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고는 이제 낡은 추억의 재현이 아니라
관계의 감정을 되살리는 감성의 장르가 되었다.
익숙한 과거의 장면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고 잊혔던
마음의 연결을 복원하려는 시대의 욕망이 그 안에 있다.
2025년 복고 콘텐츠가 보여준 것은
‘그때 그 시절’이 아니라 ‘그때 그 사람들’이었다.
본래 복고는 ‘향수’를 뜻하는 ‘노스탤지어(Nostalgia)’와 관련이 깊다. 하지만 이 말은 그리스어로 ‘귀환의 고통’이라는 어원을 지닌다. 그런데 드라마와 같은 문화 콘텐츠에서는 이 귀환이 ‘행복의 공유’로 소비되는 경향이 있다. 단순히 과거를 반복적으로 소환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과 부각이 이뤄진다. 여기에는 복고의 보편적 이유와 특수한 요인이 함께 작용한다.
복고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럴 때마다 늘 같은 대답을 하게 된다. 시대와 소재, 대상만 달라질 뿐 복고는 언제든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025년의 복고 트렌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 결은 이전보다 더 내밀해졌다. 그 내밀함은 관계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관계성에 집중했다는 것은 한국 콘텐츠가 내러티브 중심에서 벗어나 높아진 시청자의 기대에 맞춰 보다 내적인 완성도를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지 심리를 넘어 문화 심리 관점에서 좀 더 들여다보면 복고 콘텐츠를 선호하는 이유로 아날로그 감성이나 낭만적 정서를 들곤 한다. 불확실한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과거의 익숙함 속에서 안정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 사이의 관계성이 있다. 무엇보다 드라마는 사람 사이의 관계성 속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과거로 돌아가지만, 그 안에서는 여전히 얽히고설킨 감정과 관계가 펼쳐진다. 용서와 관용, 결핍의 충족, 상실의 회복을 통한 안정감이 이러한 이야기 안에 담겨 있다. 과거의 상황과 행동은 용서되고 관용될 수 있으며 지금에는 없거나 사라진 것을 복고 콘텐츠 속에서 다시 찾고 충족하려는 심리가 작동한다. 결국 우리는 여전히 서로 어울리며, 미우나 고우나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2025년 주목받았던 여러 작품을 통해 이러한 복고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나쁜계집애:달려라 하니> 포스터 및 스틸컷 ⓒ한국영상자료원
애니메이션 <나쁜계집애:달려라 하니>는 <달려라 하니>의 4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극장판이다. 올드팬들에게는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었지만, 단순한 복고가 아닌 새로운 구도와 설정, 스토리의 전개로 새로운 관계성을 더했다. 일단 주인공은 하니가 아니라 그동안 악역으로만 알려졌던 나애리였고, 하니는 나애리를 뒷받침하는 역할이 더 도드라졌다. 이번 극장판은 나애리의 숨겨진 과거를 드러내며, 하니와의 관계가 새롭게 진전되는 배경을 부각했다.
나아가 둘의 관계도 경쟁 관계라기보다는 워맨스(Womance) 코드였다. 둘은 화해하며 함께 성장해 나가는데, 나애리가 하니에게 “그땐 미안했어”, “부러워서 그랬나봐”라고 말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이들의 워맨스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그 인물이 바로 승부욕의 화신으로 불리는 새 빌런 주나비다. 극장판 애니메이션 <나쁜계집애:달려라 하니>는 비록 40년 전의 콘텐츠를 2025년에 다시 소환했지만, 그 전체 내용은 오늘날의 트렌드인 워맨스와 상호 구원 서사, 그리고 동반 성장 코드였다. 결국 하니와 나애리는 친구이면서 선의의 경쟁자라는 점만은 분명했다. 이런 관계성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보편적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언제든지 다시 소환될 만하다.
드라마 <백번의 추억> 포스터 ⓒJTBC
드라마 <은중과 상연> 포스터 ⓒ넷플릭스
드라마 <백번의 추억>은 1982년 두 명의 버스 안내양을 통해 우정과 사랑 그리고 꿈과 희망을 그리는 청춘 드라마이다. 고영례(김다미)와 서종희(신예은)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서로를 돕고 성장시키는 워맨스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한 남성 한재필(허남준)를 두고 삼각관계의 양상을 띠게 된다. 현재를 배경으로 한 삼각관계라면 진부하거나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지만, 198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백마 탄 왕자님과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전형적인 코드로 보일 수도 있으나, 그 시대에는 가능한 이야기였다. 게다가 이런 서사는 과거만의 것이 아니다. 오늘날 젊은 세대에게도 충분히 통할 수 있다. 친구이자 경쟁자인 관계, 한 사람을 사이에 둔 미묘한 감정의 줄다리기는 2030세대에게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될수록 신분 상승 욕망 역시 더 격렬해질 수 있다.
친구이면서 경쟁자이기도 한 관계는 드라마 <은중과 상연>에서 더욱 섬세하게 드러난다. 아마도 그 내밀하고 미묘한 관계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1990년대 초반의 10대부터 2000년대 40대에 이르기까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복고적 코드를 드러내지만, 그 안에는 현재의 관계 고민이 그대로 투영돼 있다. 시청자들의 반응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은중(김고은)과 상연(박지현) 같은 관계는 현실에서도 흔하다. 서로를 동경하면서 시기하고, 좋아하면서 미워하는 애증의 심리가 세밀하게 짜여 몰입감을 이끈다. 심리적 긴장이 워낙 섬세하게 표현돼 고통을 호소하는 시청자도 있지만, 이는 한국 드라마가 기존의 굵직한 서사 중심을 넘어 심리묘사와 관계의 흐름을 포착해내는 방식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때는 잘 보이지 않았던 감정과 생각이 시간이 흐른 뒤에야 전체적으로 보이고 의미로 해석되는 것처럼 말이다.
드라마 <태풍상사> 포스터 ⓒtvN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포스터 ⓒJTBC
사실 이러한 드라마의 관계성은 대체로 사적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례들이다. 좀 더 사회적 관계 측면에서 내밀한 관계성도 생각해 볼 수도 있는데 그 대표적인 드라마가 <태풍상사>와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이하 <김 부장>)>이다. <태풍상사>는 1997년 IMF 외환위기 시기를, <김 부장>은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자유롭게 오가며 스토리라인이 펼쳐진다. 하지만, 기업과 조직 안에서 벌어지는 관계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는 점에서는 두 작품은 공통적이다. 드라마 <태풍상사>는 강태풍(이준호)과 오미선(김민하)을 중심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종합상사(商社)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과정을 흥미롭게 다룬다. 하지만, 이는 뛰어난 주인공의 비즈니스 영웅담과는 거리가 멀다. 사장과 사원이지만 두 사람은 수평적 관계에서 함께 성장해 가는 파트너십의 이야기다. 여기에 로맨스가 살짝 더해 인간적인 온기를 더한다. 두 사람 사이에는 백마 탄 왕자나 신데렐라는 없다. 오히려 오늘날 이상적인 직상 상사와 직원의 관계성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평범해 보이는 운동화나 원단을 파는 일에도 수많은 사람과의 관계가 이어지고, 이를 풀어가는 과정이 디테일하고 설득력이 있게 그려진다. 결국 사업이란 사람 관계 속에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단순히 금모으기 운동으로 위기를 극복했던 시절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의 불황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던진다. 특히 비대면이 일상화된 디지털 시대에 몸으로 부딪치는 영업 분야의 가치를 다시금 환기시킨다.
이러한 영업의 가치를 부각하는 점은 <김 부장>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 드라마는 ‘영포티’ 프레임 때문에 평가가 달라졌다. 영포티라는 개념 자체가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기 때문에 <태풍상사>와의 비교가 흥미롭다. <태풍상사>의 강태풍(이준호)은 1972년생이고 김 부장 김낙수(류승룡) 역시 1972년생으로 설정됐다. 그들은 1990년대 초 물질주의 소비문화의 상징으로 불린 X세대다. 자존심이 강한 ACT 영업 1팀 부장 김낙수는 25년간 대기업에서 영업력과 정치력으로 버텨왔다. 특히, 자신의 직계 라인인 백상무와 농밀한 관계에 의존해 왔다. 그러나 그의 영업 방식은 여전히 대면 접촉 중심이라 시대 감각에 맞지 않았다. 말 그대로 하는 짓은 과거 퇴물형인데 겉으로는 최첨단 통신 분야의 대기업 상무를 지향하니 실제와 겉이 다른 영포티로 규정될 만했다. 만약 <태풍상사>의 강태풍처럼 회사 밖으로 나와 적극적으로 영역을 개척하고 시도했다면, 대기업 틀 안에서 안주하다 비참하게 쫓겨나는 신세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인생은 가까이 보면 비극이고 멀리 보면 희극이다. 복고 콘텐츠에도 이 통찰이 겹쳐진다. 당시에는 관계의 전모가 잘 보이지 않았고, 고통 속에 선택한 나름의 해결 방법은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는 전체적 진단과 성찰이 가능했진다. “그때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 텐데”하는 아쉬움, 바로 그 감정을 복고 콘텐츠가 반영한다. 현재 논하기에는 너무 내밀하고 진지한 메시지와 관계성을 복고 콘텐츠는 하나의 핑계이자 매개로 풀어내기도 한다. 그 안에는 잃어버린 가치나 결핍된 감정이 포함돼 있다. 지금의 어려운 관계도 시간이 지나면 비극이 아닌 희극으로 기억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복고 콘텐츠는 앞으로도 계속된다. 다만 시대의 고민을 담아낼 소재와 형식만 변할 뿐이다.
김헌식 / 중원대 특임교수, 문화정보콘텐츠학 박사
유현석(한국콘텐츠진흥원 원장직무대행)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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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20일
한국콘텐츠진흥원
콘텐츠산업정책연구센터 미래정책팀
플러스81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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