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류 장르로 여겨지던 애니메이션이
국내외 극장가의 흥행작으로 부상하고 있다.
팬덤 중심의 전략을 고수하면서도 대중의 기호를 파악해
메인 장르로 떠오른 애니메이션의 흥행 전략을 들여다본다.
최근 우리 극장가의 두드러진 특징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약진이다. 잇단 흥행으로 불황을 깨는 구원투수가 되고 있다.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흥행하고 있다. 틈새 시장 비주류 ‘오타쿠 장르’로 여겨지던 일본 애니가 극장 흥행을 담보하는 주류 콘텐츠로 올라서는 중이다.
일본 애니 돌풍은 지난 8월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이하 <귀멸의 칼날>)>이 박스오피스 정상에 오르며 시작됐다. 9월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이하 <체인소 맨>)>이 바통을 이어받았고 10월에는 한때 주말 박스오피스 5위권을 일본 애니가 싹쓸이하기도 했다. <체인소 맨>, <극장판 주술회전: 희옥·옥절(이하 <주술회전>)>, <귀멸의 칼날>이 각각 1, 3, 5위를 차지했다.
11월 4일 기준 <체인소 맨>의 누적 관객 수는 281만 명. 300만 돌파를 목전에 뒀다. 장기 상영 중인 <귀멸의 칼날>은 557만 명으로 일본 애니 국내 흥행 1위인 <스즈메의 문단속>(558만 명, 2023년)을 바짝 뒤쫓고 있다. 올해 흥행 1위인 한국 영화 <좀비딸>(563만 명)에도 도전 중이다. <주술회전>은 흥행세가 꺾였다.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 포스터 ©MAPPA
OST도 덩달아 인기다. J-팝 스타 요네즈 켄시가 부른 <체인소 맨>의 오프닝 곡 ‘아이리시 아웃’은 공개 직후 멜론차트 6위를 찍었고, 애플뮤직과 유튜브뮤직 1위도 달성했다. J-팝 최고 기록이다.
세 작품은 모두 평범한 주인공 소년이 뜻밖의 힘을 얻어 인간을 위협하는 악령과 맞서 싸우는 액션 히어로물이다. 15세 이상 관람가지만 잔인한 액션 장면으로 수위가 높다. 전통적으로 우리 극장가에서 흥행했던 미야자키 하야오나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서정적인 세계와는 결이 다르다.
이들은 모두 원작 출판만화 → 여러 시즌의 TV 시리즈 → 복수의 극장판으로 확장되는 지식재산(IP)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개봉을 손꼽아 기다리며 극장으로 달려가는 탄탄한 팬덤이 있고, 작품 외에 OST와 코스프레, 캐릭터 굿즈 소비 등 ‘덕질’이 세계관을 완성시키는 프랜차이즈물이다. 아이맥스·4D·돌비시네마 등 특별관 N차 관람에, 입소문 효과에 따른 일반 관객의 유입도 상당하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코로나 팬데믹의 최고 수혜자로 꼽힌다. 과거 오타쿠의 장르였다면, 팬데믹 기간 넷플릭스 등 OTT를 통해 일본 애니를 접한 신규 팬들이 늘면서 시장 파이 자체가 커졌다. 지난 7월 미국 LA에서 열린 애니메 엑스포에서 넷플릭스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전 세계 구독자의 50% 이상이 애니메이션을 시청하고 있으며, 시청횟수도 5년 동안 3배 증가했다.
이 기간 국내 극장가 풍경도 변했다. 2021년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215만 명)이 일본 애니 최초로 연간 박스오피스 톱10(7위)에 진입했고, 이후 2년 주기로 돌풍이 이어지고 있다. 2023년에는 <스즈메의 문단속>(4위)과 <더 퍼스트 슬램덩크>(490만 명, 6위) 두 편이 1,000만 관객을 모았다. 그 다음이 올해다.
일본 애니의 인기는 전 세계적 현상이다. 미국에서도 지난 9월 <귀멸의 칼날>이 쟁쟁한 할리우드 경쟁작들을 제치고 2주간 북미 박스오피스 1위에 올라 할리우드를 깜짝 놀라게 했다. 10월 <체인소 맨> 역시 개봉 첫 주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귀멸의 칼날>은 리안 감독의 <와호장룡>이 세운 북미 외국어 영화 흥행 1위 기록도 깼다. 25년만의 일이다. 이 작품은 11월 3일까지 6억 7,000만 달러(약 9,682억 원)을 벌어들여 일본 영화 사상 최고 수익작이 됐는데, 11월 14일 중국 개봉을 앞두고 있어 10억 달러 돌파가 무난하리란 관측이 많다. 뉴욕타임스는 이 작품의 개봉 첫 주말 흥행 성적이 업계 예측보다 55%나 높았다면서 “젊은 관객이 할리우드에 ‘우리 취향이 바뀌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고 분석했다. <체인소 맨>의 기세도 만만치 않다. 영화 컨설팅업체 프랜차이즈 엔터테인먼트 리서치의 데이비드 그로스는 “이번에도 아시아의 큰 성공에 이어 전 세계적으로 애니메이션의 저력이 증명됐다. 애니메이션은 이제 세계적인 현상”이라고 평했다. 일본 애니는 2023년 해외 시장 수익이 내수를 앞섰고, 시장 규모 3조 엔을 돌파한 바 있다.
이처럼 관객을 사로잡는 일본 애니의 힘은 뭘까. 화려한 액션과 빠른 전개, 서사와 감정의 폭주, 작화 연출의 높은 완성도가 강점으로 꼽힌다. 황재현 CJ CGV 전략지원담당은 “실사 영화가 구현하기 힘든 애니메이션 특유의 상상력에 일반 영화와 차별화되는 독특한 스토리, 이를 바탕으로 한 뛰어난 작화를 대형 화면에서 확인하고 싶어하는 관객이 극장을 찾고 있다”고 분석했다. 원작 만화가 가지는 ‘만화적 판타지성’을 극대화해 애니메이션을 아예 ‘현실을 초월할 수 있는’ 장르로 만들고, ‘인력을 갈아 넣은’ 듯한 작화 기술의 완성도로 다른 어디서도 경험하기 힘든 시각적 쾌감, 몰입감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극장판’이니 극장에서 봐야만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콘텐츠, 그리고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폭주를 공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콘텐츠로 선보인 것이 핵심이다.
<귀멸의 칼날>은 격자 공간이 끝없이 이어지는 무한성의 아늑한 공간감부터 보는 이들을 아찔하게 만든다. <체인소 맨>은 요즘 유행하는 ‘도파민 터진다’는 말에 딱 들어맞는 작품이다. 잘 짜인 액션에 감정을 증폭시키는 연출을 결합해 롤러코스터를 탄 듯 시청각을 난타당하는 경험이 러닝타임 내내 이어진다. 그 쾌감의 강렬함과 흥분감 때문에 보다 큰 화면, 고음질로 반복 체험하고 싶다는 욕구가 절로 든다. 팬덤 특유의 ‘특전(현장 증정 굿즈)’ 모으기 문화도 있다. 아이돌 팬들이 앨범에 든 포카(포토카드)를 모으려 앨범을 사고 또 사듯, 특전을 모으기 위해 예매 후 영화는 안 보고 특전만 챙기는 ‘영혼 보내기’를 하기도 한다.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 굿즈 ©롯데시네마
최근 영화평론가 오동진은 한 칼럼에서 가수 콘서트나 스포츠 중계에 이어 일본 애니가 점령하는 극장가에 대해 “돌연변이 흥행물이 이어진다. 좋은 시그널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팬덤 빨’로 실사 영화의 자리가 줄어드는 것에 대한 위기감의 표현이겠으나 콘서트나 스포츠 중계는 현장을 가지 못한 팬들이 그 대용으로 극장을 찾는 것이라면, 일본 애니의 경우는 극장이 최종 목적지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일본 애니 붐을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극장의 변화는 요원할 것이다. 오히려 “극장판 애니처럼 타깃층이 명확한 영화가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김형호 영화분석가의 말이 더 유효해 보인다.
보다 본질적인 부분은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 자체의 재발견이다. OTT와 극장을 넘어 문화 콘텐츠 전반을 돌아볼 때 올해는 단연 애니메이션의 해였다. 일본 애니들이 극장을 달구기 전 이미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흥행 신화를 썼다. 과거에도 <겨울왕국> 등 빅히트한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있었고, <겨울왕국>의 무대가 된 노르웨이에 관광객이 몰리면서 관광산업에 대한 이 영화의 경제효과를 일컫는 ‘프로즌 이펙트’란 말이 나오기도 했다(‘프로즌’은 <겨울왕국>의 영어 제목이다). 그러나 올해처럼 히트작이 연달아 나온 경우는 드물었다. 전통적으로 애니메이션은 주로 어린이나 동반 가족 관객(디즈니), 혹은 비주류 오타쿠(일본 애니)의 전유물로 여겨지며 실사영화보다 저평가돼 왔으나, 이제는 실사 영화에 맞먹거나 그를 뛰어넘는 영향력과 파급력을 갖게 된 것이다. 하긴 사람 아닌 버추얼 아이돌이 음악방송 1위를 하는 시대이니, 애니메이션의 장르적 가능성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그 가운데 우리 애니메이션 <킹 오브 킹스>가 글로벌 시장에서 거둔 획기적인 성과가 눈길을 끈다. 국내 시각특수효과(VFX) 1세대인 장성호 모팩스튜디오 대표가 각본을 쓰고 연출한 기독교 영화로, 지난 4월 북미에서 개봉해 <기생충>을 꺾고 한국 영화 흥행 신기록을 세웠다.
<킹 오브 킹스> 포스터 ©모팩스튜디오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K-팝과 우리 전통을 소재로 하고 해외 한인 창작자들의 역량을 보여주며 성공했지만 ‘메이드 인 코리아’가 아니라는 아쉬움을 달래주는 쾌거였다. 애니 내수 시장이 크지 않은 국내 대신 북미를 타깃으로 한 역발상과 길게 수익이 나는 종교 콘텐츠라는 차별화 전략이 통했다. 무엇보다 우리 애니메이션의 기술적 완성도를 입증했다. 한국 애니 사상 최고 제작비(360억 원)에 최고 수익을 올렸지만 순수 국내 투자·제작을 고수하느라 10년이 걸렸다고 하니, K-애니메이션의 투자 확대와 자생력 강화를 위한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애니메이션의 시대’를 맞으며 우리에게 시급한 과제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논설위원)
유현석(한국콘텐츠진흥원 원장직무대행)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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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20일
한국콘텐츠진흥원
콘텐츠산업정책연구센터 미래정책팀
플러스81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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