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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가동, K-스튜디오 시스템
글. 김동현(덱스터픽처스 대표)

한국콘텐츠진흥원은 2023년 콘텐츠산업 현황과 전망을 대표하는 10개 키워드를 소개하며 ‘본격 가동, K-스튜디오 시스템’을 그중 하나로 꼽았다. 다른 나라 콘텐츠와 차별화되는 K-콘텐츠를 만드는 스튜디오 시스템은 어떻게 작동하고 있으며 향후 개선점은 무엇일까?

K-스튜디오의 의미를 찾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스튜디오’라는 단어는 북미의 시스템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월트 디즈니나 워너, 파라마운트 등의 스튜디오들은 우리가 알고 있듯 투자부터 제작, 글로벌 유통까지 모든 단계를 아우르는 시스템으로, 하나의 스튜디오 안에서 온전하게 콘텐츠 생태계를 운용할 수 있는 규모의 사업자를 뜻한다. 그런 점에서 K-팝으로 글로벌화를 선도하고 있는 스튜디오 시스템과 유사한 의미로 영상 콘텐츠 제작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보니 K-스튜디오라는 키워드가 대두되는 모양새이다.

전 세계적인 팬데믹 상황을 거치면서 콘텐츠 제작 및 유통 환경에 큰 변화가 있었고 그 중심에는 넷플릭스와 같은 글로벌 OTT의 본격적인 부상이 있었다. 극장이 가지고 있던 절대적인 플랫폼으로서의 위상이 흔들리게 되면서 영화 제작 편수의 감소와 더불어 제작비 대비 시청 체류 시간 확보가 용이한 드라마 시리즈의 니즈가 확대되었다.

자본력과 시스템을 두루 갖춘 글로벌 OTT의 전면 등장은 드라마 시리즈 제작 편수 확대의 기폭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존 K-드라마 제작 환경에 종사하던 크리에이터의 가치를 인정하였고, 높은 제작비를 감당할 수 있는 환경 덕분에 제작이 어려웠던 작품들이 영상화되는 시도가 늘어난 계기가 되었다. 또한 주 52시간 근로시간 도입 같은 근무 환경의 변화는 마치 ‘생방’처럼 만들어지던 K-콘텐츠의 특징을 ‘사전 제작’으로 차츰 변화시켰고, 덕분에 K-드라마의 완성도는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이런 변화가 있기 전 우리나라 콘텐츠산업, 그중에서도 기존 레거시 미디어에서 제작하던 드라마는 ‘쪽대본’이라는 말로 상징되는 급박한 환경에서 만들어지곤 했다. 이런 시스템에는 수많은 스태프와 배우, 제작진의 희생이 불가피했지만 그 반대편에는 시청자 피드백을 바로 반영한다는 K-드라마만의 독특한 특징이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기존의 불합리한 부분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고 충분한 준비 기간을 통해 창작자의 의도가 십분 반영되는 ‘사전제작‘ 작품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혹자는 이를 두고 미국의 쇼비즈니스 환경과 비슷한 변화를 거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여전히 우리만의 특징을 나타내는 방식이 있다. 바로 K-콘텐츠가 가진 ‘이야기의 힘’이다.

한국적인 밀도와 스토리로 세계를 사로잡다

글로벌 OTT 플랫폼이 등장한 이후 많은 나라에서 수많은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우리의 콘텐츠는 눈부시게 성장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개연성이 있으면서도 빠른 전개, 그리고 다양한 장르의 다양한 이야기 덕분이다.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다양한 장르와 스토리의 이야기들이 생성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작품이 특별히 밀도가 높다고 느껴지는 원인은 무엇일까. 글로벌 시스템과 비교해서 큰 차이라면 ‘주로 한 사람의 스토리텔러가 전체적인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북미권의 대형 스튜디오는 하나의 시리즈를 만들 때 각 회차마다 새로운 에피소드 형식의 이야기들이 진행되며 이 에피소드는 서로 다른 작가와 연출가가 책임을 지는 경우가 많다. 즉 하나의 작품을 공동 창작 형태로 제작하는 것이다. 대신 작품 전체는 ‘쇼 러너(Show Runner)’로 불리는 메인 프로듀서(Executive Producer)가 이야기의 전반적인 흐름과 상황들을 총괄한다. 하지만 한국식 시스템에서는 한 명의 작가, 혹은 한 명의 연출가가 쇼 러너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공동 창작보다는 보조 작가나 공동 연출의 도움을 받는 정도로 일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덕분에 호흡이 긴 작품이라도 집필가 혹은 연출가의 사상과 생각이 온전하게 들어가 한층 더 밀도 있는 스토리 전개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또한 전술한 바와 같이 기존의 국내 드라마 시장 사이즈에서 제작할 수 있는 이야기의 한계가 명확했지만 글로벌 플랫폼의 등장으로 인해 소재의 한계가 사라지면서 재능 있는 국내 크리에이터의 역량이 폭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거대 OTT 플랫폼의 명과 암

K-콘텐츠가 이렇게 글로벌 플랫폼을 통해 높은 인기를 얻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이 현상이 K-스튜디오 그리고 한국식 슈퍼 IP의 등장에 자양분만 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자본력 차이에서 비롯된다.

높은 제작비를 통해 양질의 인력들이 투입된 완성도 높은 작품들은 시청자들의 눈높이를 글로벌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이제는 ‘한국에서 이 정도면 대단한 성과다’와 같은 친화적인 시선을 기대하기 힘든 시기가 도래하였다고 본다. 때문에 콘텐츠를 제작하는 회사들은 이전보다 더 높은 퀄리티의 작품을 제작하기 위하여 높은 제작비를 불사할 수 밖에 없게 되고, 그러다 보니 안정적인 제작비를 지원해줄 수 있는 글로벌 OTT에게 다시금 프로포즈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물론, 이런 경우 대부분 창작 콘텐츠의 권리는 플랫폼사에 귀속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성공한 IP를 통해 추가적인 수익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는 점에서 논쟁이 오가기도 했다. 하지만 플랫폼 사의 입장도 이해 가능한 측면이 있다. 리스크를 안고 자본을 조달했다는 점, 기존에 구축된 글로벌 유통 플랫폼을 통해 국내 작품의 해외 진출에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 등에서 권리를 요구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성공한 작품을 제작한 제작사와 창작자, 성공한 작품의 후속편에 대해서는 더 높은 이익과 권리를 보장해줄 수 있는 시스템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파트너로서 상생이 가능할 것이라 본다.

아쉽게도 신생 제작사에게 당장은 기획한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수는 있지만 결국 성공의 열매는 글로벌 OTT에게 내어줄 수 밖에 없는 현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글로벌 OTT와 상관없이 만들어지는 작품들은 어떨까. 이 역시 시청자들의 안목이 높아지고 작품에 대한 기대감이 커진 만큼 작품 하나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이전보다 훨씬 다양한 분야의 협업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다양한 IP를 소유한 큰 규모의 회사가 아니라면, 중소 규모 스튜디오 한 곳에서 작품의 기획과 제작을 모두 해내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 되었다. 제작비가 높아지다보니 웹툰이나 웹소설 등 이미 성공해서 인기가 검증된 작품으로 콘텐츠를 만드는 일도 많아지고 있다. 성공한 작품을 원천 IP로 활용할 때 수익 구조는 더 복잡해진다. 원천 IP 집필자는 물론 이 작품과 계약을 한 플랫폼까지 수익을 나눠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과정들은 결국 또 제작비의 상승이라는 결과를 초래한다. 하지만 최근 국내 플랫폼 사업자들 사이에서 너무 높아진 제작비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덕분에 플랫폼사들이 편성 블럭을 축소하거나 예능 프로그램으로 전환하는 등 드라마 시리즈 제작 편수가 크게 감소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은 K-스튜디오의 위기감을 높이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현실을 부정할 수만은 없다. 원래 모든 비즈니스는 필연적으로 시장 원리에 맞춰 변하고, 그 속에서 또 다른 질서를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산업 고도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는 부분으로 이해하고 싶다. 과열되었던 드라마 시리즈 제작 트렌드가 진정되고 자리를 잡아가면서 공급 편수의 조정과 더불어 제작비의 현실화를 통해 시장의 균형을 잡아가는 시기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또 국내 시장만으로 한계에 도달한 만큼 적극적인 해외 시장 진출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은 모두가 인지하는 바이다. 이 과정에서 결국 경쟁력이 있는 제작사들이 살아남게 될 것이고 협업은 선택이 아닌 필수로 자리잡게 될 것이라는 것이 업계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K-스튜디오가 경쟁력을 갖기 위해

자체적으로 작품을 기획해서 제작하고 배급까지 하는 것을 ‘스튜디오’라고 정의한다면 이 모델이 우리나라에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CJ 같은 경우 자회사의 카테고리 안에서 투자-제작-유통으로 이어지는 스튜디오의 시스템을 갖추고 있으며, 최근 카카오엔터테인먼트 역시 다양한 회사들을 흡수하면서 자신들만의 스튜디오를 갖추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는 여전히 중소 제작사들에게는 멀기만 한 일이다. 규모가 작은 제작사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부분 중 하나는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플랫폼의 독과점이다. 아무리 잘 만든 작품이라도 제대로 선보일 수 있는 플랫폼이 없다면, 유통을 도와줄 파트너가 없다면, 의미가 사라진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나라에서 거대 글로벌 유통 플랫폼이 갑자기 등장하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요원한 일이기에 최근 국내 주요 OTT플랫폼과 레거시 미디어에서 해외 시장에 국내 콘텐츠를 유통할 수 있도록 외연을 확장해 나가려는 시도에 응원과 박수를 보낸다. 결국은 시장의 사이즈가 커져야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 등의 정부 기관이 기존에 주최해왔던 콘텐츠와 제작사를 매칭하는 행사뿐만 아니라, 잘 만든 작품을 글로벌하게 선보일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만들어주는 행사도 더 많이 기획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작품을 만드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 K-스튜디오 제작사들은 유통 부분의 전문성이 부족하고, 글로벌 사업 전개를 위해 필요한 법적인 절차 등을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콘진원은 국내외에서 K-스튜디오 제작사들의 성공을 지원하고 있다. 사진은 ‘2023 코리아콘텐츠위크 in 베이징’ 행사 장면.

합리적인 시스템의 정착이 필요하다

현재 K-스튜디오는 제작사별로 조금씩 다른 형태로 진화 중이다. 하지만 그 각각의 회사들이 겪는 어려움은 대동소이하다. 한마디로 축약하자면 ‘자본력’과 ‘네트워크’. 그렇다고 모든 K-스튜디오가 거대 자본을 들여서 작품을 만들기는 어렵다. 이런 현실 속에서 중요한 것은 합리적인 수준의 제작비와 환경, 합리적인 수준의 플랫폼 경쟁 환경, 합리적인 수준의 저작권과 함께 창작에 대해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 등이라고 생각한다. 한 작품이 만들어질 때 그 권리나 수익이 특정 단계로만 집중된다면 공정한 거래가 이루어질 수 없고, 이는 결국은 영상 콘텐츠 전체의 질 저하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K-스튜디오가 효과적으로 정착하고 작동하기 위해서는 콘텐츠산업 전반의 균형추가 잡혀야 한다.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일에 대해 합리적인 대가를 받게 된다면 K-콘텐츠산업은 더욱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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