일즈 차트 1위를 차지했고, 뮤직비디오는 공개 하루 만에 유튜브 조회 수 1,200만 회를 달성하며 그녀들이 여전히 이슈의 중심에 서있음을 증명해냈다.

K/DA가 가상의 콘텐츠를 현실로 치환한 사례라면, 최근 SM엔터테인먼트가 6년 만에 공개한 아이돌 그룹 에스파(aespa)는 그 반대의 경우다. 실재하는 현실의 멤버를 기반으로 그 멤버에 대응하는 아바타를 함께 공개한 것이다.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인 아바타를 만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 에스파의 주요한 세계관이다.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아티스트 멤버와 가상 세계에 존재하는 아바타 멤버가 소통하며 성장해나가는 이야기가 핵심이다. 에스파의 아바타 멤버에 대해 ‘실제 멤버와 본인이 쓰고 있는 SNS를 통해 뿌려진 모든 정보들을 네트워크 세상에서 AI가 학습해서 자동으로 만들어진 아바타’라고 SM엔터테인먼트는 설명하고 있다. 뮤직비디오와 무대, 티징 영상 등 다양한 영상에서 멤버들과 아바타가 커뮤니케이션하는 모습이 연출되기도 했다.

에스파에 더욱 주목하는 것은 ‘SM 컬처 유니버스(SMCU)’의 첫 포문을 연 아이돌 그룹이기 때문이다. SM엔터테인먼트는 “앞으로 SM의 모든 아티스트들이 SMCU라는 거대 세계관을 통해 서로 연결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는 엔터테인먼트 콘텐츠가 음악 단위의 뮤직 비즈니스를 넘어 음악과 퍼포먼스, 스토리텔링, 기술을 아우르는 트랜스미디어 콘텐츠로의 변화를 보여주는 움직임이다. 그리고 이러한 트랜스미디어 콘텐츠는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만들어낸 더 넓은 세계로 향유자를 진입시킨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이 만들어낸 가상과 현실을 아우르는 세계가 매력적이라면 향유자는 단일 콘텐츠를 즐기는 것을 넘어 그 세계와 연대감(Engagement)을 형성할 것이다. 그리고 향유자와 그 세계와의 연대감은 정보가 넘쳐나는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서 콘텐츠가 지속가능성을 얻을 수 있는 궁극적 지향점이자 원동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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