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K-팝에서는 영어 가사로 된 노래를 발매하거나 팝의 문법을 따르려는 시도가 이어져 왔다. 세계 시장에 녹아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최근의 음악 산업에 보이는 여러 변화는 K-콘텐츠를 논할 때 빠지지 않던 명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를 떠오르게 한다.
지금 글을 쓰는 5월 가장 화제를 모으는 K-팝 무대의 주인공은 걸그룹 캣츠아이(KATSEYE)다. 하이브 레이블즈와 게펜 레코드가 합작 제작하여 세상에 등장한 이들은 2023년 서바이벌 프로그램 <더 데뷔: 드림 아카데미(The Debut: Dream Academy)>로 육성 과정을 거쳐 2024년 싱글 <데뷔(Debut)>로 세계 음악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대중의 눈과 귀를 집중시키는 곡은 ‘데뷔’, ‘터치(Touch)’에 이어 발표한 신곡 ‘날리(Gnarly)’다. 6월 27일 발표하는 두 번째 앨범 <뷰티풀 카오스(Beautiful Chaos)>를 알리는 선공개 곡인데, 음악 방송 클립과 소셜미디어상의 바이럴을 바탕으로 발매 첫 주에 빌보드 핫 100 차트 92위로 진입하는 쾌거를 거뒀다. 공격적인 하이퍼팝 장르를 바탕으로 그려낸 전위적인 콘셉트와 이를 무대 위에서 개성 넘치게 소화하는 멤버들의 구성이 높은 관심을 받고 있다.
캣츠아이의 마농, 소피아, 다니엘라, 라라, 메간, 윤채는 다른 국적, 다른 인종, 다른 성장 배경을 갖고 하나의 팀으로 뭉쳤다. 2020년대부터 본격화한 K-팝의 세계 진출 과정에서 하나의 공식으로 여겨지는 ‘현지화 그룹’이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 니쥬(NiziU), 제이오원(JO1), 앤팀(&Team) 등 다양한 성공 사례를 학습한 K-팝 레이블은 세계 음악 시장을 주도하는 거대 음악 회사와 협력하여 영미권 시장으로의 진출까지 성공했다. 캣츠아이와 같은 본격적인 현지화 시도를 제외하더라도 K-팝의 제작 시스템은 전 세계적으로 수출되어 수많은 아이돌 그룹을 낳고 있다. 연습생 선발과 육성, 성장 과정을 미디어로 상품화하여 판매하는 전략, 엄격한 매니지먼트를 거친 활동, 컨베이어 벨트와 같은 조립식 제작 공정은 한국을 넘어 전 세계에 자리매김했다.
그룹 캣츠아이 © 2025 HYBE/Geffen Records
흥미로운 사실은 캣츠아이가 영미권 현지화 그룹 중 해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내고 있는 최초의 영미권 현지화 그룹이라는 점이다. ‘날리’가 대중적인 장르로 보기에 무리가 있는 곡이기에 그 성과가 더욱 두드러진다.
비결은 캣츠아이가 K-‘팝’이 아닌, ‘K’-팝의 문법에 충실한 덕이다. 캣츠아이의 윤채는 한국인 멤버다. 대다수 현지화 그룹은 한국계 멤버를 영입하는 정도에 그친다. 그에 반해 캣츠아이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 한국 문화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멤버가 있다. 한국 K-팝 팬들에게는 이 지점이 현지화 그룹에 대한 장벽을 낮췄다.
캣츠아이의 음악이나 문화적 지향은 팝에 가깝지만, 그들을 완성하는 과정에는 철저히 K-팝의 방식이 바탕에 깔려있다.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스타일의 정수를 빠르게 가져와 서사를 제거하고 3분 이내의 무대로 가공하여 내놓는 구성, 짧은 시간 내 눈을 사로잡는 무대 위 퍼포먼스가 K-팝의 오랜 가치를 계승하고 있다. 월드 투어에 중점을 두는 한국 그룹들과 반대로 한국 음악 방송 활동을 중요시하며 예능 프로그램 참여도 활발하게 임한다는 점 역시 특기할 만하다.
하이브 방시혁 의장이 인터뷰를 통해 ‘K-팝에서 ‘K’를 떼야 한다’고 역설하던 2020년대 초는 영미권 팝 생태계를 K-팝에 인위적으로 조성하던 시기였다. 해외 시장을 겨냥한 음악에서는 한국어보다 영어 가사가 늘어났고, 해외 거주 경험이 없는 멤버들이 한국어보다 영어로 매체와 인터뷰하는 광경이 나날이 익숙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결정은 세계 대중음악 시장의 흐름과는 정반대였다. 소셜미디어의 부흥과 스트리밍을 통한 음악 감상이 가져온 변화는 음악계의 절대 권력을 허물었다. 재능과 유명세에 관계없이, 인종과 국적, 문화의 구분 없이 가장 흥미롭고 재미있는 것이 문화계를 지배하는 급속 권력으로 작동하고 있다.
2020년대 다시금 미국 시장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는 라틴계 음악가들의 활약과 틱톡을 중심으로 부상한 여성 싱어송라이터들의 활약, 숏폼 바이럴 콘텐츠를 통해 메이저 시장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무명 가수와 비인기 장르의 급부상이 이를 증명했다. 가장 개인적인 속성이 가장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가장 세계적인 코드로 작용하는 오늘날이다.
지난해 가장 성공한 싱글로 손꼽히는 블랙핑크 로제와 팝스타 브루노 마스의 노래 ‘아파트(Apt.)’를 통해 우리는 지금까지 K-팝에서 ‘K’를 제거하려는 노력의 방향을 전면 재검토할 필요를 뼈저리게 체감했다. 한국인이 술자리에서 친목을 다지기 위해 외치는 게임 구호 ‘아파트’의 특수성이 이 노래의 핵심이다. 대한민국 혈통의 로제가 갖춘 문화적 배경의 자율성이 우리에게는 너무도 익숙하여 특별하게 여겨지지 않는 구호를 전 세계인의 합창으로 바꿔놓았다.
로제와 브루노마스가 함께 부른 노래 아파트 ©atlanticrecords
초기 한류의 원인이 K-팝의 잘 재단된 퍼포먼스와 화려한 무대 덕분이었다면, 2010년대 BTS를 필두로 영미권 팝 시장에서 K-팝이 유행을 일으킨 근본적인 원인에는 언제나 한국적인 정서가 있었다.
BTS는 데뷔 초 일곱 멤버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노래에 담아내고 몸이 부서질듯 춤을 추는 노력의 서사가 있었고, BTS 이후 영미권에서 좋은 성과를 얻고 있는 세븐틴과 스트레이키즈의 비결도 BTS의 성공 전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체 제작, 축적된 도전의 서사, K-팝 시스템 내부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했던 경력과 그로 인해 다져진 멤버들의 우정. 우리에게는 익숙한 요소라 해도 팝 시장에서는 흔치 않은 소재다.
최근에는 걸그룹에서 이와 같은 경향이 두드러진다. 24인조 다 인원 그룹 트리플에스(tripleS)는 그 흐름의 대표적인 팀이다. 최근 흔치 않은 대규모 구성부터 K-팝의 뿌리가 된 영미권 및 일본 아이돌 문화의 향수를 자극하는 이들은 ‘소셜, 소녀, 서울’이라는 모토 아래 한국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한국 소녀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주공아파트, 지하 연습실, 한강공원, 공공 자전거, 소셜미디어 등은 한국인이기에 온전히 공감할 수 있는 의미를 담고 있다. K-팝 아이돌을 꿈꾸는 아이들, 경쟁에 시달리며 쓰러져가는 10대들의 서사를 곡으로 옮긴 ‘걸스 네버 다이(Girls Never Die)’와 ‘깨어’에는 해외 팬들의 응원보다 한국 대중의 열광과 지지가 더 뜨겁다.
더블랙레이블의 신인 걸그룹 미야오(MEOVV)의 활동도 독특하다. 블랙핑크의 글로벌 성공을 견인했던 프로듀서 테디는 ‘붐바야’와 ‘휘파람’, ‘마지막처럼’ 등 초기 히트곡을 통해 K-팝의 핵심이 정확한 팝의 재현보다 뻔뻔한 레퍼런스와 고유한 키치함의 결합임을 일찌감치 파악하고 있었다. 신곡 ‘HANDS UP’의 핵심은 바둑알을 손가락으로 튕기는 ‘알까기’ 놀이다. 뮤직비디오에서 아프로비츠(Afrobeats) 비트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전자음악과 천수천안(千手千眼)의 손으로 어린이와 숨 막히는 대결을 펼치는 장면을 교차하는 광경이 색다른 재미를 전달한다.
미야오 - HANDS UP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THEBLACKLABEL
1990년대 문화 시장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격언이 익숙하다. 괴테가 말한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가 원 문장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두 개념에 계급을 나눴다. 한국적인 것은 우리에게만 통용되는 것, 세계적인 것은 수준 높은 것이었다. 세계 문화는 계층 나누기 대신 낯설고 독특한 흥미에 막대한 권력을 부여하고 있다. 지금의 K-팝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K가 붙어야 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고민 보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잘하는,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하지 않을까.
김도헌 / 대중음악평론가
유현석(한국콘텐츠진흥원 원장직무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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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 30일
한국콘텐츠진흥원
콘텐츠산업정책연구센터 미래정책팀
플러스81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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